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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고창 용계리 가마에서 보는 도자생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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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용계리 가마터라는 곳이 있다. 


1980년대에 처음 조사하고 근자 대한문화재연구원에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본격적인 청자 생산에 앞선 시대에 도자기를 굽던 곳으로 드러났다. 


그러니깐 부안과 강진에서 우리가 말하는 그 청자를 생산하기 전에 이곳에서 청자를 생산하던 대규모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갓발



이 발굴현장을 어찌해야 할지 근자 고민이 좀 있는 모양이라, 현장에는 도자생산 모든 공정 생생한 공정을 볼 만한 흔적들이 드러났다.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장 설명에 나오듯이 이곳 출토 유물 중에 태평 임술, 1022년이라는 절대 연대를 새긴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이 일대 가마가 운영된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근거를 확보했다. 


고창 운곡람사르습지 인근 산 기슭에 위치하는 현장은 사적이라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일찌감치 지정되었음에도 관리 상태는 엉망이라, 잡풀이 우거졌으니, 이곳에는 근자 이곳을 발굴조사한 조사기관의 발굴성과 안내판이 있고, 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적시되었다. 


사적 제345호 고창 용계리 초기청자요지 발굴조사 안내문


● 조사기간 : 2013년 09월 25일 ~ 2013년 12월 09일


● 발굴기관 : (재)대한문화재연구원


● 사적 제345호 고창 용계리 청자가마터는 전국에 걸치 몇 개소 남아 있지 않은 고려시대 초기청자 가마터 중 하나이다. 


● 1983년 출토된 태평 임술太平壬戊(1022)명 기와와 한국식 해무리굽완 등의 존재를 통해 11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명문기와처럼 보이는 기와류 출토유물



● 이번 조사를 통해 보다 빠른 시기의 문화층에서 중국식 해무리굽완이 출토되어 가마의 운영 시기는 10세기 말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 이 퇴적구릉에서는 많은 양의 벽돌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현재 조사된 진화가마 보다 이른 시기의 벽돌가마[塼築窯]가 남아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 시굴조사를 통해 기존에 조사된 건물지보다 넓은 범위에 건물시설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 건물시설은 청자의 생산을 위한 작업장과 장인의 생활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려 초기 청자의 생산체제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 발굴조사결과 고창 용계리 초기청자 가마터는 한반도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벽돌가마(전축요)와 남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진흙가마(토축요)의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고창 용계리 청자가마터는 초기청자의 도입과 전개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학술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산 22외 일대 2만2천577㎡는 고창용계리청자요지[高敞龍溪里靑瓷窯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45호로 1991년 2월 26일 지정되었으니, 그에 대한 현장 안내판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국문 영문 모두 내가 손 하나 대지 아니하고 전재한다. 


고창 용계리청자요지(龍溪里靑容需地)

사적 제345호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이 가마터는 10세기부터 11세기 전반까지 청자를 굽던 곳으로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청자 가마터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세 곳의 가마는 길이가 38m. 31m, 14m로 서로 다르지만 그 폭은 1.1m~1.3m로 비슷하였다. 가마 바닥의 경사면은 갑발(匣鉢)을 이용하여 수평을 이루었으며, 벽과 천장은 돌과 점토를 섞어 쌓아 올렸다. 이 가마에서는 대접·접시·병(甁)·호(壺)-합(盒)·탁잔(托잔) 등을 구웠으며 대부분은 무늬가 없는 것들이다. 태토는 회백색의 양질의 것을 사용하였으며 비교적 세련된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 가마터는 인근 진서리나 유천리 청자요지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고려청자의 발달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The ruins of a Celadon Kiln in Yonggye-ri Gochang 

Historic Site No. 345 


This location which contains the oldestsite of pottery kilns in North jeolla Province, is where celadon porcelain wasbaked from the tenth century through the early eleventh century. The three kilns which have been found so farvary in length, each is 38m, 31m and 14m, but their widths are similar, which is 1,1m-1,3m. The kiln floor is kept level by using textured materials, and the walls andceiling were made of a mixture of ston and clay. In this kiln, bowls, plates, bottles, brass bowls, cops, etc. werebaked mainly with no pattern. Nevertheless, the kilnbaked relatively polished products, and used good quality, ashy-colored clay. Thiskiln, because it wasconstructed earlierthan those of neighboring jinseo-ri or Yuchon-ri is a valuable place to help us underst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Goryo celadon porcelain. 





한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있는 고려전기 청자를 굽던 가마터. 사적.


