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김유신 태실>
595~673년. 신라 장군이자 정치가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한을 일통한 제1의 원훈공신이다. 화랑세기에서는 그를 '신국의 영웅[神國之英雄]'이라 했다. 금관가야 왕가 직계 후손이자 부계와 모계 모두 신라 왕가 혈통을 이어받았다. 시조가 김수로, 증조가 금관가야를 들어 항복한 구형왕, 조부가 김무력, 아버지가 김서현이요, 어머니는 숙흘종과 만호 태후 사이에서 난 만명부인이다. 아버지 부임지인 만노군(지금의 진천)에서 태어나 15살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풍월주가 되어 출세 발판을 마련했다. 37세 때인 진평왕 61년(629)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 이름을 날렸으며, 이후 종횡무진 전장을 누빈다. 선덕여왕 재위 말년에 일어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 최정점에 섰으며, 이를 발판으로 진덕여왕을 거쳐 후사가 없자, 마침내 진지왕 손자인 김춘추를 왕위에 앉힌다. 백제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한 전쟁에서 신라 측 최고사령관으로 황산벌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에 앞서 이해(660) 봄 정월, 금강(金剛)이 죽자 그를 이어 이찬으로서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 뒤에는 더는 오를 관위가 없어, 태대서발한을 두어 그 자리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 문희는 그의 계략에 따라 김춘추 배필이 되어 문무왕 김법민을 낳았다. 그 자신은 18세 때인 건복(建福) 29년 임신(壬申·612)에 미실(美室)의 손녀이자 하종(夏宗)의 딸인 영모(令毛)와 혼인해 큰아들 삼광(三光)을 두지만, 어느 시점에 영모가 죽자 태종무열왕과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지소를 아내로 맞아 원술(元述) 이하 자식들을 낳았다. 아들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딸 넷은 행적이 전하지 않다가 최근 들어 그들 역시 당대의 권력자들과 얼키설키 혼인으로 연결된 것으로 드러났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우리 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했는데,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어야겠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는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옴에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그 성이 이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11년(642)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왕 의자(義慈)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ㆍ용석(龍石) 등이 죽었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성에서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왕을 찾아 뵙고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臧)[보장왕]은 평소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지라 군사의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에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하였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長蛇封豕]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저희 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 왕이 말하였다.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 땅이니, 그대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다.” 춘추가 대답하였다.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하는 데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고장(高臧)[보장왕]이 그 말의 불손함에 화가 나서 그를 별관(別館)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의 왕에게 알리니, 왕이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유신이 행군하여 한강(漢江)을 넘어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놓아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삼았다. 13년(644) ...가을 9월에 왕이 유신(庾信)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크게 이겨 일곱 성을 빼앗았다. 14년(645) 봄 정월에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않았는데, 백제의 대군이 또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왕이 명하여 막게 하였으므로 유신은 마침내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가서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2천 명을 목베었다.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는데, 또 백제가 다시 침입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왕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공(公)의 한 몸에 달렸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이를 도모해 주시오.” 유신은 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하여 서쪽으로 가는 길에 자기 집 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집안의 남녀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갔다.
<진천 김유신 탄생지>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원년(647)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苦戰)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2년(648)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독주도독 유신에게 명하여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유신은 이에 사졸(士卒)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갔다. 의직이 이에 대항하자 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夾擊)하였다. 백제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므로, 유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3년(649) ...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며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해결나지 않았으므로 도살성(道薩城) 아래 나아가 주둔하였다. 유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이 와서 염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검문[誰何]하지 말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군영 안을 돌아다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방어벽을 견고히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응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그 후에 싸움을 결판내겠다.” 첩자(諜者)가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은 군사가 증원될 것이라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이겨 장사(將士) 1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980명을 목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을 획득하였고 병기와 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2년(655) ...겨울 10월에 ....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7년(660) 봄 정월에 상대등 금강(金剛)이 죽었으므로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7년(660) ...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정방(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리에 이어져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 날 정방(定方)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경주 김유신묘 가는길>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그 언니[姉]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루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메게 하였다. 그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메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 원년(661)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 진주, 흠돌(欽突)을 대당(大幢) 장군으로, 천존, 죽지, 천품(天品)을 귀당(貴幢) 총관으로, 품일, 충상, 의복(義服)을 상주(上州) 총관으로, 진흠, 중신(衆臣), 자간을 하주(下州) 총관으로, 군관(軍官), 수세(藪世), 고순(高純)을 남천주 총관으로, 술실(述實), 달관(達官), 문영을 수약주 총관으로, 문훈(文訓), 진순(眞純)을 하서주 총관으로, 진복(眞福)을 서당(誓幢) 총관으로, 의광을 낭당(郎幢) 총관으로, 위지(慰知)를 계금(衿) 대감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29일에 대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당나라 사신이 [왕을] 조문하고 아울러 칙명으로 앞 임금[무열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가지 채색 비단 500단(段)을 주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하여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 하였다. : 2년(662) 봄 정월에 당나라 사신이 객관에 머물고 있다가, 이때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명(冊命)하였다. 이찬 문훈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인문(仁問)과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함께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얼음이 얼어 미끄럽고 또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의 등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壤)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군을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2월1일에 유신 등은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평양으로부터 3만 6천 보(步) 떨어진 곳이다. 먼저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 등 15인을 당나라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 날 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워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楊)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分],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頭髮) 30량(兩)과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이켜 맞싸워 1만여 명을 목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1만여 개를 획득하였다. 전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와 토지[田莊] 그리고 노비를 반씩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 ...3년(663) ...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케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는 인원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싸움의 공을 따져 상을 차등있게 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28(백제본기 제6) 의자왕 4년(644) : 가을 9월에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일곱 성을 빼앗았다. 5년(645) 여름 5월에 왕은 태종이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는 장군 유신을 보내 쳐들어 왔다. 7년(647) 겨울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步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8년(648) 봄 3월에 의직이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맞아 두번 싸워 크게 이겼다. 9년(649) 가을 8월에 왕은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庾信)ㆍ 진춘(陳春)ㆍ 천존(天存)ㆍ 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아 치자, [은상은] 이롭지 못하므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치고 다시 싸웠으나 우리 군사가 패배했다.
