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신탁통치안이 나왔을 때 이를 반대한 것은 오해에 기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탁을 주장했던 이승만 김구는 그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 당시 반탁은 전략적 오류라는 뜻일 터인데.
이 당시 신탁통치안 뉴스에 김구는 실제로 매우 격분했고 신중론을 펴는 송진우는 찬탁으로 몰려 누군가에 의해 암살당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승만과 김구가 신탁통치안을 반대한 것이 과연 오보 때문이었을까.
일본에 의해 조선이 해방되더라도 즉각 독립되지 않고 신탁통치가 시행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이 두 양반에 있어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다.
우선 조선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카이로선언 때, 조선의 독립을 규정하는 문구가 "즉각적으로 지체없이"가 아니라 "적당한 과정을 거쳐서"라고 모호한 표현이 들어간 것에 대해 이승만과 김구는 매우 불안해 했던 정황이 있다.
이 당시 카이로선언 문구에서 이들은 훗날 조선이 즉각 독립못하고 신탁통치로 갈 수도 있겠다는 징조를 본 것이다.
실제로 그 후에도 이승만은 해방이후 연합국이 조선의 독립을 즉각 시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데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카이로회담 이후 얄타회담이 끝난 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밀약설을 제기하였다.
이때도 모 기자가 카이로 회담에서 이러이러한 주장이 있었다는 기사를 썼고 이 기사를 본 이승만은 얄타밀약설을 공론화하였다.
이승만은 사실 미국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당시까지도 믿지 않았다.
이처럼 의심스러운 정황이 해방 이전 이미 있었는데 실제로 해방된 다음 조선이 즉각 독립되지 않고 신탁통치안 뉴스가 나오자 당연히 이승만과 김구는 카이로선언 이후 가지고 있던 의심에 더하여 이에 격렬히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흔히 해방 정국 우파가 미국의 의도에 따라 움직였다는 해방전후사의 서술을 자주 보는데 당시의 정황을 유심히 보면 연합국의 의도와 동기화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강하게 냈던 것은 오히려 이승만과 김구 쪽이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41년부터 해방때까지 4년간 소련군 지휘하 88보병여단에 편성되어 통제를 받던 김일성 등 좌파 진영은 해방후에도 소련에 의해 쉽게 통제되었다.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탁론을 오보에 따른 해프닝으로 보기 전에, 카이로선언 이후 김구와 이승만이 연합국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보던 정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특히 이승만은 카이로선언부터 얄타회담을 거쳐 포츠담 선언에 이르기까지 주의깊게 보지 않으면 연합국은 조선을 즉각 독립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전후사 국면에서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정확한 정세 판단을 생각해 보면, 이 경우도 그의 판단이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건 그렇고 신탁통치안은 정말 일부에서 설명하듯이 "오보"가 맞을까?
필자는 오보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미국과 소련, 영국 등 연합국들이 한반도를 놓고 밀약을 하고 있다는 구설수는 카이로 회담 이후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신탁통치 뉴스가 이런 밀약설의 처음도 아니었다.
얄타회담에서 처칠은 회담 이후 오고간 이야기는 모두 비밀이 붙이자는 주장까지 했었다.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 뉴스는 "오보"가 아니었을것이라 필자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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