개설

사적 제345호.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청자가마터는 아산 댐 건설로 인해 1983년 3월 30일부터 7월 16일까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긴급히 발굴한 곳이었으나 다행히 댐의 수위가 가마터보다 낮아 현재 수몰되지 않고 보존된 상태다. 가마 유구는 남쪽으로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 퇴적구릉의 사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세 개의 가마가 상하로 중첩하여 축조되었다. 한편 퇴적구릉에서 확인된 여러 개의 건물지에서 ‘태평임술(太平壬戌)’명(1022) 기와편이 발견되었으며 초기 청자의 특징인 해무리굽 청자완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가마터의 활동연대를 짐작케 하는 유물로 추정된다.


내용

고창 용계리 청자 가마의 발굴 결과 3기의 가마(A, B, C가마로 명명)가 중첩되었고 이에 따라 3차에 걸쳐 가마 벽이 보강되었으며, 보강되는 동안에 가마 바닥은 모두 13회에 걸쳐 7cm 두께로 보토되었음이 드러났다. B가마는 길이 약 38m, 너비 1∼1.1m, 천장 높이 1.1m로 추정되는 지상 단실요로서 가마 내벽은 갑발과 석재를 점토와 섞어 쌓고 외벽은 잡석을 점토와 섞어 쌓았다. 측면 출입구는 아궁이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서 5∼5.5m 간격으로 모두 4곳이 확인되었는데 출입구의 너비는 50∼60㎝이다.


출토 도편은 모두 청자로 대접, 접시, 뚜껑, 합, 병, 항아리, 잔과 잔받침, 주전자 등으로 종류가 다양하며, 특히 완의 굽은 접지면이 깎아낸 면보다 더 넓은 소위 해무리굽 중에서 옥가락지 형태에 가까운 옥환저이고 그릇 안쪽에 둥그렇게 깎아낸, 소위 한국화된 해무리굽인 점이 특징이다. 무늬는 민무늬가 대부분이지만 음각과 양각기법도 있다. 유색은 비색청자로 발전하지 못하고 회청색, 녹청색, 녹갈색 등을 띠며 태토는 치밀하고 굽다리 4∼6곳에 얇은 내화토를 받쳐 포개어 구운 것이 특징이다. 또 원통형의 갑발은 기호를 음각한 것도 있고 측면과 상면에 1∼7개의 구멍을 뚫은 것도 있다. 이외에도 사발 모양의 갑발과 갑발 받침 그리고 연질토기편도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주로 작업용기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태평임술’명 평기와편이 건물지에서 출토되었고 이것과 동일계로 판단되는 기와편이 가마 벽에 섞여 있어 용계리 가마의 활동연대를 추정하게끔 한다.



사적 현황



특징

건물지에서 확인된 ‘태평임술’명 기와편의 상단은 대부분이 결실되었고, 하단 역시 일부 결실되어 있다. 기와편의 등쪽에는 문양과 명문이 찍혀 있는데, 상단에는 비교적 가는 어골문(魚骨文)이, 하단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은 어골문 기와조각이 가마 북벽에서도 출토됨에 따라 용계리 가마가 1022년 전후에 운영되었다고 추측하였다. 하지만 명문을 ‘태평임술’로 판독할 수 있을지의 문제와 ‘태평임술’명이 발견된 건물지와 요지 사이에 연결된 층위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출토된 청자 해무리굽은 용인 서리 등의 초창기 해무리굽과는 다른 형태로, 상대적으로 초기 청자의 다음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계리에서 출토된 해무리굽 형식은 11세기 말까지도 지속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의의와 평가

용계리 요지는 고려 전기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경기 일원과 황해도의 중서부지방과 강진 등의 남서부지방 초기청자요들의 경계 지역인 고창에서 어떻게 요업이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가마다. 중부에서 남부로 기술적 전이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정할 때 시기적으로도 용인서리와 같은 초창기 가마터의 기술과 양식이 다음 시기와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전개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용계리 요지의 발굴 성과는 고려청자의 변천과 특히 중서부지방과 남서부지방 초기청자의 상호 영향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참고문헌

『한국 도자기 가마터 연구』(강경숙, 시공사, 2005)

『고창 아산 댐 수몰지구 발굴조사 보고서』(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5)

「고창군 용계리요와 “태평임술”명 와편 및 전축요 문제」(이희관, 『미술사학연구』244, 한국미술사학회, 2004)

「고려도자요지의 연구」(윤용이, 『고고미술』 171·172,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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