삼국사기 권제37(잡지 제6) 지리 :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니, 동명왕(東明王)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서울을 웅천(熊川)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에 이르러 서울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 곧 의자왕 재위 20년(660)에 이르러, 신라의 유신(庾信)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1-43(열전 제1-3) 김유신 열전 : 김유신(金庾信)은 서울 사람[王京人]이었다. 그 12대 할아버지[世祖] 수로(首露)는 어떤 사람인지를 모른다. [그는] 후한(後漢)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에, 구봉(龜峰)에 올라가 가락(駕洛)의 9촌(村)을 바라보고, 드디어 그 곳에 가서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9세손(世孫) 구해(仇亥)에 이르렀다. [구해는] 혹 구차휴(仇次休)라고도 하며, 유신의 증조(曾祖)이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하였으며, 유신의 비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의 자손이다.’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와 신라는 같은 성씨였다.할아버지 무력(武力)은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官)이 되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왕과 그 장수 네 사람을 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아버지 서현(舒玄)은 벼슬이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다.』하였으니, 서현은 혹은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은 자(字)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되므로 둘 다 적어 둔다.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에 들어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결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현재의 충북 진천] 태수(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벼락이 문간을 때리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없었다. 만명은 창문으로 빠져나가 드디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로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도 신축일(辛丑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임신하여 20개월만에 유신을 낳았다. 때는 진평왕 건복(建福) 12년, 수(隋)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595)였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부인에게 말하였다.“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으로 이름을 지어야 하겠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 어진 사람에 유신(庾信)이라고 이름 지은 이가 있으니 그렇게 이름 짓지 아니하랴?” 드디어 이름을 유신(庾信)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현재의 충북 진천]이다. 처음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 태령산(胎靈山)이라 한다.> 공은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기꺼이 따랐으니, [그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ㆍ백제ㆍ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다음과 같이] 고하여 맹세하였다.“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역을 어지럽게 하니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에 문득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이 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노인이 말하였다.“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고 인연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다.”공이 이 말을 듣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에게] 두 번 절하고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고 여섯 일곱 번 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보일 뿐인데 오색 빛처럼 찬란하였다. 건복 29년(진평왕 34년: 612)에 이웃 나라 적병이 점점 닥쳐오자, 공은 장한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켜 혼자서 보검(寶劍)을 가지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악에서 맹서한 것처럼 하고, 이어서 “천관(天官)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에 신령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 끝이 빛나게 내려오더니 칼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 임말리(任末里), 파진찬(波珍) 용춘(龍春)ㆍ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ㆍ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스럽게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가죽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하였을 때, 춘추공(春秋公)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品釋)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으로 여겨,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춘추가] 장차 떠나려 할 때 유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공과 한 몸이고 나라의 팔다리이다. 지금 내가 만약 저 곳에 들어가 해를 당하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는가?” 유신이 말하였다. “공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ㆍ백제 두 임금의 뜰을 짓밟을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을 대할 것인가?”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더불어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여 말하였다.“내가 날짜를 계산하여 보건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만약 이 기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만나 볼 기약이 없을 것이다.”그리고 나서 서로 작별하였다. 후에 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 춘추가 사간(沙干) 훈신(訓信)과 함께 고구려에 예방하러 갈 때 대매현(代買縣)에 이르니 고을 사람 사간 두사지(豆斯支)가 청포(靑布) 300보(步)를 주었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태대대로(太大對盧) 개금(蓋金)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식사 대접을 특별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고하여 말하였다.“신라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온 것은 아마 우리의 형세를 살피려는 것 같으니 왕은 도모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고구려] 왕은 무리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써 그를 욕보이게 하려고 말하였다.“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니,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춘추가 대답하였다.“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령을 좇을 수 없습니다.”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미처 처형하지 않았는 데, 춘추가 청포 300보를 은밀히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차려 와서 함께 술을 마셨다. 술이 얼근히 올랐을 때 도해가 농담조로 말하였다. “그대도 또한 일찍이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들었는가? 옛날에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을 앓았는데 의원의 말이 ‘토끼간을 얻어 약을 지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다 속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어 ‘제가 그것을 얻어 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섬 하나가 있는데, 맑은 샘물과 흰 돌에,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일이 있으며,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매와 새매가 침입하지 못한다. 네가 만약 가기만 하면 편히 살아 아무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토끼를 등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가다가,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이 들었는데, 모름지기 토끼간이 약이 된다고 하기에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 하였다. 토끼가 말하기를 ‘허허! 나는 신명(神明)의 후예라, 능히 오장(五臟)을 꺼내어 씻어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좀 불편하여 간과 심장을 꺼내 씻어서 잠시 바위 밑에 두었는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바로 와서 간이 아직도 그 곳에 있으니, 어찌 되돌아가서 간을 가져오지 않을 것인가?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는 것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 어찌 양편이 다 좋은 일이 아닌가?’ 하였다. 거북이 그 말을 믿고 되돌아갔다. 겨우 해안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도망치며 거북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다.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을 것이냐?’ 하니, 거북이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월을 보내 말하였다.“두 영(嶺)은 본래 대국(大國)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께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왕이 이에 기뻐하였다.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간지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감한 군사 3천 명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무릇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사람을 당해 내며,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사람을 당해 낼 수 있으니 그러면 천하를 마음대로 주름잡을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억류되어 있는데 두렵다고 하여 어려움을 당해 내지 않을 것인가?”이에 뭇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 곳에 가더라도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왕에게 청하여 군사 출동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 간첩 승려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를 [고구려] 왕에게 아뢰었다. [고구려] 왕은 이미 춘추의 맹서하는 약속을 받았고, 또 간첩의 말을 들었으므로 [춘추를] 더 잡아 둘 수가 없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바래다준 사람에게 말하였다.“나는 백제에 대한 유감을 풀고자 하여 군대를 청하러 왔다가 대왕께서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니 이는 신하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엊그제 대왕에게 서신을 올린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뜻이었을 뿐이다.”<이는 본기(本記)에서 진평왕 12년에 쓴 것과 같은 사건이나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가 고기(古記)의 전하는 바이므로 두 가지를 모두 남겨 둔다.> 유신은 [선덕왕 11년] 압량주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13년에 소판(蘇判)이 되었고,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을사년(선덕왕 14년: 645) 정월에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봉인(封人)의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을 상주(上州) 장군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니 유신은 명령을 받자마자 말에 올라 처자를 만나지 않고, 백제 군대를 반격하여 쫓아냈는데 2천 명을 목베었다. 3월에 왕궁에 돌아와 복명하고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 군사가 국경에 주둔하여 많은 군사로 우리를 치려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시오!” 하니 유신이 또 집에 들르지 않고 군대를 선발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이때 그 집사람들이 모두 문밖에 나와서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유신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돌아다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 이르러 말을 세우게 하고 사람을 시켜 집에 가서 미음[漿水]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우리들이 골육을 이별함을 어찌 한스러워 하랴!”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니 백제 사람들이 우리 군사의 방비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벼슬과 상을 더하여 주었다.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니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물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밤 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은 사병들에게 말하였다.“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女主]이 패할 징조이다.”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하였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9족(族)을 죽였다.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등 세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합 1만 명을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비령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사세가 급박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절을 하고는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적진에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 및 집종[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라서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춘추는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신은 비록 다소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구나!”