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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양(金陽)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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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희강왕 : 희강왕(僖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흥덕왕이 죽자 그의 사촌 아우[堂弟] 균정과 [다른] 사촌 아우의 아들 제륭이 모두 임금이 되고자 하였다. 이에 시중 김명과 아찬 리홍(利弘)·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었고, 아찬 우징(祐徵)은 조카 례징(禮徵) 및 김양(金陽)과 함께 그의 아버지 균정을 받들어 한꺼번에 궁궐로 들어가 서로 싸웠다. 김양이 화살에 맞아 우징 등과 함께 도망해 달아나고 균정은 살해되었다. 그런 다음에 제륭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민애왕 : 민애왕(閔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2월에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아서 청해진에 들어가 우징(祐徵)을 찾아뵈었다. 아찬 우징은 청해진에 있으면서 김명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듣고 청해진 대사 궁복에게 말하였다.“김명(金明)은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리홍(利弘)은 임금과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이다. 바라건대 장군의 군사를 빌어서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게 해주시오.”궁복이 말하였다.“옛사람의 말에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지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드디어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그의 친구 정년(鄭年)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고서는 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김양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로 하여금 군사를 내어 맞서 싸우게 하였는데,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보내 기병 3천 명으로 돌격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상하게 하였다.2년(839) 봄 윤 정월에 밤낮 없이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언덕에 이르렀다. 왕은 군사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억훈(勛)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도록 하였다. 또 한번 싸움에 크게 이기니, 왕의 군사는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은 서쪽 교외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좌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남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군사들이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양 열전 : 김양(金陽)은 자가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 9세손이다. 증조는 이찬 주원(周元),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세력있는 집안으로써 모두 장수와 재상이 되었다. 양(陽)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고 걸출하였다. 태화(太和) 2년(828), 흥덕왕 3년에 고성군(固城郡) 태수(太守)가 되었고, 곧바로 중원(中原)[현재의 충북 충주시] 대윤(大尹)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에 무주도독(武州都督)으로 옮겼는데, 맡는 곳마다 정무(政務)를 잘 다스린 명성이 있었다. 개성(開成) 원년 병진(흥덕왕 11년, 희강왕 원년: 836)에 흥덕왕이 돌아가고 적자(嫡子)가 없어, 왕의 4촌 동생 균정(均貞)과 4촌 동생의 아들 제륭(悌隆)이 왕위를 다투었다. 양(陽)이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祐徵)과 균정의 매서(妹壻)인 예징(禮徵)과 함께 균정을 받들어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들어가 족병(族兵)으로써 숙위하였다. 제륭의 무리 김명(金明)·이홍(利弘) 등이 와서 포위하자 양이 군사를 궁문에 배치하여 막으면서 “새 임금이 여기에 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흉악한 반역을 할 수 있느냐.” 하고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사람을 쏘아 죽였다. 제륭의 부하 배훤백(裵萱伯)이 양에게 활을 쏘아 다리를 맞혔다. 균정이 말하였다.“저 편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형세를 막아 낼 수가 없다. 공은 짐짓 패한 척 물러가 뒷일을 계획하라.” 양이 이에 포위망을 뚫고 나가 한기(韓)<또는 한지(漢祗)로도 썼다.>의 시장에 이르렀을 때 균정은 난병(亂兵)들에게 죽었다. 양이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밝은 해를 가리켜 맹세하며,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개성(開成) 2년(희강왕 2년: 837) 8월에 이르러 전 시중 우징(祐徵)이 남은 군사를 거두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대사(大使) 궁복(弓福)과 결탁하여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양이 소식을 듣고 모사(謀士)와 병졸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바다를 건너 섬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보고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강한 군사 5천 인으로써 무주(武州)[현재의 광주광역시]를 습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니 주의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다시 진격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군과 마주 싸워 이겼으나, 우징은 군사들이 오래 피로하였으므로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병마(兵馬)를 휴양시키었다. 겨울에 혜성이 사방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하례하기를 “이것은 옛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수치를 씻을 상서이다.” 하였다. 양은 평동장군(平東將軍)이라 일컫고, 12월에 다시 출동하니, 김양순(金亮詢)이 무주(鵡洲) 군사를 데리고 와서 합치고, 우징은 또 날래고 용맹한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 여섯 장수를 보내 병사를 통솔케 하니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성하였다. 북을 치며 행진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북천(北川)에 이르니 신라의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가 군사를 이끌고 역습하였다. 장군 낙금·이순행이 기병 3천으로써 저쪽 군중을 돌격해 들어가 거의 다 살상하였다. [개성] 4년(민애왕 2년: 839) 정월 19일에 군사가 대구에 이르니, [민애]왕이 군사로써 항거하므로 이를 역습하여 이기니 왕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고 생포하고 죽인 자의 수를 능히 셀 수 없었다. 이때 왕이 허겁지겁 이궁(離宮)으로 도망해 들어갔는데, 군사들이 찾아 살해하였다. 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병을 거느리고 돌면서 말하기를 “본래 원수를 갚으려 한 것이므로 지금 그 괴수가 죽었으니 귀족 남녀와 백성들은 마땅히 각각 편안히 거처하여 망동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왕성을 수복하니 인민들이 안심하였다. 양이 훤백(萱伯)을 불러 말하기를 “개는 제각기 주인 아닌 사람에게 짖는다. 네가 그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다. 내가 따지지 않겠으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훤백을 저렇게 처리하니, 다른 사람들이야 무엇을 근심하리요.”라고 말하면서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4월에 궁궐을 청소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즉위케 하니, 이가 신무왕이다. 7월 23일에 대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양의] 공을 추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하였고, 곧 시중 겸 병부령(兵部令)으로 전보하였다.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겸하여 공에게 검교위위경(檢校衛尉卿)을 제수하였다. 대중(大中) 11년(문성왕 19년: 857) 8월 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대왕은 애통해하며 서발한(舒發翰)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의 구례(舊禮)에 따라 하게 하고, 그 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릉에 배장하였다. 김양의 종부형(從父兄) 흔(昕)의 자(字)는 태(泰)요, 아버지 장여(璋如)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까지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長慶) 2년(헌덕왕 14년: 822)에 헌덕왕이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려 하는데 적임자를 얻기 어려웠다. 어느 사람이 흔을 천거하기를 “태종의 후예요 정신이 밝고 빼어났으며 그릇이 깊고 크니 선발할 만하다.”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나라에 입조·숙위케 하였다. 1년이 지나 귀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詔書)로써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시태상경(試太常卿)을 제수하였다. 돌아오자 왕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특별히 남원태수를 제수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康州)[현재의 경남 진주시] 대도독(大都督)에 이르렀고, 곧 이찬 겸 상국(相國)의 벼슬을 더하여 주었다.개성(開成) 기미년(신무왕 원년: 839) 윤 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 군사의 침입을 막다가 패전하였다. 자신이 패하였고 또 죽지 못하였다고 하여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소백산(小白山)에 들어가 칡으로 만든 옷을 입고 채식을 하며 중들과 함께 노닐다가 대중(大中) 3년(문성왕 11년: 849) 8월 27일에 병들어 산골 집[山齋]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47세였다. 그 해 9월 10일에 나령군(奈靈郡)[현재의 경북 영주시]의 남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이 없고, 부인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는데, 일이 끝난 후에는 비구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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