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각간까지 역임한 무력(武力)이고, 어머니는 진흥왕 딸 아양(阿陽)공주다. 벼슬은 신라 17관위 중 제3인 소판(蘇判)에 이르렀다. 김소연(金逍衍) 혹은 김서운(金庶云)이라고도 했다. 진평왕 51년(629) 8월에 벌어진 낭비성 전투에 장군으로 출진해 고구려군을 대파했다. 숙흘종 딸인 만명과 야합해 장자인 김유신을 낳았으며, 이후 정식 혼인을 부모에게서 인정받아 차자 흠순, 보희-문희-정희 세 딸을 낳았다. 두 아들은 모두 현달했으며, 세 딸 중 문희는 김춘추와 혼인해 나중에 김춘추가 즉위하자 문명(文明) 황후에 봉해졌고, 그 아들 법민이 즉위하자 문명태후가 됐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김유신(金庾信) : 호력(虎力) 이간(伊干)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가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니 어릴 적 이름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이니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다....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 그대를 유인케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룡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해 우리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제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했습니다. 제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는 적진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옴에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 목을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았다. 뭇 군사가 승세에 따라 북을 치며 진격해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이에 그 성이 항복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飡) 서현의 딸이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 上 : 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서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은 자(字)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현재의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이 문간을 때리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없었다.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드디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임신하여 20개월만에 유신을 낳았다. 때는 진평왕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595)였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 유신(庾信)이라고 이름 지은 이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짓지 아니하랴?”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현재의 충북 진천]이다. 처음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 上 :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飡) 임말리(任末里), 파진찬(波珍飡)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스럽게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가죽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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