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문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6편 조선총독부가 빗장을 연 쌍릉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 조사, 목관 발견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29일 11시00분이다. 


 앞서 우리는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3월에 발생한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이 대규모로 이뤄졌고, 더구나 그에 권력층의 비호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나아가 이 호강왕릉이 실은 백제 무왕의 부부능으로 통하는 지금의 익산 쌍릉임도 보았다. 그렇다면 당시 이들이 도굴한 쌍릉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무덤일까?   


 이를 위해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에 의한 쌍릉 조사 성과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록에 의하는 한 충숙왕 때 문을 연 쌍릉이 두 번째로 문을 연 시점이 이때이기 때문이다. 물론 쌍릉은 충숙왕 이전에도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그 이후 식민지시대 이전에도 도굴의 손끝을 피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가능성은 늘 열어 두어야 한다. 


1917년 무렵 대왕묘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1917년 무렵 대왕묘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이와 관련해 쌍릉은 충숙왕 이전에는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듯한 느낌도 막연하게나마 준다. 그것은 앞서 보았듯이 이 도굴 사건 조사 과정에서 전개된 일련의 흐름을 볼 때 이때 도굴단이 쌍릉을 파헤쳐 적지 않은 금붙이를 수습한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도굴을 당했다면 이런 일이 있기는 힘들다. 


 이에 식민지시대 쌍릉 조사 성과를 보건대 다행히 그네들이 이와 관련되는 기록을 많지는 않지만 소략하게나마 남겨 놓았고, 더구나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 과정에서 그네들이 촬영한 유리건판 자료를 자세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정리해 냈다. 따라서 나는 이 두 자료집을 근거로 삼아 첫 머리에 던진 의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구하고자 한다. 


 조선을 식민통치하게 된 조선총독부는 피식민지 조선의 고적(古蹟) 전반을 연차로 나누어 지역별로 광범위하게 조사하고는 그것을 연차별 성과로 묶어 차례로 내거니와 《고적조사보고(古蹟調査報告)》라는 방대한 보고서가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해당 조사를 수행한 사업 연도를 당시 일본 천황 연호로써 표시한 제목을 붙여 출판하게 된다. 익산 지역 조사는 대정(大正) 6년(1917)에 수행된 까닭에 그 조사 내용은 《대정 6년도 고적조사보고》를 봐야 한다. 1920년 발간된 이 보고서가 수록한 지역별 조사 대상지와 그 조사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〇 경상북도 선산군·달성군·고령군·성주군·김천군·경상남도 함안군·창녕군 조사보고(今西龍)  

〇 평안북도 급(及) 만주 고구려 고적조사 약보고(關野貞) 

〇 환도성고(丸都城考. 關野貞) 

〇 황해도 봉산군·평안남도 순천군 급 평안북도 운산군 고적조사 약보고(谷井濟一) 

〇 경기도 황주·고양·양주·충청남도 천안·공주·부여·청양·논산·전라북도 익산 급 전라남도 나주 10군 고적조사 약보고(谷井濟一) 


 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선총독부에 고용되어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주름 잡은 자들이라는 점만 우선 확인하고 넘어가자. 보고서 수록 내용 중에서도 ‘환도성고’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고구려 환도성에 대한 고찰인 논문이라는 점에서 여타 글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 바로 앞 만주 지역 고구려 고적조사에 수반한 부록이라는 성격이 짙다. 우리가 찾는 쌍릉 조사 성과를 살피려면 말할 것도 없이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이라는 자가 조사 책임자인 전북 익산 편을 봐야 한다. 야쓰이는 쌍릉 두 고분을 한겨울인 이해 12월에 조사했다. 그 결과 이들 두 무덤이 사비 도읍기 백제의 왕족 공동묘지로 간주되는 능산리 석실분의 그것들과 같은 양식임을 확인했다. 이런 무덤을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이라 한다. 나아가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유물도 간혹 수습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무엇보다 야쓰이가 직접 증언하는 다음과 같은 쌍분을 우리는 만나보아야 한다.  


