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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8편 잘라버린 남편 ‘귀두’를 음부에 제사지낸 아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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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4월11일 13시55분이다. 

 

 1. 서악동의 신라 시대 귀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을 비롯한 중고시대 신라 왕릉 밀집지역인 서악고분군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전면에 봉분 두 기가 붙었으니, 하나는 김춘추 9세손으로 신라 하대 인물인 김양(金陽)이 857년 향년 50세로 졸하고는 묻힌 곳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 묘라고 전한다. 이 두 봉문 앞에는 몸돌과 머릿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받쳤을 거북 모양 받침돌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이를 서악동 귀부(龜趺)라 한다.

 

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
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

 

 보물 제70호인 이 귀부에 대한 현지 안내판은 김인문 묘비를 받치던 것이라 기술한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역사학도 중에는 김양 묘와 함께 선 무덤을 김인문 묘라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이는 실은 김유신 묘이며 따라서 이 귀부는 김유신의 그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따르기가 심히 힘들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김유신의 장송(葬送)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지에 기술되었거니와, 그 어디에도 그의 무덤이 무열왕릉 인근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악동 귀부의 귀두
서악동 귀부의 귀두

 

 

 그 인근에 제작 연대가 확실한 태종무열왕비 귀부가 있으니, 그것과 비교할 적에 비슷한 시대 작품임이 분명한 느낌을 준다. 어떻든 김인문 묘비 귀부 중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그 전면 땅바닥 쪽에서 이 귀부를 올려다보면 남자의 성기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하기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북 머리를 ‘귀두(龜頭)’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생김새가 이 성기의 꼭지 부분과 유난히 상사(相似)한 데서 비롯한다. 쭈글쭈글한 목덜미 주름은 흡사 포경수술 하지 않은 남자 성기의 껍데기가 뭉친 모습이고, 돌출한 머리는 완연히 귀두 그것이다. 귀두와 다른 점은 오직 두 눈만 표현했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그 인근 서악동 고분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편 비각(碑刻) 안에서 만나는 태종무열왕비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귀부가 그 전면 김인문 묘의 그것과 다른 점은 거북 받침돌 말고도 사람으로 치면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이수(螭首)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이수가 압도적인 느낌을 주거니와 그 장식이 무엇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역시 왕의 그것에 어울리는 장식이라 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그 전면 김인묘 귀부는 문화재 지정 명칭이 ‘서악동 귀부’인데 견주어 이는 ‘경주 태종무열왕능비’가 정식 명칭이다. 그렇지만 이에도 문제는 없지 않아, 사람으로 치면 발바닥과 머리 부분만 남고 정작 몸통에 해당하는 비신(碑身)은 달아났으니 말이다. 

 

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

 

 이를 갈라보면 귀부는 길이 약 3.33m에 폭 2.54m이며, 이수는 높이 약 1.1m다. 이수에는 여섯 마리 용이 좌우에서 세 마리씩 엉킨 채 여의주를 문 모습을 연출했으니, 그 자태는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이수 전면 중앙에는 이 무덤 주인공을 밝히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왕지비)’라는 글자를 전서(篆書)체로 양각했으니, 글씨는 그의 아들 김인문이 썼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장방형 기단돌 위에 올려 앉은 귀부의 거북은 이런 비석에 사용하는 비석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네 발을 쫙 벌린 채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쳐들고 입은 다문 채 전면을 응시한다. 머리는 전면에서 선 채로 바라보면 사각에 가까워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한데 이 거북 머리를 측면, 혹은 전면 바닥에서 쳐다보면 역시나 ‘귀두’다. 목덜미에는 부처님의 그것처럼 삼도(三道)를 표현했다. 콧구멍 두 개는 완연하거니와, 옆으로 다문 입술 표현 역시 섹슈얼 코너테이션(sexual connotation)이 짙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

 

 

2. 음경을 대신한 거북 대가리 

 

 요즘 내가 휴대하고 다니면서 다시 읽는 문고본 중에 《일본인의 사랑과 성》이 있다. 일본 와세다대 교수를 역임한 일본 근세 문학 연구가 데루오카 야스타카(暉峻康隆. 1908~2001) 원저로 단국대 인문학부 정형 교수가 번역해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기획한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60권째로 국내에서는 2001년 10월에 초판이 도서출판 소화에서 나왔다. 이 초판을 독서대본으로 삼거니와, 이 책은 아마도 국내 출판 직후인지 그 얼마 뒤에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손에 들었다가 순식간에 일독한 기억이 있다. 데루오카는 가고시마 현 태생으로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부임해 그곳에서 오래도록 봉직하다가 퇴임 뒤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보니 그 일본어 원서는 ‘日本人の愛と性’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1989년에 초판이 나왔다 한다.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에서 사랑과 성 관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참으로 평이하지만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다. 이런 문체로 일본 학계가 내놓은 저작 중에 기념비적인 것으로 이시다 미노스케의 《장안의 봄》(국내에서는 이동철·박은희 번역으로 2004년 도서출판 이산에서 출간)이 있거니와, 그에 견주어 데루오카 이 책 역시 그에 못지않은 역작이다. 책 전편에 걸쳐 데루오카는 헤이안 시대 이전으로 사랑과 성 문화가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거니와, 간통죄가 대표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래의 성에 대한 억압 체계에는 시종 비판적이다. 

 

 이에는 13세기 중엽,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 집권시대에 성립한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이라는 설화집 중 제16권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 하나를 그 시대 성 풍조를 증언하는 자료로 소개한다.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내가 번역문 문장을 조금 가다듬었다.

