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황복사지 인근에서 발굴한 통일신라시대 초창기 왕릉 석물이다. 보다시피 그라인더로 쏵 밀다시피한 모습이다.
성림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단에선 만들다 무슨 이유로 중단한 무덤이라 해서 그 성격을 가릉假陵이라 규정했다.
보통 제왕이 자기 죽어 묻힐 곳으로 생전에 미리 만든 무덤을 수릉壽陵이라 하는데 조사단은 중국용어 일본용어 싫다고 이리 이름 붙였다 한다.
아마도 현대 한국사회의 가묘假墓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여튼 수릉이라는 멀쩡한 말이 있고, 더구나 그 말이 《예기禮記》 이래 죽 사용됐음에도 굳이 가릉이라는 말을 창안한 조사단 의도가 수상쩍다.
수릉은 중국사에서는 확실히 진 시황제 이후 패턴화하다시피 한다. 한국사를 보면 내가 보고 들은 바가 짧은지 모르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확실히 자기 무덤을 자기가 만들고 그곳에 묻혔다.
이로 보아 고려시대 역시 수릉이 일반 패턴이었음을 안다. 이성계는 누차 지적했듯이 고려인이기 때문이다.
신라시대는 기록이 엉성해 알 수는 없으나, 장례 기간으로 보아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죽 수릉이었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월역일제以日易月制라 해서, 거상 기간 27개월 혹은 25개월을 하루 한달을 치는 시스템이 보편화하기 때문이다.
왕건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죽은지 27일만인가 매장하고 상복을 벗었다. 이를 처음 도입하기는 내 기억에 한 경제景帝인가 문제文帝거니와, 27개월 거상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생활에 여러 모로 불편하다는 반론은 이미 공자 시대에 있었다. 공자는 이 경우 무대포 원리주의에 가까워 3년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제왕이 3년 동안 상복 입고 있으면 생활 불편을 차치하고라도 권력누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심책으로 나온 것이 이일역월제다.
문제는 이런 단축이 급속도로 능제陵制 시스템에서는 수릉의 가속화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25일, 혹은 27일만에 매장까지 끝내기엔 제왕릉은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돈이 열나 들고 공역이 엄청나므로, 막상 죽음과 더불어 곧바로 시작한다고 해도 도저히 이 기간에 무덤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
두번째로 무덤 구조의 변화를 불러왔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구조로 보아 수릉이 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일본 열도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도 수릉이 될 수는 없다.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수는 있으나, 이 경우 저 거대한 봉분을 다시 파제끼고 묻어야 하기 때문에 수릉일 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 아마도 태종무열왕 무렵 이후 석실분으로 간 듯한데, 중국식 예제가 확실히 상장제에도 도입되었다는 증거다. 석실분이어야 생전에 미리 무덤을 맹글어 놓았다가 왕이 죽으면 간단히 대문을 열고 왕을 안치할 수 있게 된다.
석실분 도입은 합장 시스템을 일반화했다. 대문만 따면 되므로, 이 석실분은 여러 모로 경제적 편익이 있었으니 봉분을 두 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덤이 열라 크다 해서 그것을 만든 사회 혹은 국가, 혹은 그를 대표하는 군주가 진정한 고대국가에 돌입했니 하는 말은 허무맹랑 낭설 개소리 잡소리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고총高塚고분의 등장을 국가 권력자의 등장 지표로 삼은 고고학도들 말은 경청할 필요가 전연 없다.
집에 가서 애나 보라 해라.
(2017. 2. 11)
***
저 무덤이 가릉..곧 만들다가 만 무덤이라는 조사단 의견을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 그것이 왕릉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가릉일 수 없다고 본단 뜻이다.
저와 같은 주장에 기반한 조사단 의견이 논문 형태로 제출된 것을 내가 보긴 했지만 그 근거를 나는 납득하지 않는다.
이장하고 폐기한 무덤이다.
그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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