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룰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전쟁의 승부는 대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경남 합천]에 이르니 백제가 맞서 대항하였다.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가볍게 보아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사신을 백제 장군에 보내 말하였다.“우리의 군주(軍主)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왕에게 아뢰었다.“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상주(上州)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였다. 다시 적의 영토에 들어가 진례(進禮) 등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목베고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을 만나 말하기를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고,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뼈를 고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太和] 2년(648)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왔다.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였다. 전군[三軍]을 다섯 방면으로 나누어 쳤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어 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쳐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잘 먹여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물새가 동쪽으로 날아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군과 병사들이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는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리에게 일렀다. “금일 반드시 백제인이 간첩으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검문하지 말라!”그리고는 군중에 전령을 돌렸다.“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옴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다!”간첩이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가 증원되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일시에 용감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장군 달솔 정중(正仲)과 병사 100명을 생포하고 좌평 은상,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병사 8,980명을 목베고 말 1만 마리와 투구 1천8백 벌, 기타 이와 비슷한 숫자의 기계를 노획하였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항복해 오는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과 병사 1천 명을 만나자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대로 맡겼다. 서울[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성문까지 나와 맞았고, 위로함이 극진하였다.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유신은 재상 이찬 알천(閼川)과 논의하여 이찬 춘추를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가 바로 태종대왕이다. 영휘 6년 을묘(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히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속출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니 이 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급찬 조미갑(租未@[土甲])이 부산현령(夫山縣令)이 되었다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어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성실하게 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자가 불쌍히 여기고 의심치 않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도망쳐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하니 유신은 조미갑이 충직하여 쓸 수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내가 들으니 임자는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하고 있어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길이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 말해다오!” 그가 답하기를 “공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부리고자 하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고 하였다.드디어 [그가]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아뢰었다.“제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아야 하므로 집을 나가 수십 일간 놀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갑이 틈을 타서 보고하였다. “저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저를 타일러 님께 가서 아뢰도록 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우리 나라가 망하면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다.’고 합디다.” 임자가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미갑은 두려워하며 물러 가 처벌을 기다렸다. 수개월 후에 임자가 불러 묻기를 “네가 저번에 말한 유신의 말이 무엇이었느냐?” 하기에 조미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하기를 “네가 전한 바를 내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아뢰어도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돌아와서 [김유신에게] 보고하였다. 겸하여 [백제의] 국내외의 일을 말하여 주었는데 정말 상세하였다. 이에 더욱 백제를 병합할 모의를 급하게 하였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에 대왕은 태자 법민(法敏)과 더불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남천(南川)에 와서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한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 유백영(劉伯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도착하였고, 부하 문천(文泉)을 보내 알려왔다. 왕은 태자와 장군 유신,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으로 군사를 싣고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니 정방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바닷길로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서울 사비성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태자가 와서 대왕에게 고하니 [대왕은] 장수와 병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사라(沙羅)의 정(停)에 이르렀다. 장군 소정방과 김인문 등은 바다를 따라 기벌포(伎伐浦)로 들어갔는데 해안이 진흙이어서 빠져 갈 수 없으므로 이에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군사를 진군시켜 당군과 신라군이 합동으로 백제를 쳐서 멸하였다. 이 전쟁에서 유신의 공이 많았으므로 당나라 황제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포상하고 칭찬하였다. 장군 정방이 유신, 인문, 양도(良圖)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나는 황제의 명으로 현지의 일을 적절하게 처리하도록 되어 있다.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나누어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여 그 공로에 보답하고자 하니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유신이 대답하기를 “대장군께서 황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 임금의 희망에 따라 우리나라의 원수를 갚아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백성이 기뻐하기에 바쁜데 우리들만 홀로 내려줌을 받아 스스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의리상 할 수 없다.” 하고는 받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미 백제를 멸하고, 사비의 언덕에 주둔하면서 몰래 신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군신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多美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인 것처럼 그 옷을 입혀서 만약 반역하게 하면 당나라 군대가 반드시 칠 것이니 이로 인하여 싸우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유신이 이 말은 취할 만하니 이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하여 적을 멸하여 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하니 유신이 말하였다.“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인데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스스로를 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당나라 사람이 통하여 우리에게 대비함이 있음을 염탐하여 알고는 백제왕과 신료 93인, 병사 1만 명을 포로로 잡아 9월 3일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 유인원(劉仁願) 등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정방이 포로를 황제에게 바치니 천자가 위로하면서 “어찌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하고 물었다. 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들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어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부형처럼 섬기니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용삭(龍朔) 원년(문무왕 원년: 661) 봄에 왕은 “백제의 남은 세력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는 이찬 품일(品日)과 소판 문왕(文王) 대아찬 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아 가서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이찬 흠순(欽純)<또는 흠춘(欽春)이라고도 썼다.>, 진흠(眞欽), 천존(天存),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인솔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예리한 군사가 모두 백제 땅에 가 있어, 나라 안이 비어 있으므로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으로 진군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였는데 고구려는 그 서쪽에,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이 수십 일에 이르니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오니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이전에 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고 절에 나아가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마침 하늘의 변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극한 지성이 감동시킨 바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일찍이 한가윗날 밤에 자제를 거느리고 대문 밖에 서 있는데 문득 서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신은 그가 고구려 첩자임을 알고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니 그 사람은 얼굴을 숙이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단지 사실대로 말하라!” 하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이 말하였다.“우리나라 임금님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이 즐겁게 모두 자기 일을 즐기고 있음을 지금 네가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어라!”드디어 위로하여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유신이 재상을 하고 있는 한 가벼이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일을 알리고 겸하여 출병하여 함께 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문훈(文訓) 등을 인솔하여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을 때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하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담당 관청이 보고하기를 “앞길에 백제의 잔적이 옹산성(瓮山城)에 모여 있어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진격시켜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말하였다.“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벌을 당하였다. 명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겠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지금 너희들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어찌하고자 함인가?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성에서 나와 항복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를 기약함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다.”