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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에 비로소 상업을 부른 전쟁, 임진왜란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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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역사를 보는 관점에 돈을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게 돈이다.

돈에서 시작해 돈으로 끝난다. 

앞서 두어 번 인용한 윤국형尹國馨 갑진만록甲辰漫錄에 증언이다.

계속 상기하지만 윤국형은 생몰년이 1543∼1611년임을 주시해야 한다.

임진왜란 한복판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인 까닭이다.  
 

○ 중국은 방방 곡곡에는 모두 점포가 있어 주식酒食과 거마車馬 등의 물품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가는 사람일지라도 은자 한 주머니만 차고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그 제도가 매우 편리하다.

우리 나라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여 저자나 행상 이외에는 사고 파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오직 농사로 생활을 꾸려갈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나 행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술과 꼴·땔나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 물품을 가져가는데, 멀리 가는 사람은 두세 마리 말에 실어가고, 가까워도 한두 마리 말이 필요할 정도여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물론 이 사정이 임진왜란기 조선중기 사정을 말해주니 한국 역사학 개사기 자본주의맹아론 관점에서는 조선후기가 아니라서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저 사정이 그 맹아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는 조선후기라 해서 사정이 코끝만큼도 달라진 게 없다. 

저가 증언하는 조선사정이 망할 때까지 조선 사정이었다. 

저런 데서 무슨 상업이 발달하고, 장사가 있겠으며, 저걸로 무슨 부농 부상이 출현하겠는가?

거대한 거지 나라가 조선이었다. 

심지어 영남대로 호남대로에도 상점 하나 그럴 듯한 것이 없어 바리바리 먹고 입을 것 싸들고 하는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형 트렁크 서너개씩 자가용에 지니고 다니는 사회였다. 

거기다 냄비 넣고 라면 넣고 쌀 넣고 된장 넣고 고추장 들어담가서 다니는 여행이었다.

역사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무슨 주막 같은 숙박시설이 즐비한 듯이 묘사하나, 천만에. 조선은 저랬다.

윤국형이 증언하는 딱 저 모습이었다. 

한데 이런 거지나라 조선에도 가끔씩 외부 충격에 의한 변화 바람이 일기도 했으니 같은 윤국형이 같은 갑진만록에서 하는 증언 한 토막이다.  

양 경리楊經理(이름은 호鎬)가 우리 나라에 와서 중국을 모방하여 연로沿路에 모두 점포를 설치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물건을 대도록 하였으니, 뜻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습속이란 고치기 어렵고 재력도 미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수령들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중국 장수가 지나갈 때면 관아에서 물건을 준비하여 길 왼편에 늘어 놓고 매매하는 듯이 하다가, 지나간 다음이면 거두니, 도리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하여 중국 사람에게 비웃음만 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 우리 나라 사대부는 평시에 조복朝服(조정에서 입는 옷)·공복公服(공무 집행 때 입는 옷)·시복時服(관복의 한 가지)·상복常服(평소 생활복)·제복祭服(제사 때에 입는 옷) 등이 있었는데,

임진년 난리 이후로는 이러한 각종 복장 형식이 없어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의주에 있을 때, 어전에 출입할 때나 시위侍衛할 때에 공경 이하가 모두 갓을 쓰고 칼을 찼으며 철릭과 사대絲帶를 걸치고, 가죽신이 없는 사람은 삼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

황상皇上이 마침 은폐銀幣를 하사하여 상은 호종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중국 물건도 차차 나오게 되었다.

검푸른 빛깔의 석새베를 사다가 만든 철릭을 상품복上品服이라 하였다. 

계사년1593(선조 26) 환도 후에는 중국 장수를 접반接伴하는 사람은 사모紗帽와 품대品帶로 시복時服을 입었고, 묘사제廟社祭의 헌관獻官도 시복을 입고, 집사執事는 모두 철릭을 입었다.

갑오년 이후로는 조정 관리의 철릭에 간혹 색이 있는 비단을 썼고, 석새베는 아전들 옷이 되었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중국의 대군이 나온 뒤로는 중국 상인들이 물건을 많이 가져와서 전후로 계속 이어졌고, 종로鍾路 거리에 가게를 열고 물건을 늘어놓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에 중국 물건이 도리어 천하게 되었고, 모양을 조금이라도 꾸미는 사람은 직물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겉옷 이외에는 혹 순전히 비단과 양갖옷을 입는 사람도 있고, 또한 귀천 노소를 통틀어 입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법관이라도 이것을 금하지 못하였으며, 상의 하교가 때로 혹 간곡하였지만, 한 사람도 두려워해서 입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진하게 물들인 초록 주의紬衣는 당상관의 연복燕服인데, 유생들이 공공연히 착용하니, 심하다. 사치의 유행이여! 

송 나라가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 사대부들이 자착삼紫窄衫을 입어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도 고치지 않았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수년이 지나지 않아 석새베를 버리고 입지 않으니 한탄할 일이다. 

기해년 무렵에 조정에서는 모자와 띠의 제도를 복구하여 흑색을 착용할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이는 중국인들이 아직도 다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착용하는 것을 모방한 것이다.

경자·신축(1600~1601, 선조 32~33) 연간에 다시 담홍색 복색을 입으니, 이는 우리 나라에서 유래된 옛 제도다.

얼마 못 가서 조복·제복·시복은 모두 복구되었으되, 공복만은 복구되지 않았는데, 새로 급제한 사람은 입었다. 

 

 

이 증언들을 우리는 부릅뜨고 봐야 한다.

다른 대목들은 제껴두고 내가 지적하고 싶은 한 대목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이 부른 이른바 전쟁 특수다. 

특히 그 전쟁이 외국군 참전을 부를 때, 그 외국군과 함께 중국 상업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여겨 봐야 한다. 

그래서 전쟁은 비극이라 하지만, 저와 같은 요동이 거지나라, 간단히 말해 변화라고는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사회를 근간에서 흔들어대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임란 참전을 결정하고, 그에 따라 대군을 파병하고, 그런 대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게 되면서 그들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곧 이를 받침하기 위한 장비들이 들어왔다.

그것이 곧 조선에서는 도대체가 볼 수 없는 장사, 상업이었다. 

아쉽게도 저렇게 요동친 변화가 명나라가 철군하면서 이내 조선은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찻잔 속 미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자본주의 맹아? 말 같은 소릴 해야 믿어주는 척이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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