1917년 대왕묘 무덤길 막음 시설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1917년 대왕묘 무덤길 막음 시설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팔봉면(八峯面) 석왕리(石旺里)와 신왕리(新旺里)에 있다. 구릉 상에 남북으로 마주보거니와 북쪽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 것을 소왕묘라 부른다. 한데 마을에서 이 부근 땅을 왕묘리(王墓里)라 부르고, 마한 시대 왕릉이라 전한다. 둘 다 봉토의 흘러내림이 심하다. 대왕묘에는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 왕릉이라고 전하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능묘에서 보이듯이 봉분 주위에 원형 호석이 있었던 듯하지만 그 대부분은 유실되고 겨우 2~3개만 알아볼 뿐이다. 석곽은 화강석을 잘라 만들어 쌓았으니, 전연 부여 능산리의 백제 왕릉으로 전하는 것과 동일한 형식이다. 현실 안에는 목관이 잔존하고 그 대부분은 썩은 상태지만 여전히 그에 의거해 그 온전한 모습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실제로 백제 시대 말기의 왕족 관제(棺制)를 충분히 징험할 만한 유일의 귀중한 유물이다. 훗날 정밀한 복원도를 제작해 상세한 보고를 기약한다. 이 무덤은 옛날에 발굴이 이뤄져 어떠한 부장품도 남아있지 않다. 현실 입구에서 겨우 도제(陶製) 완(埦) 1점을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소왕묘에는 근년의 발굴 흔적이 있어 이를 알아보니 몇 년 전 군수가 그것을 발굴하려고 하다가 채 석곽에 도달하기 전에 중지했다고 한다. 이 무덤 역시 옛날에 도굴의 액을 만나 어떠한 부장품도 남지 않았다. 소왕묘 역시 대왕묘와 같은 형식이지만 오직 그 외형의 대소에 차이가 있듯이 석곽의 대소에도 차이가 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 크고 작은 능묘 2기는 그 구조로 판단하건대 백제 말기 왕족의 능묘일 것임에는 추호의 의심을 용납할 수 없다. 그 상세함에 대해서는 백제 시대 유적에 관한 특별보고에 두루 갖추고자 한다. 


대왕묘 출토 도제 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대왕묘 출토 도제 완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이 보고서에는 야쓰이 조사 당시 촬영한 사진 2장과 관련 도면 2장이 각각 첨부됐다. 사진 두 장은 모두가 대왕묘 장면을 담았다. 하나는 무덤 바깥에서 무덤방으로 향하는 길인 연도(羨道)를 돌로 막음한 순간을 포착한 컷이고, 다른 하나는 무너진 관재가 놓인 무덤방 내부 모습을 담았다. 이로 보아 야쓰이는 이때 무덤문을 따고 들어가 내부를 조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앞 보고서에는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무덤방 사정을 기술한 점으로 보아 분명히 내부까지 정식 발굴을 통해 들어갔다는 사실을 유추할 뿐, 발굴을 했다는 말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았다. 도면 2장은 봉분 속 무덤방 배치 양상이다. 


 이런 언급과 도판은 1917년 무렵 쌍릉 사정을 채록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를 종합하면 이미 이 당시에 두 무덤은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야쓰이가 쓴 ‘발굴’이라는 말은 실은 도굴을 말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데 실로 아쉬운 점은 야쓰이 자신이 이 발굴의 중대성을 인지하면서, 그 상세한 보고를 기약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무엇보다 쌍릉이 구조로 볼 때 사비 도읍기 백제 왕릉으로 간주되는 부여 능산리의 그것들과 완전히 같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러면서 특히 대왕묘에서는 원래 형태로 복원이 가능한 관재가 남았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그가 추후 상세한 보고를 기약했던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나아가 두 무덤 모두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상태임을 기록했다. 그렇기 때문에 건진 유물이 거의 없다고 했다. 두 무덤 중에서도 소왕묘 도굴 사정과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증언을 남겼다. 그가 이곳을 조사하기 몇 년 전에 이곳 군수가 발굴을 시도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역시 발굴이 아니라 실은 도굴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찌된 셈인지 군수는 도굴을 중지하고 만다. 나는 이것이 아마도 이미 철저히 도굴된 상태였으므로, 건질 게 없어 허탕을 쳤다는 말로 해석한다. 