적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비록 조그만 성이지만 군사와 식량이 모두 족하며, 장수와 병졸이 의롭고 용기가 있으니 차라리 죽도록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니, 유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새와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경우를 두고 말함이라!” 하고는 이에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공격하였다. 대왕은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공격하여 창끝과 칼날을 겁내지 않았다. 9월 27일에 성을 함락하자 적의 장수를 잡아 처형하고 그 백성은 놓아주었다. 공을 논하여 장수와 병사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도 비단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어. 이에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먹인 후 당나라 군사가 와 있는 곳에 가서 이와 합치려 하였다. 대왕은 앞서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蘇)장군에게 서신을 보냈던 바 이 무렵 돌아와 보고하였다. 드디어 [소]정방의 말을 전하였다. “내가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를 건너 적을 치러 배로 해안에 이른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대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으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어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조처하여 주십시오!” 대왕이 뭇 신하에게 “어찌하면 좋을꼬?” 하고 물으니, 다같이 말하기를 “적의 경계 내에 깊이 들어가 식량을 수송하는 것은 형편상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다. 대왕은 걱정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유신이 앞에 나아가 대답하였다.“신이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국가의 일을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 이 늙은 신하가 절의를 다하여야 할 때입니다. 마땅히 적국에 가서 소(蘇) 장군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대왕이 자리 앞에 나아가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공의 어진 보필을 얻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 일이 뜻한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공의 공덕을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유신이 이미 명을 받고 현고잠(懸鼓岑)의 동굴 안의 절에 가서 재계하였다. 곧바로 영실(靈室)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분향하여 여러 날 밤을 지내고 나와서 사사로이 홀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나의 이번 걸음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하니 왕이 손수 쓴 글을 유신에게 주었는데 『국경을 벗어난 후 상벌을 마음대로 하여도 좋다.』 하였다. 12월 10일에 부장군 인문(仁問), 진복(眞服), 양도 등 아홉 장군과 더불어 병사를 인솔하고 식량을 실어 고구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임술년(문무왕 2년, 662)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않자 유신이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 곳에 왔는가?” 하고는 스스로 먼저 배에 올라 건너니 여러 장군과 병졸이 따라서 강을 건너 고구려 강역 안에 들어갔다. 고구려인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壤)에 이르렀다. 유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역을 침범하여 우리 인민을 죽이고 젊은이를 포로로 잡아가 목을 베었으며, 혹은 어린애를 잡아다가 종으로 부린 지가 오래되었으니 통탄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에 나가는 것은 대국의 힘에 의지하여 두 나라 수도성을 함락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다. 마음 속으로 맹서하고 하늘에 고하여 신령의 도움을 기대하나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말한다. 적을 가벼이 보는 자는 반드시 성공하여 돌아갈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포로로 잡힘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내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이다.” 그러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컨대 장군님의 명을 받들겠으며 감히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북을 치며 평양으로 향하였다. 길에서 적병을 만나면 역습하여 이기니 얻은 무기가 심히 많았다.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웠고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짐이 많았다. 유신이 어깨를 드러내 놓고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 나가니 뭇 사람이 이를 보고 힘을 다하여 달려 땀이 나자 감히 춥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험한 곳을 지나니 평양이 멀지 않았다. 유신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의 식량 부족이 심할 터이니 마땅히 먼저 알려야겠다.”고 하고는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를 불러 말하였다.“내가 젊어서 그대와 놀 때 너의 뜻과 절의를 알았다. 지금 소(蘇) 장군에게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네가 가지 않겠는가?”열기가 말하였다.“내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중군(中軍)직을 맡았고, 하물며 장군님이 시키신다면 비록 죽는 날도 살아 있는 때와 같다고 여기겠습니다.”드디어 힘센 군사 구근(仇近) 등 15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하기를 “유신 등이 군사를 이끌고 식량을 가지고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고 하니, 정방이 기뻐서 글로 감사하다고 썼다. 유신 등이 양오(楊)에 다다라 한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적국의 소식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베와 비단을 주었더니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 버렸다. 유신이 양오(楊)에 진을 치고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인문, 양도(良圖) 그리고 그 아들 군승(軍勝) 등을 보내 당나라 군영에 가서 왕의 명으로 군량을 보냈음을 알렸다. 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하였으므로 힘껏 싸울 수 없어 식량을 얻고는 돌연히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는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귀국하였다. 그때 고구려인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우리 군대를 돌아오는 길에서 공격하고자 하였다. 유신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적마다 소리를 내게 하였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고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에 이르러 나루를 건너 강 가에서 군사를 쉬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이를 알고 추격해왔다. 유신이 만노(萬弩)를 일제히 발사하니 고구려 군대가 물러나므로 여러 부대[幢]의 장병을 독려하여 나누어 출발하게 하고 역습하여 패퇴시켰다.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았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고 돌아오자 상을 내려 식읍을 봉해 주고 벼슬을 차등있게 하였다. 용삭(龍朔) 3년 계해(문무왕 3년: 663)에 백제의 여러 성이 몰래 부흥을 꾀하여 그 장수들이 두솔성(豆率城)에 근거하며 왜에 군사를 청하여 후원을 삼으니 대왕이 친히 유신, 인문,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 장군을 인솔하고 7월 17일에 정벌에 나서 웅진주(熊津州)에 이르러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백제인과 왜인이 진영에서 나오자 아군이 힘껏 싸워 크게 이겼다. 백제와 왜인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하였다.“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역이 나뉘어 있어 일찍이 전쟁한 일이 없고 단지 우호관계를 맺어 사신을 서로 교환하여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금일 백제와 죄악을 함께하여 우리 나라를 도모하는가? 지금 너희 군졸은 나의 손아귀 속에 들어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겠다. 너희는 돌아가 너희의 국왕에게 전하라! 그리고 너희는 가고 싶은대로 가라!”군대를 나누어 치니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나 오직 임존성(任存城)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또한 식량이 많아 30일을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가 피곤하여 싸움을 싫어하였으므로 대왕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아도 다른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에 서울에 와서 유신에게 토지 500결을 내려주고 다른 장병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김유신(金庾信) 하<아들 삼광(三光)ㆍ원술(元述), 손자 윤중(允中)ㆍ윤문(允文), 현손 암(巖) 붙임>인덕(麟德) 원년 갑자(문무왕 4년: 664)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또 사비성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도독(熊州都督)이 자기 소관의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안개가 끼어 사람과 물건을 분별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싸울 수가 없었다. 백산(伯山)을 시켜 [그 사연을] 고하니, 유신이 은밀한 모책을 주어 이기게 하였다.인덕 2년(문무왕 5년: 665)에 [당나라] 고종이 사신 양동벽(梁冬碧)ㆍ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 문안하고 겸하여 유신을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봉하여 주었다. 건봉(乾封) 원년(문무왕 6년: 666)에 황제[고종]가 칙명(勅命)으로 유신의 장자(長子) 대아찬(大阿) 삼광(三光)을 불러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 삼고, 이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총장(摠章) 원년 무진(문무왕 8년: 668)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시켜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치게 할 때, 우리에게도 군사를 징발케 했다. 문무대왕이 군사를 내어 호응하려고 하여 흠순ㆍ인문에게 명하여 장군을 삼았다. 흠순이 왕에게 고하기를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으면 후회가 있을까 합니다.”고 하였다.왕이 말하였다.“공들 세 신하는 나라의 보배이다. 만약 다 함께 적지로 나갔다가 혹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가 어찌될 것인가? 그러므로 유신을 머물러 나라를 지키게 하면 흔연히 장성(長城)과 같아 끝내 근심이 없을 것이다.”흠순은 유신의 아우이고, 인문은 유신의 생질이므로, [유신을] 높이 섬기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이때 이르러 유신에게 고하기를 “우리들이 부족한 자질로 지금 대왕을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여야 좋을지를 원컨대 지시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유신이] 대답하였다.“대저 장수된 자는 나라의 간성(干城)과 임금의 조아(爪牙)가 되어서 승부를 싸움터에서 결판내야 하는 것이니, 반드시 위로는 하늘의 도[天道]를 얻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地理]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인심(人心)을 얻은 후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충성과 신의로써 존재하고 있으며,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하였고, 고구려는 교만함으로써 위태롭게 되었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편의 잘못을 친다면 뜻을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나라 밝은 천자(天子)의 위엄을 의지하고 있어서랴! 가서 힘써 자네들 일에 그르침이 없게 하라.”두 공(公)이 절하며 “받들어 잘 행동하여 감히 실패함이 없게 하겠습니다.” 하였다.문무대왕이 이미 영공(英公)과 함께 평양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南漢州)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王)[성왕]이 고리산(古利山)에 있으면서 우리나라를 치려고 꾀하였을 때, 유신의 조부(祖父) 무력(武力) 각간(角干)이 장수가 되어 맞아 쳐 승세를 타서 그 왕 및 재상 네 사람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 침입을 좌절시켰으며, 또 그의 아버지 서현은 양주(良州)[현재의 경남 양산] 총관(摠管)이 되어 여러 번 백제와 싸워 그 예봉을 꺾어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변방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짓고 누에를 쳤으며, 군신은 국가의 일에 골몰하는[宵衣食] 근심을 없게 하였다.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다. 만일 공(公)의 한 집안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그의 직(職)과 상(償)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참으로 대왕의 생각하심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와 식읍 500호를 주었으며, 이어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궐에 오름에 있어서 몸을 굽히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총장 원년(668)에 당나라 황제[고종]가 이미 영공의 공을 포상하고, 드디어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으며, 군사를 내어 싸움을 돕게 하고 겸하여 황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또한 조서(詔書)를 유신에게 내려 포상하고 칭찬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에] 들어와 조회(朝會)하기를 유시(諭示)하였는데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 조서는 집에 전하여 오다가 5대손[世孫] 때 잃어버렸다.