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 효소왕본기를 보면 원년(692) 8월에 "대아찬 원선(元宣)을 중시로 삼았다(以大阿飡元宣爲中侍)로 삼았다"고 하고, 그 3년 뒤인 같은 왕 4년(695) 겨울 10월에는 "중시 원선이 늙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中侍元宣退老)"고 한다.
이 원선은 김원선(金元宣)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 계보가 보이지 않으나,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흠순(金欽純)의 아홉 아들 중 여섯째다. 그가 언제 출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출생 시기를 대략 짐작할 근거는 있다.
그의 아버지 김흠순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생몰년이 없지만, 김유신 동생이라 했으니, 형이 태어난 595년 이후 출생해야 한다. 《화랑세기》에는 그가 599년, 건복(建福) 16년이자 진평왕 21년에 태어나 82세로 장수하고는 문무제(文武帝) 20년(680) 2월에 두 살 적은 부인 보단 낭주(菩丹娘主)와 함께 천계(天界)로 올랐다 했다.
나아가 그 흠순공 전에는 그가 18살 때 전방화랑이 되어 전임 풍월주들인 상선(上仙)을 두루 배알하다 개중 한 명인 보리공 집에 들렀다가 그의 딸 보단 낭주한테 한 눈에 반해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 일곱을 낳았다고 하니, 그의 혼인 시기는 616년, 신라 건복(建福) 33년, 진평왕 38년임을 안다. 원선이 보단 소생으로는 여섯째라 하니, 아마도 625년 어간에 출생했을 것이다. 혹 쌍둥이를 낳았다면, 출생 시기는 더 빨라질 수도 있고, 물론 더 늦어질 수도 있다.
아무튼 중시 원선이 퇴직한 시점이 695년이고, 그 이유가 "퇴로(退老)", 곧 늙어서라고 하니, 이 늙음이 물론 사람에 따라 그 시점을 달리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누구에게나 통용하는 일생의 어느 시점이라 보아도 대과가 없다. 나아가 이것이 결국 정년퇴직인 셈이어니와, 퇴로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중시 원년의 출생시점을 어느 정도 추산할 근거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원선은 언제 태어났는가? 나는 625년 어간, 혹은 그에서 머지 않은 그 이전으로 본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그의 큰아버지 김유신 때문이다.
김유신은 각종 기록을 통해 그 출생시점이 595년, 건복(建福) 12년임을 안다.
그런 그가 70세에 도달하는 시점, 그해 첫달에 사표를 제출한다.
《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文武王) 상(上) 4년 대목에 보이는 기술이다.
春正月 金庾信請老 不允 賜几杖
봄 정월에 김유신이 늙음을 이유로 퇴직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고는 안석과 지팡이를 내렸다.
나는 한국사, 특히 신라사를 전업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대목을 왜 허심히 넘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예기·곡례禮記·曲禮》 편에 이르기를 “대부는 일흔살에 치사한다(大夫七十而致仕)”했으니, 그에 대해 정현(鄭玄)이 주(注)하기를 “그가 맡은 소임을 임금한테 돌려주면서 이젠 늙었다고 아뢰는 것이다(致其所掌之事於君而告老)”고 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선공(宣公) 원년에 보이는 “물러나 벼슬을 그만둔다(退而致仕)”고 했거니와, 그에 대해 하휴(何休)가 注하기를 “치사(致仕)란 녹봉과 관위를 임금에 돌려준다는 뜻이다(還祿位於君)”고 했다.
치사란 벼슬길에 막 들어서는 입사(入仕), 혹은 출사(出仕)에 상대하는 말로써, 벼슬에서 물러남을 말한다. 예서 '仕'란 '벼슬살이'란 명사 혹은 동명사다.
한데 김유신이 늙음을 이유로 정년퇴직을 요청한 시기가 그가 정확히 70세가 되는 해 첫 달이었다. 생일과 관계없이 70세가 시작되는 해 그 첫달에 사표를 던져야 했던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순전히 왕의 몫이었고, 정무적 판단이 개입할 사안이었다.
하지만 문무왕이 사퇴서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결코 받을 수 없었다. 김유신은 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정계의 거물이었고, 숙적 백제를 멸한 일세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가 나이 70이 되었다고 사표 던지니 냉큼 받아들이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김유신 역시 문무가 그러리란 걸 알았다. 그러니 결국 쇼를 한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저를 단순히 정치 쇼라고 매몰차게 몰아부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 70세 치사는 다른 무엇보다 《예기》가 규정한 법률이라, 그것을 넘기는 문제도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70세 치사는 고려시대에 실로 막대한 정치논란을 야기한다. 꼴뵈기 싫은 놈들이 70세가 되어도 물러나지 않자, 물러나라는 공개적인 압박을 부르곤 했으며, 실제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물러난 케이스도 제법 보인다. 더불어 이는 권신權臣의 축출을 위한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예상대로 문무는 김유신의 사퇴서를 반려했다. 당시 정국이 뒤숭숭했으며, 무엇보다 신라는 고구려 정벌을 앞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군부의 상징을 넘어, 군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김유신은 결코 퇴진할 수 없었다. 어떤 영화인지 드라마였던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에서 문무왕 황정민이가 늙은 김유신더러 "삼촌, 삼촌은 죽지 마소" 비스무리한 대사가 있던데, 이 대사가 실로 묘한 구석이 있다.
김유신은 고구려를 정벌할 때까지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산송장이라 해도 어떻게든 그때까진 살아있어야 했다.
김유신과 같은 거물은 사퇴가 불허됨은 물론, 항상 저 나이가 되면 왕이 궤장(几杖)을 내린다. 궤란 안락의자이며, 장은 지팡이다. 이는 단순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궤장을 받은 신하는 궁궐을 들어설 때 가마에서 내리지 않아도 되었으며,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진짜로 몸이 불편한 신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70이 넘은 신하들은 그러지 아니했다.
노신老臣한테 궤장을 내리는 일도 《예기》가 규정한 법률이다.
따라서 저 무심하고 허심한 듯한 저 짧은 《삼국사기》 한 구절에 실로 많은 이야기가 은닉한 것이다. 그 은닉을 만천하게 폭로하는 일이 역사가 책무 중 하나다.
덧붙이건대 저 70세 정년퇴직이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이른바 기로소(耆老所) 제도로 정착한다.
다시 초론初論으로 돌아가 효소왕 4년(695) 겨울 10월에 늙음을 이유로 중시 자리에서 퇴임한 김원선은 김유신 사례에 비추어 얼추 때리면 625년 어간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화랑세기》? 힘주어 말하건대 역사학도입네, 신라사학도입네 하면서 까부는 네놈들보다 천만백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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