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의 호황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왜냐.
호적을 보면 이때쯤이면 3-5명 정도의 사람들로 구성된 소농 가구가
동네마다 가득하여,
이들이 죄다 유학을 칭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들이 유학을 칭한다는 건 자신들이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다는 소리다.
양반이라고 호적에 올렸는데 족보가 없으면 되겠는가?
19세기 중반부터는 대동보가 초호황을 누리기 시작했음이 틀림없다.
이전까지는 족보라고 해 봐야 유력 가문 몇몇이 찍어 나눠 가지는 정도의,
아마도 잘해 봐야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의 문집이나 찍어 돌려보는 정도의 부수였을 텐데
19세기 중반 동네마다 유학을 모칭한 이들로 가득하니
우리나라 대동보 산업은 이때부터 초호황을 구가하여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시점에 양반층에만 머물러 있던 제사-.
전 국민이 제사를 공유하여
주자가례에도 없는 제사지낸 법이 사람들 사이에 떠돌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 틀림없다.
그나마 이것은 빠른 것이고
명절귀성은 1950년대부터다.
그 이전? 없다.
자기 살던 동네를 떠날 수가 있어야 명절 귀성이 있지 않겠는가?
옛날 신문 검색만 해 봐도 50년대부터 한두 마디씩 명절 귀성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
폭증하는 것은 산업화가 사람들을 대도시로 밀어냈던 1970년대부터가 된다.
이제 조만간 다시 추석이 다가오는 바-.
명절귀성, 차례, 족보, 이런 부분에 대해 한 번씩만 더 생각해 보시기를 바란다.
*** [편집자주] ***
실제 대동보 거의 절대다수는 식민지시대에 태어난다. 왜 식민지시대인가?
진정한 신분해방이 식민지 시대인 까닭이다. 이 중대한 점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 이유는 식민지시대에 대한 고정한 시각 때문이다. 식민지시대에 들어와서야 진정한 신분 해방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까닭이다.
더불어 근대적 인쇄술을 빼놓을 수 없다. 종래 목판인쇄술 금속활자가 물러나면서 비로소 대량 인쇄 출판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어찌 허심히 넘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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