함녕(咸寧) 4년 계유(673)는 문무대왕 13년인데 봄에 요상한 별이 나타나고 지진이 있어 대왕이 걱정하니 유신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의 변이는 재앙이 노신에게 있고,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은 근심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대왕이 “이와 같다면 과인이 더욱 근심하는 바이다.” 하고, 담당 관서에 명하여 기도하여 물리치게 하였다.여름 6월에 군복을 입고 무기를 가진 수십 명이 유신의 집으로부터 울며 떠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는데, 조금 있다가 보이지 않았다. 유신이 [이 소식을] 듣고 “이들은 반드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陰兵)이었는데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떠나간 것이니, 나는 죽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 후 10여 일 지나 병이 나 누우니, 대왕이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이 온 힘을 다하여 어른[元首]을 받들고자 바랬는데, 견마(犬馬)의 병이 이에 이르니 금일 후에는 다시 용안(龍顔)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은 일이다. 만일 피하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여야 좋을까?”유신이 대답하였다.“신이 어리석고 못났으나 어찌 국가에 유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밝으신 성상께서, 등용하여 의심치 아니하시고, 일을 맡김에 의심치 않으셨기 때문에 대왕의 밝으신 덕에 매달려 조그마한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저으기 편안하여졌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보면 예로부터 대통(大統)을 잇는 임금이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하지 않는 이가 없지 않지만 끝까지 잘 마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靡不有初 鮮克有終].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수성(守成)이 또한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에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에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국가의 기반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왕이 울면서 이를 받아들였다.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자기 집의 자기 방에서 죽으니 향년이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부의(賻儀)로 문채를 놓은 비단 1천 필과 조(租) 2천 섬을 주어 장사에 쓰게 하였으며, 군악(軍樂)의 고취수(鼓吹手) 100인을 주어 금산원(金山原)에 장사(葬事)지내게 하고, 담당 관서에 명하여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케 하였다. 또 민호(民戶)를 고정 배치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다.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었다. 아들 다섯 사람을 낳으니, 맏이는 이찬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海干)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長耳)이며,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었다. 딸은 넷이고, 또 서자(庶子)로 아찬 군승(軍勝)이 있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후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 대왕이 부인에게 말하였다.“지금 중앙과 지방이 편안하고 군신이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곧 태대각간의 공이니, 생각컨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어 조심하고 훈계함이 짝하여 숨은 공이 컸으므로, 과인이 그 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일찍이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소. 남성(南城)의 조(租)를 매년 1천 섬씩 주겠소.” 후에 흥덕대왕이 공[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책봉하였다.그 전에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소유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 치게 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말갈(靺鞨)군과 함께 석문(石門) 들에 주둔하니, 왕이 장군 의복(義福)ㆍ춘장(春長) 등을 보내 방어케 하였는데, [이들은]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장창당(長槍幢)만이 따로 주둔하다가 당나라 군사 3천여 명을 만나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당(幢)에서 함께 말하기를 “장창당(長槍幢)이 홀로 진을 쳤다가 성공하였으니 반드시 후한 상을 얻을 것이다. 우리들이 모여 있는 것은 한갓 수고로울 뿐이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각각 자기 군대를 갈라 분산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들이] 미처 진을 치지 아니한 틈을 타서 공격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군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이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이 비장(裨將)이었는데 또한 싸워 죽으려고 하므로,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말리며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만일 죽어서 성공이 없다면 살아서 후에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원술이] 대답하기를 “남아는 구차롭게 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의 아버지를 뵙겠는가?”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고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죽지 못하고,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오니 당나라 군대가 뒤를 추격하였다. 거열주(居烈州) 대감(大監) 일길간(一吉干)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하기를 “공 등은 힘을 다하여 빨리 떠나가라! 내 나이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랴? 이 때야말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 가운데로 돌입하여 전사하였는데, 그 아들도 따라 죽었다. 대장군 등은 슬며시 서울로 들어왔다. 대왕이 듣고 유신에게 “군사의 실패가 이러하니 어찌할까?” 하니, 대답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의 모책을 헤아릴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각기 요소를 지키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이 말하기를 “원술은 비장(裨將)인데, 혼자에게만 중한 형벌을 시행함은 불가하다.” 하고 용서해 주었다.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 농장에 [가서] 숨어 다니다가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 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다. 어머니가 “부인(婦人)에게는 따라야 할 세 가지 의리(義理)가 있다. 내가 지금 과부가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 하겠지만, 원술 같은 자는 이미 선군(先君)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 하고 만나 보지 아니하였다.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구르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보지 아니하였다. 원술이 탄식하며 “담릉으로 그릇된 것이 이렇게까지 되었다!” 하고 이에 태백산(太伯山)으로 들어가고 말았다.을해년(문무왕 15년: 675)에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치니, 원술이 듣고, 죽어서 전의 수치를 씻으려 하여 드디어 힘써 싸워 공(功)과 상(償)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한 세상을 마쳤다. [유신의] 적손(嫡孫) 윤중(允中)은 성덕대왕(聖德大王) 때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자못 질투하였다. 때마침 8월 보름이었는데 왕이 월성(月城) 산 위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게 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 간하였다.“지금 종실(宗室)ㆍ외척들 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이것이 어찌 이른바 친한 이를 친히 한다는 일이겠습니까?”왕이 말하였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 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과 같이 하여 잊어버린다면, 착한 이를 좋게 여겨 자손에게 미치는 의리가 아니다.”드디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절영산(絶影山)의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불만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개원(開元) 21년(성덕왕 32년: 733)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권유하였다.“말갈발해가 밖으로는 번신이라 일컬으면서 안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 군사를 내어 문죄하려 하니, 그대도 군사를 출동하여 서로 협공하게 하라. 듣건대 옛 장군 김유신의 손자 윤중이 있다 하니, 모름지기 이 사람을 뽑아 장수로 삼으라!”윤중에게 금과 비단 약간을 보내주었다. 이에 대왕은 윤중과 아우 윤문(允文) 등 네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합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다.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본성이 총민하고 술법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젊어서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하였을 때, 틈을 타서 스승에게 찾아가서 음양가(陰陽家)의 술법(術法)을 배웠는데,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다. 스스로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을 지어 그 스승에게 드리니, 스승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밝음이 여기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며, 그 후로는 감히 제자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대력(大曆) 연간에 귀국하여,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가 되었고, 양주(良州)ㆍ강주(康州)ㆍ한주(漢州) 세 지방[州]의 태수(太守)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 시랑(執事侍郞)과 패강진(浿江鎭) 두상(頭上)이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보살펴 사랑하며, 농사짓는 세 계절의 여가에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가르치니 모두들 유용하게 여겼다. 일찍이 누리가 생겨 서쪽으로부터 패강진 경계로 들어오는데 우글우글 들판을 덮으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암이 산마루에 올라가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누리가 다 죽어 버렸다.대력(大曆) 14년 기미(혜공왕 15년: 779)에 [암(巖)이] 왕명을 받고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으나, 마침 당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일본에] 와서 서로 만나보고 매우 즐거워하니, 왜인들은 암이 중국에도 알려진 것을 알고 감히 억류하지 못하자 이에 돌아오게 되었다.[그 해] 여름 4월에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 유신의 묘소에서 시조대왕의 능에까지 이르렀는데, 티끌과 안개로 캄캄하여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능(陵)지기가 들으니, 그 속에서 울고 슬퍼하며 탄식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혜공대왕이 그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대신을 보내 제사드려 사과하고, 이어 취선사(鷲仙寺)에 밭 30결을 바쳐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이었다.유신의 현손(玄孫)으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유신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오는데, [거기에는] 꾸며 만들어 넣은 말이 자못 많으므로 이를 줄이고 그 중에서 기록할 만한 것을 취하여 전(傳)을 지었다.사론(史論): 당나라의 이강(李絳)이 헌종(憲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사특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되고 정직한 이를 나오게 하며, 대신과 더불어 말할 때는 공경하고 믿음 있게 하여 소인을 참여시키지 말며, 어진 이와 놀 때에는 친하되 예절 있게 하여 어리석은 자가 끼여들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참되도다! 이 말이여! 실로 임금의 정치에 중요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어진 이에게 맡기어 의심하지 말며, 사특한 자를 제거하여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함을 보건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일을 맡겨 의심치 않으며, 꾀를 내면 행하고 말을 하면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쓰여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하였으니, 이른바 [주역]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吉)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이 그 뜻한 바를 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과 협동 모의해서 3국을 합치어 한 집을 만들고, 능히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려 일생을 마치었다.