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시사IN》 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제475호
“무덤 파는 게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 사상 최초로 실측을 제대로 시행한 현장으로 평가된다. 천마총 발굴조사단 김정기 단장을 비롯한 8명은 훗날 황남대총 등 경주의 대규모 국책 발굴 현장을 도맡았다.
천마총 발굴조사단 단장은 그 유명한 문화재관리국 김정기 실장이었다. 단원들도 모두 특이한 경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부단장 격이었던 김동현 문화재전문위원은, 경주와 서울을 오가야 했던 김정기 단장을 대신해 현장에 상주하는 책임을 졌다. 김동현은 이후 김정기 소장과 장경호 소장에 이어 제3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맡게 되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경주 개발 초창기에는 김정기 단장을 보좌하다가, 중반기의 황룡사 터 발굴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을 물려받는다.
김동현은 한양대 건축공학과에서 고건축(古建築)을 전공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고고학자들의 전유물인 발굴 현장에 뛰어들게 되었다. 평생을 형님으로 깍듯이 모셨던 김정기 박사의 “꼬임에 빠져서” 고고학 발굴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정기) 박사가 그러는 거야. ‘무덤도 구조물, 건축물 아니냐?’ 낸들 어쩔 수 있나? 한다고 했지. 하지만 다른 사람 무덤을 판다는 게 기분 좋은 일이겠어? 사람이 할 짓이 아냐.” 그러나 김동현은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발굴에서 ‘무덤 역시 건축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건축학도 아니면 짚어낼 수 없는 고고학적 사실들을 꽤 밝혀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토함산솔이파리 1973년 천마총 발굴 모습. |
김정기-김동현 밑으로, 고고학도 지건길과 부산대 사학과 출신인 박지명이 있었다.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는 지건길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출신이다. 문화재관리국에 학예직으로 들어가서 기나긴 공직 생활을 했다. 경주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 문화재관리국에서 국립박물관으로 옮겨 정착하는 바람에 경주 발굴 현장에서는 멀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천마총 발굴에서 지건길이라는 이름은 결코 뺄 수 없다. 지건길은 천마총 발굴 2년 전의 무령왕릉 발굴에도 스승인 김원룡 교수를 따라 참여했다.
경주 개발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박지명은 “부산대 건축학과 나와서 사학과에 편입학한 사람으로 불국사 복원 공사에 참여했으며, 봉정사 극락전 수리 공사 때는 부감독을 맡은 한국 고건축계에서 신화적인 인물”이다. 천마총 발굴은 한국 고고학 사상 최초로 실측을 제대로 시행한 현장으로 평가되는데, 실측을 직접 시행한 사람이 바로 박지명이다. 다음은 최병현 교수의 증언이다.
“지금이야 국립지리원에 가면 온 국토 등고선을 측량해놓았지만 그때야 그랬나? 천마총은 십자 모양 둑을 남기고 봉분을 네 등분해서 잘라 들어갔단 말이야. 김정기 선생이 발굴 전에 박지명씨를 시켜서 1m 간격으로 말목을 박아 등고선 측량을 하게 했어. 박지명 선생이 건축을 했으니까 측량을 맡긴 거지. 또 봉분을 파고 내려오면서 토층 그림을 일일이 다 그리게 했단 말이야. 지금이야 이런 일이 고고학 현장에서는 기본이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천마총 발굴이야. 그만큼 김정기 박사가 천마총 발굴을 당신이 일본에서 배운 원칙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하려 했어. 진정한 의미의 한국 고고학 발굴은 천마총이 시작이야.”
지금까지 나온 사람들 이외에도 천마총 발굴단엔 조사보조원이라는 이름으로 네 사람이 등장한다. 윤근일·최병현·남시진·소성옥씨다. 이들은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직접 무덤 속을 파고 들어간 주역들이다. 훗날에는 황남대총과 안압지, 황룡사지 발굴 등 경주의 대규모 국책 발굴 현장을 도맡아 조사했다.
