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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나와서는 안 될 유물 천마도가 나와버렸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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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11월 03일 목요일 제476호


나와서는 안 될 유물 천마도가 나와버렸다

천마도는 하늘로 비상하는 ‘천마’를 호쾌하게 표현했다. 신라 시대의 회화 작품으로 매우 진귀한 유물이다. 천마총 발굴조사단은 발굴 당시 현기증을 느낄 만큼 거대한 공포와 환희를 경험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1월 03일 목요일 제476호


“청와대가 천마도(天馬圖)엔 통 관심을 안 보였나요?”

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윤근일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대답은 비슷했다. 최 교수는 “에이, 그 사람들이야 번쩍번쩍한 걸 좋아하잖아? 금관 말고는 관심이 없었어. 천마도는 솔직히 학자들이나 좋아하고 관심을 보였지, (청와대가) 금붙이 아닌 건 관심도 없었어”라고 말했다.

좀 뜻밖이었다. 천마도 발굴이야말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천마총 발굴은 1973년 4월6일, 위령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100일을 훌쩍 넘긴 7월25일, 드디어 금관을 수습했다. 당시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화려한 유물이었다. 천마총 발굴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학수고대한 것이 금관이었다. 

청와대의 관심도 지대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금관이 나오자마자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실제로, 수습된 금관은 그다음 날 곧바로 청와대로 수송되어 박정희 앞에 놓였다. 이처럼 천마총은 금관을 토해냄으로써 권력이 기대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굉장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천마도 발굴이었다.

ⓒ김태식 제공
대나무 살을 엮어 안감을 만든 말다래(장니)에 금동으로 장식한 천마도 무늬.

천마도는, 하늘로 화려하게 비상하는 ‘어떤 동물’을 호쾌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그 동물이 백마처럼 보이기 때문에 ‘천마(天馬)도’라 불리게 됐다. 상상의 동물인 기린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신라 시대의 회화 작품으로 흔하지 않은 유물이다.

천마도는 장니(障泥)에 그려져 있다. 장니란,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차단하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리는 판이다. 순우리말로는 ‘말다래’다. 장니는 낙마 같은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발걸이인 등자로부터 말을 보호한다. 나아가 장식성도 있어서 중요한 행사나 행렬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림은 물론 그림이 그려진 판도 중요한 유물이기 때문에 천마도와 장니를 합쳐서 ‘천마도 장니’라 부른다.

천마도 장니는 모두 두 세트 4점이다. 발견 당시, 아래위로 포개져 있었다. 역사 교과서 등에 자주 실리는 천마도는 아래쪽에 있던 것이다. 위쪽 천마도는 훼손이 상대적으로 심한 편이라서 최근에야 실물이 공개됐다. 천마총 발굴보고서를 보면 이후 국보 제207호로 지정되는 천마도가 발견된 시점은 1973년 8월22일이다. 금관 발굴로부터 한 달쯤 뒤다. 그날 일지엔 “맑음. 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천마문(天馬文) 장니 발견”이라고 적혀 있다. 천마도를 실제로 수습한 것은 이튿날이었다.

천마총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으로 분류된다. 무덤 중심부의 목관(木棺:시신이 안치되어 있다)을 목곽(木槨:목관을 넣기 위해 나무로 짜 맞춘 매장 시설)으로 감싼 뒤 그 위와 주변에 강돌을 가득 쌓는다. 그리고 다시 흙으로 덮은 무덤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감동시킨 금관은 물론이고 금동 관·허리띠·금동 신발·귀걸이·팔찌 등 시신을 직접 장식한 유물들은 당연히 목관 안에 놓였다. 그런데 천마총의 목곽 내에는 시신을 안치한 목관 외에, 무덤 주인의 부장품을 담아둔 나무 상자가 하나 더 있었다. 발굴보고서에는 ‘부장품수장궤(副葬品收藏櫃)’로 적혀 있다. 그 안에서 천마도 장니가 발견되었다.

ⓒ김태식 제공
세계적인 대발굴이라 할 만한 천마도 발굴 현장. 1973년 천마도 장니를 수습하는 장면을 조사단이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다.

“세계적인 유물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도” 

그러나 천마도 발견 당시 발굴단이 느낀 감정은 환희만이 아니었다. 김정기 발굴단장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일종의 공포라고도 할 수 있는 불안, 그리고 깊은 회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심지어 천마도 장니를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왜 그랬는지 김정기 단장의 술회를 들어보면 당시 절박했던 상황을 느낄 수 있다.

천마도를 담은 나무 상자에는 옻칠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모서리에 금판이나 금박이 붙어서 내부에 귀중한 물건이 담겨 있다는 느낌이었다. 거의 부식된 상태인 상자 덮개를 열었더니 ‘투조금동판식 죽제장니(透彫金銅板飾竹製障泥)’가 보였다. 대나무 살을 엮어 안감을 만든 뒤 그 위에 ‘뚫음 무늬 금동 판(금동 판의 일부를 도려내어 무늬를 드러냄)’을 놓은 말다래란 뜻이다.

김정기 단장은 생전에 ‘어떤 놀라운 일에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흥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런 김정기도 천마도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고신라 유물로는 처음 본 극채색의 본격적인 그림”을 엿보고는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대발굴이었다. 신라의 예술혼이 천년의 긴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살아 있었구나. 그 기쁨도 잠시, 환희의 절정에 달한 순간 ‘아차! 나와서는 안 될 유물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천마도를 무사히 발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발굴 과정에서 형태를 지니고 있던, 유기물로 된 유물이 햇빛에 노출돼 미세한 가루로 변하여 감쪽같이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분명한 사진으로 남겨질 것이고 실측도도 공개될 것이지만, 이 실물이 사라져버린다면 누가 믿을까? 역사 앞에 저지른 그 큰 잘못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나의 긴장과 불안을 조사원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애써 태연한 체 조사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굴단은 일단 포개진 채 놓여 있던 천마도 장니 주변의 썩은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촬영했다. 드디어 위에 있는 장니를 들어 올릴 차례였다. 그 장니는 이미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기 때문에 들어 올리는 순간 파손될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 

발굴단은 우선 겹쳐진 장니 사이로 여러 개의 대칼을 조심스럽게 꽂아넣었다. 다음 단계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대칼을 들어 올리면서 그 밑으로 켄트지를 끼워넣었다. “숨죽인 순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일단 위에 있던 천마도 장니를 무사히 걷어내는 데 성공하고는 “미리 준비한 소독된 화선지로 포장하고 수납함에 넣어 가습 장치를 했다.” 한숨 돌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 천마도 장니 한 점이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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