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기록이 없어져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는데, 유신과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지금[고려]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사대부가 알아줌은 당연하지만 꼴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김유신(金庾信) : 호력(虎力) 이간(伊干)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金)씨의 맏아들이 유신(庾信)이고 그 아우가 흠순(欽純)이다. 맏누이는 보희(寶姬)이니 어릴 적 이름은 아해(阿海)이며 누이동생은 문희(文姬)이니 어릴 때 이름은 아지(阿之)다.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 을묘(乙卯.595)에 났는데,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등에 일곱 별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18세가 되는 임신(壬申)년에 검술(劍術)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여러 해 동안 낭도(郎徒)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때 유신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은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유신에게 고했다. "제가 공과 함께 먼저 저들 적국에 가서 그 실정(實情)을 정탐한 뒤에 일을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 유신은 기뻐하여 몸소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났다.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두 여인이 그를 따라와서 골화천(骨火川)에 이르러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공이 세 여인과 함께 기쁘게 이야기하고 있자니 여인들은 맛있는 과자를 그에게 주었다. 유신은 그것을 받아 먹으면서 마음으로 그들을 믿게 되어 자기 실정(實情)을 말했다. 여인들이 말했. "공의 말씀은 알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다시 말씀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神)으로 변하고는 말했다. "우리들은 나림(奈林)ㆍ혈례(穴禮)ㆍ골화(骨火)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오. 지금 적국 사람이 낭(郎)을 유인해 가는데도 낭은 알지 못하고 따라가니, 우리는 낭을 말리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소". 말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하고 나와서는 골화관(骨火館)에 묵으면서 백석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다른 나라에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갖고 오도록 하자".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오자 백석을 결박해 놓고 그 실정을 물으니 백석이 말했다."저는 본래 고구려 사람입니다(고본古本에 백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楸南은 고구려 사람이요, 도한 음양陰陽을 역행逆行한 일도 보장왕寶藏王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여러 신하가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 나라 점쟁이 추남(楸南.고본古本에 춘남<春南>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이 있는데, 국경 지방에 역류수(逆流水. 웅자雄雌라고도 하는데,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가 있어 그에게 점을 치게 했습니다. 이에 추남(楸南)이 아뢰기를, '대왕(大王)의 부인(夫人)이 음양(陰陽)의 도(道)를 역행(逆行)했기 때문에 이러한 표징(表徵)으로 나타난 것입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왕은 놀라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몹시 노했습니다. 이는 필경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해서 왕에게 고해 다른 일로 시험해 물어 보아 맞지 않으면 중형(重刑)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어 두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는 반드시 쥐일 것인데 그 수가 여덟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그의 말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죽이려 하자 그 사람은 맹세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꼭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했습니다. 곧 그를 죽이고 쥐 배를 갈라 보니 새끼 일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의 말이 맞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楸南)이 신라 서현공(舒玄公) 부인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여러 신하에게 물었더니 모두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맞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에서는 나를 보내 그대를 유인케 한 것입니다". 공은 곧 백석을 죽이고 음식을 갖추어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니 이들이 모두 나타나 제물을 흠향했다. 김유신 집안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 상곡(上谷)에 장사지내고 재매곡(財買谷)이라 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 남녀가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이럴 때엔 백 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松花)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해서 전해 오다가 원찰(願刹)로 삼았다. 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공(公)을 봉해서 흥호대왕(興虎(武)大王)이라 했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진덕왕(眞德王) : 왕이 즉위하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ㆍ림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ㆍ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ㆍ렴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은 완력이 이처럼 셌으며 그를 윗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모든 이는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쩨는 남쪽의 우지산(우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고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角干)이니,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 끝누이다.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이 서울 안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에 문희에게 꿈이야기를 하자 문희는 이 말을 듣고 "내가 그 꿈을 사겠어요"하고 말하니, 언니는 "무슨 물건으로 사려 하느냐"하고 물었다. "비단치마를 주면 되겠지요." 언니가 "그렇게 하자"하여, 동생이 옷깃을 벌리고 받으려 하자 언니는 "어젯밤 꿈을 네게 준다"했고,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그런 지 10일이 지났다. 정월(正月) 오기일(午忌日. 앞의 사금갑<射琴匣>에 보였으니 최치원<崔致遠> 설이다)에 유신(庾信)이 춘추공과 함께 유신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공 차는 것을 농주<弄珠>의 희롱이라 한다). 이때 유신은 일부러 춘추의 옷을 밟아서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말하기를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하매 춘추공은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를 보고 옷을 꿰매 드리라 하니 아해가 말했다.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해서 가벼이 귀공자(貴公子)와 가까이한단 말입니까"하고 사양했다(고본<古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阿之)에게 이것을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유신은 그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는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善德王)이 남산(南山)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은 말한다. "그것은 네가 한 짓이니 빨리 가서 구하도록 하라." 춘추공은 명령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王命)을 전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고 그 후에 버젓이 혼례를 올렸다.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힘을 다해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런 때문에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했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ㆍ각간 문왕(文王)ㆍ각간 노차(老且)ㆍ각간 지경(智鏡)ㆍ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들이었으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車得) 영공(令公)ㆍ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태종(太宗)은 백제에 괴상한 변고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내서 군사를 청했다. 당 고종(高宗)은 좌호위장군(左虎(武)衛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 행군총관(神丘道 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과 좌호위장군(左虎衛將軍) 빙사귀(馮士貴)ㆍ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농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치게 했다. 또 신라왕 춘추(春秋)로 우이도 행군총관(우夷道 行軍摠管)을 삼아 신라의 군사를 가지고 합세하도록 했다.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자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金庾信)을 보내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가게 했다....의자왕은 장군 계백(階(偕)伯)을 보내 결사대(決死隊) 5,000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했더니 계백은 네 번 싸워 네 번 다 이겼다. 하지만 군사는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이에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해서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陣營)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입니다" 한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정방은 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都城)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氣勢)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무진(戊辰; 668, 총장總章 무진戊辰이라면 이적李勣의 일이니 하문下文에 소정방蘇定方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定方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龍朔 2년 임술壬戌에 해당하며 평양平壤을 포위했을 때의 일이다)에 신라에서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면서 글을 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자(軍資)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묻기를, '고구려에 들어가서 당나라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간다는 것은 그 형세가 몹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청한 당나라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군량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못하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했다. 이에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군자(軍資)를 수송하겠사오니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했다. 이에 유신(庾信)ㆍ인문(仁問) 등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국경 안에 들어가 곡식 2만 곡(斛)을 갖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했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합하고자 할 때 유신이 먼저 연기(然起)ㆍ병천(兵川) 두 사람을 보내서 그 합세할 시기를 물었다. 이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鸞]와 송아지[犢]의 두 그림을 그려 보냈다. 신라 사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서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해석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는 뜻이니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물건이 끊어지는 것을 뜻한 것입니다' 했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려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명(命)을 내려 '뒤떨어지는 자는 베이리라' 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군사가 쫓아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자를 잡아 죽였다. 그러나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 군사를 반격하여 수만명을 잡아 죽였다."...<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러하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이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壬戌년 고구려高句麗 싸움에 신라 사람이 정방定方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후일後日인 총장總章 무진戊辰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향전鄕傳의 근거 없음을 알 수가 있다. 