ⓒ연합뉴스 천마총에서 천마도를 수습하는 모습 |
이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을 맡는 윤근일은 단국대 사학과 출신이다. 스승인 미술사학자 정영호 교수의 소개로 경주 발굴 현장에 뛰어들었다. 최병현 교수 역시 스승인 고 임병태 교수가 다리를 놓아줬다. 조사단원 중 막내인 남시진은 천마총 발굴 당시 스물한 살에 지나지 않았다. 공고 출신인 그는 박지명을 도와 실제 측량에 참여했다. 당시 <한국일보> 경주 주재기자였던 친척 아저씨 덕분에 천마총 발굴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성옥은 발굴단의 홍일점이었다. 이화여대 사학과 출신인 그녀를 경주로 안내한 이는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이 학과 교수로 있던 고 진홍섭 박사였다. 생존한 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조사보조원 네 명은 천마총 발굴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맛본 기막힌 행운
김정기·김동현·지건길·박지명·윤근일·최병현·남시진·소성옥 이 여덟 명이 바로 천마총 발굴 관련 기록이나 일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인물이다. 발굴 현장에서 찍은 이들의 사진도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회고를 들어보면 한국 고고학 초기의 어설프지만 열정적인 분위기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다음은 윤근일의 회고다.
“정영호 선생이 경주로 가라 해서 짐을 싸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로 갔어. 거기서 최병현 교수랑 소성옥씨를 처음으로 만난 거야. 당시 고속버스터미널이 동대문에 있었거든.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은 팔우정 로터리라고 있지? 그 근처에 있었어. 괴나리봇짐 메고 경주로 셋이서 간 거야. 첫날 도착해서 팔우정 옆 동신여관인가 하는 곳에서 하루 투숙하고 이튿날 천마총 현장에 가니까 돌아가신 박지명 선생하고 지건길 선생이 계시더라고. 또 경주시 임시직으로 있다가 막 주사가 된 손채호씨도 있더라고. 인사드리고 그날부터 백부잣집이라고 경주에서 아주 큰 한옥이 지금도 있어. 거기서 모든 발굴단원이 하숙을 한 거야.”
이 증언에 나오는 손채호도 재미있는 이력을 지녔다. 임시직 공무원으로 경주 지역 사적지 관리를 담당하다가 경주시 학예연구사 제1호가 되었다. 윤근일의 회고에 따르면, 손채호는 경주 오릉의 한 근무지에서 낮잠을 자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박정희 대통령과 조우했다. 선잠에서 막 깨었을 땐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해서 약간의 해프닝이 벌어졌던 듯하다. 그러나 이런 해프닝이 오히려 인연으로 작용해서 이후 경주시청 정식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 고인이 된 손채호를 기억하는 이채경 경주시 학예연구사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생전에 고인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이 경주시에 적극 요청해서 주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계기가 어떠했든, 이채경 학예사가 기억하는 손채호는 ‘성실한 공무원의 표상, 그 자체였다’고 한다.
윤근일·소성옥 등과 함께 경주로 갔던 최병현은 발굴단에 참여한 것을 ‘기막힌 행운’이었다고 회고한다. “난 1967년 숭실대 사학과에 들어가 1972년 8월에 졸업했거든. 그때도 청년 실업이 사회문제였어. 졸업하고 할 일이 없어서 시골에 내려가 빈둥거리는데 하루는 고 임병태 선생님이 연락을 주신 거야. 경주에 큰 발굴이 있는데, 생각이 있으면 이력서 써서 김정기 선생을 만나보라는 거야. 그래서 김 선생을 만난 게 3월19일. 그 이튿날 경주로 간 거야. 거기에서 내 운명이 결정됐어. 기막힌 행운이었지.” 최병현에게는 행운이 덤으로 붙었다. 발굴 현장에서 같은 조사보조원으로 동고동락한 소성옥씨와 연분이 나서,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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