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왕 큰아들이며 김춘추 생부(生父)다. 룡춘(龍椿)의 형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44년(622) 봄 정월에 왕이 몸소 황룡사에 거둥하였다. 2월에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 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 일찍이 왕 7년에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 이르러 내성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宮)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4년(635) 당이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에 책봉해 아버지 봉작(封爵)을 잇게 했다. 영묘사(靈廟寺)가 완성됐다. 겨울 10월에 이찬 수품(水品)과 룡수(龍樹).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현을 두루 돌며 위문케 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 아들인 이찬 룡춘(龍春)<룡수(龍樹)라고도 했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眞德)의 동생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고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角干)이니,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 끝누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황룡사 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대왕 때에 세운 것이다. 전에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호를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선덕대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당나라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638)에 우리나라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왕 12년 계묘년(643)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이에 (왕은) 이간(伊干) 룡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과 소장(小匠) 이백여인을 데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치었다. (탑의)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보 3자이다. 과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군신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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