다만 무진戊辰에 고구려를 멸한 후에 唐나라에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所有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蘇定方ㆍ이적李勣 두 공公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에 신라 왕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군사를 쫓아서 잡게 하고 한산성(漢山城)에 주둔하니 고구려ㆍ말갈(靺鞨)의 두 나라 군사가 와서 포위하여 서로 싸웠으나 끝이 나지 않아 5월 11일에 시작해 6월 22일에 이르니 우리 군사는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여러 신하와 의논했으나 장차 어찌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신이 달려와서 아뢴다. "일이 급하여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고, 오직 신술(神術)이라야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하고 성부산(星浮山)에 단(壇)을 모드고 신술을 쓰니 갑자기 큰 독만한 광채가 단 위에서 나오더니 별이 북쪽으로 날아갔다(이 일로 해서 성부산星浮山이라고 하나 산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도 있다. 산山은 도림都林 남쪽에 있는데 솟은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서울에서 한 사람이 벼슬을 구하려고 그 아들을 시켜 큰 횃불을 바라보고 모두 말하기를, 그곳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했다. 王이 이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게 했더니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應募하려 했다. 그러나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별로 괴상한 일이 아니옵고 다만 한 집에 아들이 죽고 아비가 울 징조입니다" 했다. 그래서 드디어 기도를 그만두었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범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있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서로 보고 울 뿐이었는데 이때 적병이 이를 급히 치고자 하자 갑자기 광채가 남쪽 하늘 끝으로부터 오더니 벼락이 되어 적의 포석(砲石) 30여 곳을 쳐부쉈다. 이리하여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부서지고 군사들은 모두 땅에 자빠졌다가 한참 만에야 깨어나서 모두 흩어져 달아나니 우리 군사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신문왕(神文王) 때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말했다. "나의 성고(聖考) 당태종(唐太宗)은 어진 신하 위징(魏徵)ㆍ이순풍(李淳風)들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런 때문에 이를 태종황제(太宗皇帝)라고 했다. 너의 신라는 바다 밖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太宗)이란 칭호(稱號)를 써서 천자(天子)의 이름을 참람되이 하고 있으니 그 뜻이 충성되지 못하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이에 신라왕은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太宗)이라 한 것입니다." 당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고 생각하니, 그가 태자로 있을 때에 하늘에서 허공에 대고 부르기를, "삼삼천(三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김유신이 되었느니라" 한 일이 있어서 책에 기록해 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꺼내 보고는 놀라고 두려움을 참지 못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태종의 칭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상원上元 원년元年 갑술甲戌(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鷄林道 총관摠管을 삼아서 신라를 치게 했다. 우리 나라 <고기古記>에는 "당唐나라가 육로장군陸路將軍 공공孔恭과 수로장군水路將軍 유상有相을 보내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문仁問과 흠순欽純 등의 일만 말하고 유신庾信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 :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龍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龍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다른 책에는 천수天授 원년元年이라 했으나 잘못)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龍)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德)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金)과 옥(玉)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진한(辰韓) : 신라(新羅) 전성기(全盛期)에는 서울에 17만 8,936호(戶), 1,369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南宅)ㆍ북택(北宅)ㆍ우비소택(우比所宅)ㆍ본피택(本彼宅)ㆍ양택(梁宅)ㆍ지상택(池上宅; 본피부本彼部)ㆍ재매정택(財買井宅; 유신공庾信公의 조종祖宗)ㆍ북유택(北維宅)ㆍ남유택(南維宅; 반향사하방反香寺下坊)ㆍ대택(隊宅)ㆍ빈지택(賓支宅; 반향사反香寺 북쪽)ㆍ장사택(長沙宅)ㆍ상앵택(上櫻宅)ㆍ하앵택(下櫻宅)ㆍ수망택(水望宅)ㆍ천택(泉宅)ㆍ양상택(楊上宅; 양부梁部 남쪽)ㆍ한기택(漢岐宅; 법류사法流寺 남쪽)ㆍ비혈택(鼻穴宅; 위와 같음)ㆍ판적택(板積宅; 분황사상방芬皇寺上坊)ㆍ별교택(別敎宅; 내의 북쪽)ㆍ아남택(衙南宅)ㆍ김량종택(金梁宗宅; 양관사梁官寺 남쪽)ㆍ곡수택(曲水宅; 내의 북쪽)ㆍ유야택(柳也宅)ㆍ사하택(寺下宅)ㆍ사량택(沙梁宅)ㆍ정상택(井上宅)ㆍ이남택(里南宅; 우소택우所宅)ㆍ사내곡택(思內曲宅)ㆍ지택(池宅)ㆍ사상택(寺上宅; 대숙택大宿宅)ㆍ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의 동쪽으로 못이 있음)ㆍ교남택(橋南宅)ㆍ항질택(巷叱宅; 본피부本彼部)ㆍ누상택(樓上宅)ㆍ이상택(里上宅)ㆍ명남택(椧南宅)ㆍ정하택(井下宅)이 있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미추왕(未鄒王) 죽엽군(竹葉軍) :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공(金庾信公)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 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 한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당(唐)나라 현경(顯慶) 5년(660)은 의자왕이 왕위에 있던 20년으로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쳐서 평정하던 해이다. 백제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郡)ㆍ200성(城)ㆍ76만호(戶)로 나뉘었었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고 유신(庾信)의 누이이다. 그 언니[姉]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루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청컨대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메게 하였다. 그의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메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루었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法敏)이다. 원년(661) ...가을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인문, 진주, 흠돌(欽突)을 대당(大幢) 장군으로, 천존, 죽지, 천품(天品)을 귀당(貴幢) 총관으로, 품일, 충상, 의복(義服)을 상주(上州) 총관으로, 진흠, 중신(衆臣), 자간을 하주(下州) 총관으로, 군관(軍官), 수세(藪世), 고순(高純)을 남천주 총관으로, 술실(述實), 달관(達官), 문영을 수약주 총관으로, 문훈(文訓), 진순(眞純)을 하서주 총관으로, 진복(眞福)을 서당(誓幢) 총관으로, 의광을 낭당(郎幢) 총관으로, 위지(慰知)를 계금(衿) 대감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29일에 대왕이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당나라 사신이 [왕을] 조문하고 아울러 칙명으로 앞 임금[무열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여러 가지 채색 비단 500단(段)을 주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황제의 명을 전하여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 하였다. : 2년(662) 봄 정월에 당나라 사신이 객관에 머물고 있다가, 이때 이르러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명(冊命)하였다. 이찬 문훈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인문(仁問)과 양도(良圖) 등 아홉 장군과 함께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게 하였다. 18일에 풍수촌(風樹村)에서 묵었다. 얼음이 얼어 미끄럽고 또 길이 험하여 수레가 나아갈 수 없으므로 [군량을] 모두 소와 말의 등에 실었다. 23일에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壤)에 이르렀다. 귀당 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군사(軍師) 술천(述川) 등이 이현(梨峴)에서 적군을 만나 공격하여 죽였다. 2월1일에 유신 등은 장새(獐塞)에 이르렀는데, 평양으로부터 3만 6천 보(步) 떨어진 곳이다. 먼저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 등 15인을 당나라의 군영으로 보냈다. 이 날 눈보라가 치고 몹시 추워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6일에 양오(楊)에 이르러 유신이 아찬 양도(良圖)와 대감 인선(仁仙) 등을 보내 [당 군영에] 군량을 가져다 주었는데, 소정방에게는 은 5천7백 푼[分],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頭髮) 30량(兩)과 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정방은 군량을 얻자 곧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나라 군사들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돌려 과천(川)을 건넜다.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오자 군사를 돌이켜 맞싸워 1만여 명을 목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았으며, 병기 1만여 개를 획득하였다. 전공을 논하여,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와 토지[田莊] 그리고 노비를 반씩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 ...3년(663) ...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이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 주둔하고 있는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에서 에워쌌다. 당나라 황제가 조칙으로 유인궤(劉仁軌)에게 대방주자사(帶方州刺使)를 겸직케 하여 이전의 도독 왕문도(王文度) 군사와 우리 군사를 통솔하고 백제 군영으로 향하게 하였다. 번번이 싸울 때마다 적진을 함락시켜 가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었다. 복신 등이 유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을 지켰다. 얼마 후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치고 아울러 배반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서 세력이 매우 커졌다. 인궤는 인원과 합하여 잠시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면서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였다. [당 황제가] 조칙으로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왕은 김유신 등 28명<또는 30명이라고도 하였다.>의 장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세하여 두릉윤성(豆陵尹城)과 주류성(周留城) 등 여러 성을 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을 차지하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겨울 10월 21일부터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11월 4일에 이르러 군사를 돌렸다. 설리정(舌利停)에 이르러 싸움의 공을 따져 상을 차등있게 주고 크게 사면하였다. 의복을 만들어 남아서 지키는 당나라 군사들에게 주었다. :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案席)과 지팡이[杖]를 내려 주었다. 6년(666)....여름 4월에 ...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은 모두 나마로서,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7년(667) ... 가을 8월에 왕이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였다. 9월에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영공(英公)을 기다렸다. 겨울 10월 2일에 영공이 평양성 북쪽 200리 되는 곳에 도착하여 이동혜(=同兮) 촌주 대나마 강심(江深)을 뽑아 보내었는데, 거란 기병 80여 명을 이끌고 아진함성(阿珍含城)을 거쳐 한성에 이르러 서신을 전하고 군사 동원 기일을 독려하니 왕이 그에 따랐다. 11월 11일에 장새(獐塞)에 이르러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왕의 군사 또한 돌아왔다. 이에 강심에게 급찬의 관등을 주고 벼 500섬을 내려주었다. 12월에 중시 문훈이 죽었다. 당나라의 주둔하고 있는 장군(將軍) 유인원이 천자의 칙명을 전하여 고구려 정벌을 도우라 하고, 왕에게 대장군의 정절(旌節)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 8년(668) ...6월...21일에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각간 김인문ㆍ흠순ㆍ천존ㆍ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ㆍ개원ㆍ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이찬 진순(陳純)과 죽지를 경정(京停) 총관으로, 이찬 품일, 잡찬 문훈, 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이찬 인태(仁泰)를 비열도 총관으로, 잡찬 군관, 대아찬 도유(都儒), 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총관으로, 잡찬 숭신(崇信), 대아찬 문영, 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선광(宣光), 아찬 장순(長順)ㆍ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총관으로,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아찬 일원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29일에 여러 도(道) 총관이 출발하였다. 왕은 유신이 풍질(風疾)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아있게 하였다. ...겨울 10월 22일에 유신에게 태대각간을, 인문에게 대각간의 관등을 주었다. 9년(669) .....말기르는 목장 무릇 174곳을 나누어 주었는데 소내(所內)에 22곳, 관청에 10곳을 속하게 하고 태대각간 유신에게 6곳, 대각간 인문에게 5곳, 각간 일곱 명에게 각각 3곳, 이찬 다섯 명에게 각각 2곳, 소판 네 명에게 각각 2곳, 파진찬 여섯 명과 대아찬 열두 명에게 각각 1곳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 74곳은 적절하게 나누어 주었다.
