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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박혁거세(朴赫居世)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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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五陵), phto by Seyun Oh >

신라 건국시조. 생몰년 BC 69~AD 4, 재위 BC 57∼AD 4. 천상에서 백마가 나정으로 실어온 알을 깨고 태어나 어린 나이에 숙성한 모습을 보여 13세에 사로 6촌을 형성한 촌주들한테 추대되어 신라를 세웠다. 비슷한 신이한 행적으로 태어난 알영을 왕비로 맞았다. 변한을 병합하고 금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으며, 마한왕이 죽자 그곳을 정벌하자는 신하들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재위 61년만에 승하한 그를 묻은 무덤을 사릉이라 하며, 담엄사 북쪽에 있었다. 알영과의 사이에서 남해차차웅을 두었다. 

삼국사기 권 제1(신라본기 제1) 박혁거세 : 시조는 성(姓)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서기전 57) 4월 병진<정월15일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해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 이 때 나이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며 셋째는 취산(山) 진지촌(珍支村)<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며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이고 여섯째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이들이 진한(辰韓) 6부(六部)이다. 고허촌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둬 길렀다. 나이 10여 세에 이르자 남보다 뛰어나고 숙성(夙成)했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다가 이 때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 박[瓠]을 박(朴)이라 하니,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 말[辰言]로 왕을 뜻한다.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라고도 한다> 4년(서기전 54)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5년(서기전 53) 봄 정월에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어떤 할멈이 보고서 이상히 여겨 거두어 키웠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그의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는데, 자라면서 덕행과 용모가 뛰어났다. 시조가 이를 듣고서 맞아들여 왕비로 삼으니, 행실이 어질고 안에서 보필을 잘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두 성인[二聖]이라 일컬었다.8년(서기전 50) 왜인(倭人)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변경을 침범하려다가 시조가 거룩한 덕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되돌아 갔다.9년(서기전 49) 봄 3월에 살별[星]이 왕량(王良) [별자리]에 나타났다. 14년(서기전 44) 여름 4월에 살별이 삼(參) [별자리]에 나타났다.  17년(서기전 41) 왕이 6부를 두루 돌면서 위무하였는데, 왕비 알영이 따라 갔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쓰도록 권장하여 토지의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19년(서기전 39) 봄 정월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21년(서기전 37) 서울[京]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이 왕위에 올랐다. 24년(서기전 34) 여름 6월 그믐 임신에 일식이 있었다. 26년(서기전 32)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30년(서기전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32년(서기전 26) 가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있었다. 38년(서기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39년(서기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0년(서기전 18)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43년(서기전 15) 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있었다. 53년(서기전 5)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54년(서기전 4) 봄 2월 을유에 살별이 하고(河鼓) [별자리]에 나타났다. 56년(서기전 2)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59년(서기 2) 가을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있었다. 60년(서기 3)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며 금성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년(서기 4)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昇遐)했다. 사릉(蛇陵)에 장사지내니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嵒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셋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구仇라고도 씀)례마(禮馬)다.  처음에 이산(伊山·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량(梁)을 탁(涿)이라고도 한다)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빈지(賓之), 또는 빈자(賓子)나 빙지(氷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오니 이가 한기부(漢岐部) 배씨(裵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니 상서지(上西知).하서지(下西知).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니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오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혹은 갈골<葛谷>으로도 쓴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 조상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야 비로소 여섯 부(部)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는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기원전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으나 이는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는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 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하기를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왕후(王后)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어린 계집애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 입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냇물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이 일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王后)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해서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더니 쫓아다니면서 이를 방해하므로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五陵)을 만들고, 또한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曇嚴寺) 북릉(北陵)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太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말갈(靺鞨) 발해(渤海) :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변한(卞韓)과 백제(百濟) : 신라(新羅)의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한 19년 임오(壬午; 前 39)에 변한(卞韓) 사람이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왔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변한(卞韓)의 후손들이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卞韓)은 남쪽에 있고,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고,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고 했다. 최치원(崔致遠)은 "변한은 바로 백제(百濟)"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 제1(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하였다> 그는 혁거세 친아들이다. 신체가 장대하고 성품은 침착하고 중후하였으며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아루부인(阿婁夫人)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이어서 즉위하여 원년을 칭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대 혁거세(赫居世)는 성이 박씨이며 알에서 났다. 10세되던 갑자년에 즉위했으며 치세는 60년이다. 비는 아이영(娥伊英), 아영(娥英)이다.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徐伐 또는 斯盧, 혹은 鷄林이라했는데 다른 설로는 탈해왕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계림이란 국호를 정했다고 한다. 갑신년(기원전 37)에 금성(金城)을 쌓았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아버지가 혁거세(赫居世)이고, 어머니는 알영(閼英)이다. 성은 박씨이다. 왕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갑자년(4)에 즉위해 20년간 다스렸다. 이 왕위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제2대 남해왕(南解王) :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존장(尊長)에 대한 칭호인데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혁거세(赫居世)요,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며, 비(妃)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운제雲梯라고도 한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제왕운기 권下 신라기(新羅紀) : 신라 시조이신 혁거세님/조상은 인간 혈통 아니네/알 있더니 하늘에서 내려오니/크기는 박과 같고 붉은 실로 매어졌다/ 알 속에서 오래 있어 박으로 성을 삼으니(원주 :신라인은 飄를 朴이라 했다)이 어찌 하늘 사람이 아니신가/한 선제 오봉 원년 갑자년에/진한 땅에 개국하여/국경을 정했구나.

삼국사기 권 제45(열전 제5) 박제상 열전 : 박제상(朴堤上)<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 후손이며, 파사니사금 5세손이다.

삼국유사 제5권 감통(感通) 제7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 :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1 마한(馬韓) : 견훤(甄萱)이 고려(高麗) 태조(太祖)에게 올린 글에 “옛적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뒤를 이어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났으며, 백제(百濟)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낙랑국(樂浪國) : <국사(國史)>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혁거세(赫居世) 30년에 낙랑(樂浪) 사람들이 신라(新羅)에 항복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1 말갈(靺鞨) 발해(渤海) : 흑수(黑水)와 옥저(沃沮)에 대해서는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를 보면 "진한(辰韓) 북쪽에 남북의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東明帝)는 왕위(王位)에 선 지 10년만에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고, 온조왕(溫祚王) 42년에 남옥저(南沃沮)의 20여 집이 신라(新羅)에 투항(投降)했다. 또 혁거세(赫居世) 52년에 동옥저(東沃沮)가 신라에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했다. 그러니 동옥저(東沃沮)란 땅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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