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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김흠운(金歆運)

by taeshik.kim 201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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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연대와 이름 표기, 그리고 관위 등을 고려할 때 김흠운(金欽運)과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영휘(永徽) 6년(무열왕 2: 655) 태종대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변방을 막자 이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흠운을 낭당(郎幢) 대감으로 삼았다. 이에 그는 집안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병졸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 양산(陽山)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여 조천성(助川城)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밤을 틈타서 민첩하게 달려와 새벽녘에 성루를 따라 들어오니 우리 군사가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들이 혼란을 타서 급하게 공격하니 날으는 화살이 비오듯 모여졌다. 흠운이 말을 비껴타고 창을 잡고 대적하니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달래어 말하였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일어나 지척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니 공이 비록 죽는다고 하여도 알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공은 신라의 귀한 신분[貴骨]으로서 대왕의 사위[半子]인데 만약 적군의 손에 죽으면 백제의 자랑하는 바가 될 것이고 우리들의 깊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였으면 사람이 알아주고 모르고는 한가지이다. 어찌 감히 이름을 구하랴?” 하고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따르던 자들이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흠운이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몇 사람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이에 대감 예파(穢破)와 소감(少監) 적득(狄得)이 서로 더불어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步騎) 당주 보용나(寶用那)가 흠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그는 귀한 신분에 영화로운 자리에 있어 사람들이 아끼는 바인데도 오히려 절조를 지켜 죽었으니 하물며 나 보용나는 살아 있더라도 별 이익이 되지 않고 죽어도 별 손해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드디어 적에게 덤벼들어 서너 명을 죽이고 그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고 흠운과 예파에게는 일길찬, 보용나와 적득에게는 대나마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전투상황]을 듣고 양산가를 지어 애도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을까 걱정하여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하고 그 행동을 본 후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드디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으며,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대문이 말하기를 『임금을 보좌하는 어진 인물과 충신이 이로부터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의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cf. 김흠운(金欽運)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3년(683) 봄 2월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먼저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35수레였으며, 조(租)가 150수레였다. 여름 4월에 평지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5월 7일에 이찬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그 집에 보내 책봉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양부(梁部) 및 사량부(沙梁部) 두 부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게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효소왕 : 효소왕(孝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理洪)<또는 공(恭)으로도 썼다.>이고 신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의 성은 김씨로 신목왕후(神穆王后)인데,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운(雲)이라고도 한다> 딸이다.


☞김흠운(金欽運) ☞김흠운(金欽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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