 야쓰이는 무덤 상황에 대해서는 내부까지 간략한 기록을 남겼지만, 그 실제 규모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언도 하지 않았다. 이는 틀림없이 그 자신이 약속한 추후 상세 보고서에서 쓰고자 했을 것이다. 야쓰이가 조사한 좀 더 상세한 무덤 구조는 이보다 무려 62년이 지난 뒤 같은 일본 고고학도에 의해 나온다.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그를 일러 흔히 마지막 조선총독부박물관장이라 하지만, 엄밀히는 관장은 아니었고 요즘으로 치자면 조선총독부의 박물관 담당 학예연구관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일본이 패망하고서도 곧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1년 체류하면서 경주의 은령총과 호우총을 발굴한 기연을 지닌 인물이다. 


대왕묘 현실 목관과 그 입구대왕묘 현실 목관과 그 입구


 1907년생인데 사망한 때가 믿기지 않겠지만 2011년 5월 11일이다. 우리 나이로 105세를 누렸다. 그 역시 식민지시대에 조선으로 건너와 각종 발굴현장을 누볐다. 초창기 조사 주역들인 세키노라든가 이마니시 류(今西龍), 야쓰이 같은 사람들에 견주어서는 대략 한 세대 뒤지는 인물이다. 이들 선배가 사망 혹은 다른 보직 이동 등으로 퇴각한 뒤에 그 자리를 대체한 인물 중 한 명이 아리미쓰다. 이런 그가 1979년 일본 가시하라(橿原)고고연구소 발간 《가시하라고고연구논집》 4집 투고 논문 ‘부여 능산리 백제왕릉·익산 쌍릉’을 통해 야쓰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쌍릉 조사 성과를 정리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대왕묘는 봉분이 직경 30m에 높이 6m로 추정되고 내부 석실은 전체 길이 498㎝에 현실(무덤방)은 길이 380㎝에 너비 178㎝, 높이 227㎝이며, 관을 올려놓은 단인 관대(棺臺)는 길이 271㎝에 너비 85.5㎝다. 소왕묘는 이보다 조금 작다. 직경 24m, 높이 3.5m인 봉문 안에 전체 길이 390㎝인 석실을 마련했다. 현실은 길이 320㎝에 너비 130㎝, 높이 170㎝다. 그 내부에도 관대가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없다. 아리미쓰는 아마도 조선총독부 재직 시절에 수집했을 야쓰이의 조사 관련 자료를 이용해 이렇게 보고했다. 


 야쓰이가 상세하게 보고하고자 한 쌍릉 조사 성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없을까?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에 펴낸 《유리건판으로 보는 백제의 고분》은 그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풀어준다. 박물관에 보관 중인 식민지시대 유리건판 자료들을 박물관이 자체 분석한 결과 1917년 조사 당시 촬영한 관련 사진 9건과 관련 수습 유물 사진 6건, 그리고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전시한 대왕묘 목관 전시 관련 사진 1건, 그리고 그 목관 복원도면 1건이 발견됐다. 보고서를 이를 토대로 해서 쌍릉 조사 성과를 재정리한 것이다. 


 잊어먹기 전에 쌍릉 조사자 야쓰이 얘기를 좀 해야겠다. 지금은 식민지시대 조선에서 활약한 고고학도들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제법 쌓여 사정이 훨씬 좋아졌지만, 초기 조사를 주도한 인물 중에서도 족적에 견주어 유독 그 흔적을 정리하기 힘든 인물 중에 바로 야쓰이가 포함된다. 우선 그의 성 ‘곡정(谷井)’만 해도 어찌 읽어야 하는지를 두고 백태(百態)에 가까운 독법이 시도되곤 해서 ‘다니이’라고 읽는 사람이 지금도 많다. 


