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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도굴과 발굴 그 사이, 무령왕릉의 Rheroric

by taeshik.kim 202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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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정확한 시점은 기억하지 못하나, 2017년 여름쯤 한국전통문화연수원 강연록이다. 강연은 당연히 원고로 한 것이 아니라 준비한 ppt로 했다. 이 강연록은 증거를 남겨야 원고비를 지불한다 해서, 할 수 없이 긁적여 제출한 것이니, 별로 참조할 만한 것은 되진 못하나 기록 차원에서 전재해 둔다. 

 

 

무덤길 입구를 뜯는 순간

 

 

 

발굴과 도굴, 그 사이 
700년 신비의 왕조, 그 출현을 알린 무령왕릉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장마가 초래한 축복

유사 이래 여느 해처럼 몬순 기후대에 속한 한반도에 1971년 여름 역시 장마철이었다. 매년 한반도를 물바다로 만든 장마는 대체로 문화유산 현장에는 재앙이었지만, 또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해에도 한편으로는 축복이기도 했다. 


예수가 출생하기 직전인 기원전 18년에 태동해, 700년간이나 신라·고구려와 더불어 한반도를 삼분한 백제가 도읍한 세 곳 중 두 번째인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에 송산리 고분군이라고 부르는 백제 왕릉지구가 있다.

한반도 중부의 젓줄인 금강이 북쪽에서 뱀이 똬리 틀 듯 감돌아 흐르는 공주 시내를 기준으로 서북쪽 낮은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는 이곳에서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 부부를 안치한 무덤이 기적처럼 발견된 것이다. 이는 장마가 준 선물이었다. 

 

 

 

 

송산리 고분군은 일제 식민강점기에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거쳐,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제가 웅진에 도읍한 시기(475~538)에 그 왕가의 공동묘지였다는 사실은 대략 드러났다. 1971년 여름 장마가 도래하기 직전까지 이곳에는 왕릉임이 유력한 봉분 6~7기가 노출돼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사적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었다. 

이들 고분은 매년 여름이면 장마로 곤욕을 치렀다. 그 뒤편 언덕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분 내부로 스며들었고, 이것이 고분 훼손을 가속화한다는 비판에 시달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백제 고분으로는 부여 능산리 동하총과 더불어 유이(惟二)한 사신도 벽화분인 6호분이 문제였다. 이미 이 무렵이면 온통 벽돌로 쌓은 이 무덤 현실 네 벽면 사신(四神)은 흔적조차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문화재 애호주의는 강력한 태풍이었다. 

그 대처 방법 마련에 골머리를 앓던 당국에서는 가장 단순한 방식을 택했다. 고분군 중 동-서 방향으로 인접한 제5호와 6호분을 침수에서 보호하고자, 그 뒤편 3m가량 떨어진 지점 언덕을 동-서 방향으로 파서 배수로를 내기로 했던 것이다. 이에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장마 전선이 한반도 남해안으로 북상하기 시작한 6월 29일 공사를 시작했다.

장마가 오기 전에 공사를 끝낸다는 생각이었다. 보수 공사 예산은 720만원으로 책정했다. 공사는 이듬해 6월 30일까지 1년이었다. 보수공사 업체는 삼남건업으로 확정됐다. 

 

 

무덤길 개봉

 



인부 삽날에 걸린 벽돌   


공사 시작 일주일째인 다음달 5일 오후 2시쯤, 배수로를 파내던 공사 인부의 삽날에 벽돌 하나가 걸렸다. 당시 현장 공사 감독 책임자 김영일 씨는 “처음엔 이 벽돌이 무엇인가 했어요. 한데 계속 파내려가다 보니깐 이런 벽돌로 잘 쌓아올린 구조물이 나오는 거예요. 또 파낸 흙을 보니깐 석회도 섞여 있었어요.”라고 회상한다.

이것이 바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무령왕릉 출현의 전조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공사 인부들이 찾아낸 이 벽돌 구조물이 온통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아올린 무령왕릉 내부로 통하는 무덤길의 남쪽 천장이었다. 

이렇게 되자 공사는 발굴로 돌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다만 확실한 한 가지는 벽돌로 쌓은 점과 그 구조를 볼 때,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왕릉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새롭게 드러난 이 무덤은 그 바로 앞쪽에 위치하는 백제시대 왕릉급 무덤임이 확실한 송산리 6호분과 구조를 빼다 박은 듯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송산리 고분군 내 다른 무덤은 발굴 당시 이미 도굴된 상태라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새롭게 발견된 무덤 역시 이미 도굴 피해를 보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북어 세마리로 차린 제상

 

 

하지만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 무덤은 백제시대에 조성된 뒤 단 한 번도 도굴꾼이 다녀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그 안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서 이곳에 묻힌 사람이 백제 무령왕과 그 부인임을 밝혀주는 문자가 적힌 유물까지 발견되었으니 그 성과는 다른 고분 발굴보다 더욱 컸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확인한 것이고 우선은 새롭게 드러난 벽돌무덤을 어찌할 것인가가 중요했다. 이때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무단발굴에 들어간 백제왕릉

새로운 무덤 출현 사실을 안 배수로 공사업체에서는 곧바로 이를 공주시와 당시 문화재정책을 담당하는 중앙부처인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보고를 해야 했지만, 엉뚱하게도 국립공주박물관에 알리고 말았다.

