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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헌창(金憲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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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헌덕왕 사후 왕위 계승 김경신과의 왕위계승전쟁에서 패배하고는 명주로 물러난 김주원의 아들로, 헌덕왕 때 무진주 도독을 시중이 되었다가 다시 청주도독으로 나갔다. 이어 웅천주도독으로 옮긴 이듬해(822)에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때 위세를 떨치다가 결국 진압되고 그 자신은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애장왕 :  8년(807) 봄 정월에 이찬 김헌창(金憲昌)<정(貞)이라고도 한다>을 시중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헌덕왕 : 5년(813) 봄 정월에 이찬 헌창(憲昌)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6년(814)...가을 8월에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이 [중앙에] 들어와 시중이 되었다. 8년(816) 봄 정월에 시중 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 청주(菁州) 도독으로 삼고 장여(璋如)를 시중으로 삼았다. 농사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절동(浙東)지방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 한산주 당은현(唐恩縣)에서 길이 열 자, 넓이 여덟 자, 높이 세 자 다섯 치되는 돌이 저절로 100여 보를 옮겨갔다. 여름 6월에 망덕사의 두 탑이 흔들려 싸우는 듯하였다. 13년(821)...여름 4월에 시중 김충공(金忠恭)이 죽었으므로 이찬 영공(永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청주 도독(菁州都督) 헌창을 웅천주 도독으로 [직책을] 바꾸었다. 14년(822) ...3월에 웅천주 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주(武珍州), 완산주(完山州), 청주(菁州), 사벌주(沙伐州)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 서원경(西原京), 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이 몸을 빠져나와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 우두주, 삽량주, 패강진, 북원경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에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주조(州助) 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王京]로 도망해 와 그 일을 알렸다. 왕은 곧 최웅에게 급찬의 관등과 속함군(速含郡) 태수의 관직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관등을 주었다. 마침내 장수 여덟 명을 뽑아 서울을 여덟 방면에서 지키게 한 다음 군사를 출동시켰는데, 일길찬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雄元) 그리고 대아찬 우징(祐徵) 등이 3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각각 종군할 것을 청하여, 명기는 낭도의 무리들과 함께 황산(黃山)으로 나아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 이에 헌창이 장수를 보내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공격해 이겼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이를 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하여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여러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열흘동안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이 머리를 베어 몸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종족(宗族)과 함께 일을 도모했던 무리들 무릇 239명을 죽였으며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 그런 다음 싸움의 공을 논하여 벼슬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는데, 아찬 록진(祿眞)에게 대아찬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적군에 가까이 있었으나, 반란에 물들지 않았으므로 7년간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이보다 앞서 청주(菁州) 태수가 집무하는 관청 남쪽 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는데, 몸 길이가 다섯 자이고 검은 색이었으며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의 머리만하고 부리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되었다. 또 눈은 사람 눈 같았고 모이 주머니는 다섯 되들이 그릇만하였는데 사흘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록진 : 후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는데, 록진이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왕이 그에게 대아찬의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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