 이 야쓰이라는 사람을 나로서는 2000년 무렵 풍납토성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적조사보고》를 보다가 너무나 자주 만나는 바람에 나 역시 무척이나 궁금한 자였지만, 추적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도 어떤 일본 고고학 사전에서 그의 간단한 족적을 발견하고는 만세를 부른 적이 있다. 


 마침 그때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고고학사(史) 연구회로 ‘목요클럽’이란 곳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조선 고고학 사정과 관련해 적지 않은 성과를 축적했으니, 그 수괴에 해당하는 세키노를 집요하게 추적한 성과물을 내가 경악해서 목도한 적이 있다. 그 무렵 한참 뻔질나게 일본을 들락거릴 적에 연결된 사람으로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다카기 히로시(高木博志) 교수가 있다. 일본 근대 미술사 성립을 국민국가 등장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한 탁월한 연구가로서 당시에는 한국의 국립묘지 탄생과 조선총독부 소장 공문서에 관심이 지대했다. 하지만 자료 접근을 하지 못해 애로를 겪고 있었는데, 내가 다리를 놓아 그 문서 일부를 열람한 일도 있다. 


 나는 주로 그를 통해 목요클럽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를 통해 들으니 이 클럽은 조금 희한한 측면이 있어, 대학 강단 같은 데서 직접적 학문 종사자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는지 모르나, 아무튼 90년대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아무튼 90년대 이후 목요클럽이 구축한 연구를 나는 다카기 교수를 통해 집중적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나, 이 모임 주축 발기인 중에서 ‘야쓰이’ 연구를 표방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후 이에서 어떤 성과를 냈는지는 그쪽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라 알 수가 없다. 국내에서는 일본 유학파 출신인 영남대 정인성 교수가 근자에 이 분야 연구에 투신해 적지 않은 성과를 내는 중이다. 아래에서 정리하는 야쓰이 일생도 정 교수와 도쿄대 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교수의 손을 거쳤다.  


 야쓰이는 1880년 와카야마현(和歌山縣) 태생으로 1959년 사망했다. 1907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지만 1908년 도쿄로 돌아와 도쿄제실박물관 소장 자료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1909년 세키노의 한국 조사에 동참할 예정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무슨 일이 생기자 그를 대신해 참가했다. 그는 사진에 특출 난 재능을 보였다. 초창기 고적조사에 남긴 관련 사진은 그의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다. 1909년 이래 각종 조사에 참여해 1913년에는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고 1916년에는 평양지역 낙랑 고분 발줄조사도 주도적으로 펼쳤다. 앞서 본 대로 그 직후에는 부여 능산리 고분, 나주 반남면 고분군, 익산 쌍릉 등지를 조사했다. 그러다가 1921년 부친이 투병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와카야마시 공안위원과 그곳 문화재보호위원 등을 역임했다. 


 야쓰이는 교토대 출신과 더불어 조선 고고학 조사를 양분한 도쿄제국대학 학파의 일원이다. 이를 대표하는 이가 원래는 문헌사학도로서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고문서학의 아버지라 할 만한 구로이타 가쓰미(黑坂勝美, 흑판승미)다. 교토제국대학 국사학과 교수로서 구로이타는 제도로서의 조선 문화재 정책을 입안하는데 키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글을 이후 여유가 된다면 마련해 볼까 한다. 


 

<참고자료>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백제의 고분》, 2015

정인성·사오토메 마사히로(早乙女雅博), 《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Ⅰ-일제 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재검토와 관동(關東)지역 소재 고구려 유물1》, 동북아역사재단, 2008

조선총독부 편, 《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 1920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