삼국사기 권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1년(671) ...가을 7월에 대왕이 답서에서 말했다. "...용삭(龍朔) 2년(662) 정월에 이르러 유총관은 신라의 양하도(兩河道)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눈보라가 치고 날씨가 몹시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다는 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였고 신라 군사도 양식이 다 떨어졌으므로 역시 군사를 돌렸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하여 길에서 죽은 사람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사가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접전하였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마자 적의 무리가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곧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13년(673) 봄 정월에 커다란 별똥별이 황룡사와 재성(在城) 중간에 떨어졌다...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 하다가 일이 탄로나 목베여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은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인문 열전 : 드디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현재의 경기도 덕적도]에 이르렀는데,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ㆍ진주ㆍ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00척에 군사를 싣고 맞이하게 하였다. [당군이] 웅진구(熊津口: 금강 어구)에 이르니, 적군이 강가에 군사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와 싸워서 이기고 승세를 타서 그 도성에 들어가 멸하였다.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등을 포로로 잡고 당으로 돌아갔다. 대왕이 인문의 이룬 공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였다가 다시 각간으로 높여주었다. 그 후 곧 [인문은]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용삭(龍朔) 원년(문무왕 원년: 661)에 고종이 [인문을] 불러서 말하였다. “내가 이미 백제를 멸하여 너희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였는데, 지금 고구려가 견고함을 믿고 예맥(穢貊)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함께 하여 사대(事大)의 예(禮)를 어기고 선린(善隣)의 의(義)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보내 치려 하니, 너는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여 군사를 출동, 함께 쳐서 망해 가는 오랑캐를 섬멸토록 하라.” 인문이 곧 귀국하여 황제의 명을 전하니, 국왕이 인문으로 하여금 유신 등과 더불어 군사를 훈련하여 대비하게 하였다...인문이 [웅진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섬과 조(租) 2만여 섬을 싣고 다다르니, 당나라 사람들은 식량을 얻었으나 큰 눈이 내렸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신라군이 돌아오려 하자 고구려가 이를 도중에서 요격하려고 도모하였다. 인문이 유신과 함께 속이는 꾀를 내어 밤중에 몰래 도망하였는데, 고구려인이 이튿날에야 깨닫고 뒤를 쫓아왔다. 인문 등이 돌아서 반격하여 이를 크게 파하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열기 : 렬기(裂起)는 기록에 그의 종족과 성씨가 전하지 않는다. 문무왕 원년(661)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해 평양성을 포위하자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국왕에게 소식을 전하며 평양에 군량을 보내주도록 하니 왕이 대각간 김유신에게 명해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2백5십 섬을 운반토록 하니 장새(獐塞)에 이르러 바람과 눈이 몹시 차가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들이 피곤함을 알고 요로에서 막아 공격하려 했다. 당 군영과는 거리가 3만여 보(步) 떨어져 있었는데 더 전진할 수 없어 편지를 보내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때 렬기는 보기감(步騎監)으로 행군에 참여하고 있다가 앞에 나서며 말하기를 “저는 비록 우둔하고 느리지만 파견에 참여하고 싶습니다”고 해서 드디어 군사 구근(仇近) 등 15인에 끼어 활과 큰 칼을 가지고 말을 달리니 고구려 사람들이 바라다 볼 뿐 막을 수 없었다. 거의 이틀을 달려 소(蘇) 장군에게 명을 전하니 당인들이 듣고서 기뻐하며 위로했다. 답서를 보내기에 렬기가 다시 이틀을 걸려 되돌아왔다. 유신이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 관등을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렬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우선 급찬의 위계를 주었는데 그 공로에 비하면 미흡합니다. 바라건대 사찬의 위계를 가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찬의 지위는 지나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신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벼슬은 공기(公器)이며 공에 보답해 주는 것이니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허락했다.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집정하자 렬기가 그에게 가서 군태수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기원사(祇園寺) 승려 순경(順憬)에게 말하기를 “내 공이 큰데 군수를 달라 해서 받지 못했으니, 삼광이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고 나를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순경이 삼광을 설득하니 삼광이 삼년산군(三年山郡) 태수를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 제7) 구근 열전 : 구근(仇近)은 원정(元貞)공을 따라 서원경(西原京)[현재의 충북 청주시]의 술성(述城)을 쌓았는데, 원정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한다 하여 곤장을 때렸다. 구근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였는데 지금 뜬 소문을 듣고 나를 죄 주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원정이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비령자 : 비령자(丕寧子)는 출신 지역과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647) 백제가 많은 군사로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동잠성(桐岑城) 등지를 공격해 오자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백제 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하고 이기지 못하여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지쳤다. 유신은 비령자가 힘써 싸우고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 말하기를 “날씨가 추워진 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낙엽짐을 알 수 있는데 금일의 일이 급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고 기이함을 보여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하고는 더불어 술잔을 나누면서 뜻의 간절함을 보이니 비령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수 많은 사람 중에 일을 오직 저에게 맡기시니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고 했다. 나가면서 종 합절(合節)에게 말했다.“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분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내 아들 거진(擧眞)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굳센 의지가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니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으면 집사람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말을 마치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진하여 몇 사람을 쳐 죽이고 죽었다. 거진이 이를 바라보고 떠나려 하니 합절이 말했다.“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합절로 하여금 낭군과 함께 집에 돌아가 부인을 편안하게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버지 명을 거역하고 어머님을 버리는 것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말고삐를 잡고서 놓지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면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끊고 적중으로 달려가 죽었다. 합절(合節)이 말하기를 “내 하늘이 무너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는 또한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감격하여 다투어 나가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칼날을 꺾고 진을 함락하여 적병을 대패시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곡을 매우 슬퍼했다. 대왕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를 갖추어 반지산(反知山)에 세 사람을 합장하고 처자 9족에게 은혜로운 상을 풍부하게 내려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영윤 열전 : 김영윤(金令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 흠춘(欽春)<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어짐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이 되어 문무대왕이 그를 올려 총재(=宰)로 삼았다. 윗 사람을 충으로 섬기고 백성에게는 관대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했다. 태종대왕 7년 경신(660)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해 백제를 치게 하자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나갔다. 가을 7월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을 만나 싸움이 불리해지자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고 했다. 반굴이 “예.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령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했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양 열전 : 대중(大中) 11년(문성왕 19년: 857) 8월13일에 (김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대왕은 애통해하며 서발한(舒發翰)을 추증하고 부의(賻儀)와 장례를 모두 김유신의 구례(舊禮)에 따라 하게 하고, 그 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릉에 배장했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12년(692) 봄에 대나무가 말랐다. 당나라 중종(中宗)이 사신을 보내 조칙을 말로 전하였다. “우리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는 신묘한 공과 거룩한 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므로,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신 날 묘호(廟號)를 태종이라 하였다. 너희 나라의 선왕 김춘추에게도 그것과 같은 묘호를 쓰니 [이는]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다. 모름지기 빨리 칭호를 고쳐야 할 것이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대답하였다. “저희 나라[小國]의 선왕 춘추의 시호(諡號)가 우연히 성조(聖祖)의 묘호와 서로 저촉되어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제가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별세했을 때 온 나라의 백성들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추존한 묘호(廟號)가 성조와 서로 저촉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 교칙(敎勅)을 들으니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엎드려 바라건대 사신께서 대궐의 뜰에서 복명할 때 이대로 아뢰어 주시오.” 그 후에 다시는 별다른 칙명이 없었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성덕왕 : 11년(712) ... 가을 8월에 김유신의 아내[妻]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중화3년명금동사리기기(仲和三年銘金銅舍利器記. 883년. 신라 헌강왕 9년, 당<唐> 희종<僖宗> 중화<仲和> 3년) : 대저 성인의 자취와 행인(行人)의 묘취(妙趣)를 좇아 영탑(靈塔)을 세우는 것은 명철한 사람이 널리 행하는 규범이다. 옛날에 유신(裕神) 각간이 세상에 나서 대업(大業)을 이루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기에 삼가 이 대석탑을 만들었다.
삼국유사 제5권 신주 제6 명랑신인(明朗神印) :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 세상에는 이렇게 전한다. “안혜(安惠) 등 네 대덕이 김유신(金庾信)·김의원(金義元)·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창건했다. 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 동쪽 봉우리에 묻었다. 그래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嵓)이라고 한다.” 그러한 즉 네 대덕은 모두 신라 시대의 고승이었다.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裕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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