 

옛날 조정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유난히 질투가 강해 그 때문에 항상 괴로워했다. 어느 날 남편이 궁리 끝에 거북이 한 마리를 구해 그 목을 12센티미터 정도로 잡아 빼내고는 잘라 종이에 감추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아내의 질투로 말다툼을 하게 되자 남편은 “이렇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이 물건 때문”이라 하고는 허리에 찬 작은 칼을 꺼내어 앞을 걷어 올리고는 자기 마라(魔羅)를 자르는 척하며 품안에서 거북이 목을 꺼내어 내던졌다. 아내는 몹시도 기분이 언짢아하며 그것을 집어 들고 물러났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한가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무릎을 세우고 앉은 다리 가랑이 사이를 보니 검은 천 조각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그 검은 천은 무엇이오”라고 물으니 아내는 “아니, 별 것 아니에요”라고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남편이 줄곧 다그쳐 묻자 그제야 아내는 마지못하면서 “숨겨도 소용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이 검은 천은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남편이 “고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라고 반문하자 부인은 “지난번 잘려 고인이 되어 버린 마라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제 음부에 상복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세상에 별난 상복(喪服), 재미는 있는 일이야”라는 말로 끝난다. 남편이 자신의 그것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실제로는 거북이 대가리로 대체한 ‘마라’는 무엇인가? 그 정확한 의미를 지금 단계에서는 모른다 해도 볼 짝 없이 음경(陰莖)이다. 이 말은 원래 불교를 타고 넘어온 범어다. 즉, 불교에서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가 바로 이것이니, 아마도 성욕이 그런 기능이 있다고 보아 남근(男根)을 지칭하는 은유로 일본에서는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로마나이즈 하면 ‘māra’이며 ‘魔羅’ 혹은 ‘摩羅’ 등으로 표기한다. ‘魔’에는 그 자체 악마라는 뜻이 있으니, 전자가 더욱 그럴 듯한 번역어라는 느낌을 준다. 남편이 잘라낸 이 마라, 실제는 거북 대가리를 그 아내가 검은 천으로 싸서 다녔다는 말은 그것을 주검으로 간주해 입힌 상복이라는 뜻이며, 더구나 그것을 음부에 싸서 다녔다고 하니, ‘귀두’가 가야 할 곳은 음부 말고 어디가 있겠는가? 

 

 이 관리가 잘라낸 거북 대가리는 길이를 12센티미터라 했는데, 당시에 일본에 미터법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니, 이는 데루오카가 틀림없이 당시에 쓰던 단위를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한 수치일 터이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12센티미터라는 환산치가 정확하다고 가정할 때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이 실은 한·중·일 성인 남성의 평균 음경 길이라는 점이다. 고교 학창 시절에 30센티미터 대나무 자로 자기 음경을 잰 어떤 친구가 22센티미터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는데, 항문 쪽에서 잰 길이였다. 그 놈 말이 더 가관이었는데, 음경 뿌리가 거기에서 시작하니 거기에서 재야 한다나 어쩐다나 한 기억이 있다.  

 

 앞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데루오카는 “남근의 끝을 귀두(龜頭)라고 하니 자못 그럴싸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고금저문집》이 궁금해 내가 조금 더 찾아보았더니, 가마쿠라(鎌倉)시대 사람으로 이하(伊賀)라는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이하수(伊賀守)를 역임했지만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인 다치바나노 나리스에(橘成季)가 편찬한 설화집으로 간단히는 ‘저문집(著聞集)’이라고도 한다. 제목을 풀면 ‘옛날과 지금 있던 일로서 들은 이야기 모음집’ 정도를 의미한다. 전체 20권 30편으로 목차가 편제됐으며, 이에 수록한 이야기는 총 726개. 건장(建長) 6년(1254) 10월 무렵에 대략 완성을 보았다가 나중에 보완되었다고 하며,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우치습유물어(宇治拾遺物語)》와 더불어 일본 3대 설화집으로 일컫는다. 

 

 이로써 실제의 거북 대가리 귀두가 남근의 대가리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내 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구지가(龜旨歌)는 귀두가(龜頭歌)였음도 싱겁게 드러났다고 본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이에 대해 강진아 선생의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었다.(2018.7.18)  

 

마라mara는 팔리pali어입니다. 팔리어는 인도 초기불교경전에서만 발견되는 범어의 방언 중 하나입니다. 팔리경전은 붓다생전부터 기원 일세기까지 오백년에 걸쳐 형성되었고, 이 중 맨 나중에 형성된 논장을 제외한 경장과 률장에는 약 오십여개의 길고 짧은 다양한 구성의 마라신화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공들인 논문 주제입니다. 범어로는 무르티유Mrtyu입니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 Yama가 후기에 속하는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무르티유Mrtyu와 결합하여 죽음의 나라를 다스리는 야마무르티유 Yama Mrtyu가 됩니다.(r밑에 ㆍ점있는 r입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의 성gender이 불분명합니다. 단어 자체는 남성이지만 범어나 팔리어에서는 문법적인 이유로 성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해서요. 명사의 어미가 24가지로 바뀌는데 남성형ㆍ여성형이 있는거죠. 오히려 마라는 정체를 바꾸는 기술이 있어서 여자 혹은 남자로 둔갑을 잘 합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를 음경과 동일시한 경우는 없습니다만 이야기의 정황상 '정액'이 아닐까 추측을 하게끔 하는 경우는 꽤있습니다. 붇다나 출가승이 명상수행할 때 비..가 내리면 꼭 마라가 나타나거든요. ㅋㅋ 저 일본책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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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7편 귀두 내밀고 지상에 강림한 김수로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7편 귀두 내밀고 지상에 강림한 김수로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4월06일 12시30분이다.  1. 동아시아의 카니발 계욕일  애초 계획은 아니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지금껏 이 독사일기는 고려 시대 도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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