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제38권 잡지 제7(三國史記 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직관 상(職官上) 서두에서는 신라 직관 체계 흐름을 다음과 같이 개술한다.
신라는 벼슬 호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그 이름이 같지는 않다. 이에는 중국과 동이 명칭이 뒤섞였으니[唐夷相雜], 예컨대 시중(侍中)이나 낭중(郞中)과 같은 것은 모두 중국[唐]의 벼슬로 그 의미를 고찰할 수 있지만, 이벌찬(伊伐飡)이나 이찬(伊飡)과 같은 것은 모두 동이의 말로써 그렇게 이름하게 된 연유를 알 수가 없다.
처음 이들 벼슬을 두었을 때는 틀림없이 관직마다 일정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위계에 따라 정한 인원이 있었을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 높음과 낮음을 변별하고 그 능력의 크고 낮음에 따라 대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문헌이 사라져 밝혀내거나 자세히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살피건대 제2대 남해왕(南解王)이 나라 일을 대신에게 위임하고는 그를 대보(大輔)라 일컬었고, 3대 유리왕(儒理王)이 17개 관위를 두었음을 안다. 이후 그 이름이 복잡해졌으니 이제 밝혀낼 수 있는 것들만 모아 이 편을 엮는다.
新羅官號 因時沿革 不同其名言 唐夷相雜 其曰侍中郞中等者 皆唐官名 其義若可考 曰伊伐飡伊飡等者 皆夷言 不知所以言之之意 當初之施設 必也職有常守 位有定員 所以辨其尊卑 待其人才之大小 世久 文記缺落 不可得覈考而周詳 觀其第二南解王 以國事委任大臣 謂之大輔 第三儒理王 設位十七等 自是之後 其名目繁多 今採其可考者 以著于篇
여느 조직이나 마찬가지로 국가 역시 통치 운영에는 관료가 필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으니, 그런 관료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엄격한 직제와 직급을 구분하기 마련이거니와, 그런 사정을 저 직관지 역시 그런 사정을 "관직마다 일정하게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위계에 따라 정한 인원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 조직은 그 활동 무대에 따라 대개 크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나뉘니,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개 관료조직은 피라미드형이거니와, 그 정점에 국왕이 위치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서 효율적인 관료제를 결정하는 관건은 관직과 관위다. 직(職)이 관장하는 업무 영역이라면, 관위는 관료가 결정하는 권한의 크기를 결정한다.
바로 이에서 관료제는 관직과 관위를 정하기 마련인데, 말할 것도 없이 관위가 높을수록 그가 커버하는 업무영역과 결정권한은 클 수밖에 없다.
신라 역시 이에서 한치 어긋남이 없어,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들은 크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나누는 이원제를 실시했으며, 관위 역시 17개 등급을 정했다. 이 17개 등급은 같은 삼국사기 직관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벌찬이니 잡찬이니 대아찬이니 사찬이니 급벌찬이며 대나마 혹은 나마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관료들 등급을 나누는 관위다. 이에 따라 이벌찬이라고 하면 제1품을 말하고, 소판이라고도 하는 잡찬은 제3품, 대아찬은 제5품품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정1품이며 종1품이니, 정2품이니, 종2품이니 하는 식으로, 그 명확한 등급을 말하는 명칭을 선호 혹은 병용하기도 해서, 지금의 우리가 그 등급의 크기와 높이를 아는 데는 상대적으로 신라시대에 견주어서는 편리하다.
신라사람들이 이벌찬을 제1품, 잡찬을 제3품 등으로 표현한 사례는 거의 접한 적이 없다.
관직과 관위는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 직관지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점에서 조금은, 아니 더 정확히는 아주 불편해 관직과 관위가 뒤섞이는 듯한 양상도 연출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니, 그것은 아마도 지금의 우리가 그 시대를 살지 않기에 그 시대에 상대적으로 익숙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관료들이 하는 일을 분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바로 관부(官府)가 출현하니, 지금의 외교부니 국방부니 문화부니 하는 것들이 바로 관부에 해당한다. 관부는 중앙정부의 그것이 있고, 지방정부의 그것이 있기 마련이다.
한데 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계가 생각보다는 아주 묘해서, 특히 전자의 후자에 대한 침해가 언제나 발생하거니와, 이를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묘한 대립관계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것이 마침내 폭발할 때는 우리는 그것을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의 반란이라 부른다.
각 관부에서 일하는 관료들은 직급이 있기 마련이거니와, 지방정부에 견주어 중앙정부 직급이 대체로 높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는 지방정부를 통치대상으로 간주한 까닭이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 대해 언제나 손아귀에 묶어두려 하며,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로의 권한 침탈 혹은 반란 혹은 독립을 겨냥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
지방정부에 대한 통제를 효과적으로 관철하고자, 인류 역사를 통털어 국가 권력이 가장 애용한 방식은 지방정부 관료들을 중앙정부가 직접 선발해, 지방정부에 파견하는 시스템이니, 이것이 이른바 군현제라 해서, 모든 지방을 군과 현으로 편제하고는 적어도 그 군수 혹은 현령만큼은 중앙정부에서 직접 파견하고, 그들을 일정한 주기를 통해 교체하곤 한다.
이 교체 시스템은 결국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현지 토호 세력화를 견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나온 것이다.
한데 인류 역사를 통해 보면, 의외로 현재의 지방자치제와 비슷한 자율형 지방정부 시스템도 간단없이 존재했으니, 소위 말하는 봉건제가 그것이다. 한국사에서는 이 봉건제가 좀체 눈에 띠지 않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 봉건제적 특징이 유별나게 한국 문화와는 달리 강하다.
문재인 정부가 얼마전, 어쩌면 미합중국 州制와 비슷한 정도의 지방자치체 구현을 표방했는데, 이렇게 되면 광역자치단체장은 미합중국 주지사에 버금가는 권능을 소유하게 되니, 외교권만을 제외한 모든 중앙정부 권능을 지닐 가능성이 크다. 미국 주지사는 국방권도 있다고 아는데, 주방위군이 그것이다.
이런 현대 관료제 혹은 지방행정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왜 필요한가 하면, 신라라고 해서 그런 관료제와 지방행정 조직이 없었다고는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외려 현대 국민국가 못지 않은 치밀한 관료제와 행정조직을 자랑했다.
문제는 삼국사기 직관지가 지적했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저간 사정을 관련 기록 민멸(泯滅)로 좀체 들여다 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록에 안 보인다 해서, 그들이 그런 제도 혹은 조직을 운영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유독 신라사에 대해서는 저런 하급 수준의 역사인식이 팽배한 실정이라, 신라사를 볼진댄, 적어도 진흥왕 시대 이전 신라사는 원시미개적인 조직으로 운용되었을 것이라는 통념이 널리 자리잡고 있다.
역사학도 몇몇은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악다구니를 쓰겠지만, 웃기는 소리다. 그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금석문 같은 자료 하나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새로운 신라사가 드러났다고 호들갑 뜨는 행위야말로 그네들이 바라보는 신라가 어떤 수준인지를 절감케 한다. (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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