박물관에서도 이 사실을 즉각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해야 했지만, 새로운 백제 왕릉 출현에 흥분한 나머지 자신들이 직접 이 새로운 고분을 발굴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발굴 허가를 사전에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히 불법 행위였다.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국립공주박물관은 현지의 몇몇 고고학자와 함께 무단 발굴을 벌인 결과, 이곳이 새로 발견한 백제시대 왕릉급 벽돌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사실은 마침내 공주시를 통해 이튿날인 6일 문화재관리국에도 보고됐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은 마침 인근에 있던 건축기사 윤홍로를 현장에 파견해 실태 파악을 한 결과 배수로 공사 중지와 무단 발굴 중단을 즉각 명령하고는 정식 발굴단을 조직해 발굴조사에 착수키로 했다. 7일, 송산리 고분군 현장에는 문화재관리국 산하 발굴조사를 담당하는 문화재연구실 직원들과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원룡이 도착했다. 그 역시 영문도 모른 채, 더구나 내키지 않은 발길을 문화공보부 장관의 명을 받들어 할 수 없이 내려왔으니, 속으로는 불만투성이였다.

그렇지만 직급 혹은 직책이 깡패라고 발굴 지휘는 김원룡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실제 발굴조사는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이 하고, 조사단장은 국립박물관장이 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발굴조사단이 출범했다. 정식 발굴조사는 이날 오후 4시에 시작했다. 

 

열린 무덤

 

 

한데 발굴 시작 두 시간 만에 현장은 최악의 사태가 빚어졌다.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더위를 가시게 했지만, 발굴 현장은 아연 아수라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자칫하면 물이 무덤 내부로 쏟아져 들어갈 판이었다.

비는 밤새 퍼부었다. 이에 발굴 조사단은 이내 철수하고 칠흑 같은 밤에 배수로 공사 담당 삼남건업 인부들만이 남아 무덤을 지키고자 고인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한 배수로를 급히 만드느라 사투를 벌였다. 같은 시간, 발굴 현장을 빠져나온 조사단은 공주 시내 동명여관에 모여 새롭게 드러난 저 고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숙의한 결과 이튿날 조사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 역시 문화재보호법 위반이었다. 문화재위원회 심의도 거치지 않은 무단발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번에는 그 불법을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했으니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돌이켜 보면 무령왕릉 출현과 발굴은 불법 탈법이 연쇄파동을 일으킨 쓰나미였다. 

북어 세 마리로 제상 차린 고유제  

다행히 이튿날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하늘을 선사했다. 8일 오전 5시, 발굴 작업을 개시한 조사단은 마침내 무덤방으로 통하는 아치형 무덤길 전면을 완전히 노출하는 데 성공했다. 보니 완연한 백제시대 또 하나의 왕릉임이 명백해졌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오후 4시, 북어 세 마리와 간단한 술로 제사상을 차리고 무덤 개봉에 앞서 무덤 주인공에게 예를 갖추고는 마침내 무덤길 전면을 차곡차곡 쌓아 막은 벽돌을 하나하나 걷어내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무덤길 내부가 천오백 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순간, 한여름 자동차 에어컨을 켤 때 나는 것과 같은 서늘한 바람이 흰색을 내며 무덤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통로를 확보한 조사단에서는 조사 책임자인 김원룡과 국립공주박물관장 김영배 두 명이 마침내 백열등을 들고는 무덤 안으로 진입했다. 높이 1.45m, 폭 1.04m, 길이 2,90m인 터널 같은 벽돌 무덤길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천장에서는 아카시아 나무뿌리가 치렁치렁 늘어져 마치 유령집을 방불했다. 


이 터널 중간쯤 바닥에는 이마에 뿔이 하나이며, 돼지 같이 생긴 험상 굳은 ‘그로테스크한’ 돌짐승 하나가 떡 하니 서 있었다. 아마 외부에서 침입하는 사악한 기운에서 무덤을 지킨다는 뜻으로 백제 사람들이 놓아두었을 것이다. 


이런 터널을 통과하니 역시 아치형 천장에 바닥은 직사각형인 무덤이 나타났다. 무덤방은 바닥에서 중앙 천장까지 최고 높이가 2.93m였고, 바닥은 너비 2.70m, 길이 4.20m였다. 어두워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바닥에는 시커먼 나무판자들이 어지럽게 깔려 있었다.

무령왕과 그 왕비를 안치한 목관이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 틈새로 우선 금빛이 나는 유물들이 보였다. 이런 상태를 확인한 김원룡과 김영배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무덤을, 그것도 백제 왕릉을 내가 발굴하다니” 하는 상념이 머리를 스치기 시작하면서 그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진묘수를 살피는 김영배 

 



“내 머리가 돌았다” 

이런 흥분 상태는 무덤방에서 다시 무덤길로 돌아 나오는 과정에서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 조금 전에 본 그 우락부락한 돌짐승 앞에서 넓적한 돌판 2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백열등을 비춰봤다. 거기에서 한문으로 새긴 글자들이 드러났다. 그 첫줄과 둘째 줄은 이러했다. 

 “영동 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 
 
동쪽을 평안케 한 대장군인 백제의 사마왕이라는 뜻으로, 다름 아닌 백제 당시 중국 남쪽 대륙을 장악한 양(梁)나라 황제가 백제 무령왕에게 내린 작호(爵號)였다. 이 순간을 나중에 회고하면서 김원룡은 “그 순간 내 머리가 돌아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무령왕릉임을 확인하면서 돌아버린 그의 머리는 무령왕릉 발굴을 세계 고고학사상 유례없는 졸속 발굴로 몰아갔다.

여느 고고학자라면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당분간은 발굴을 중단한 다음, 치밀한 계획 아래 장기간에 걸친 발굴조사 계획을 세우겠지만, 그만 김원룡은 “즉각 발굴”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무령왕릉은 무덤 주인공을 확인한 그 시간을 시준으로 곧바로 발굴작업에 들어가, 이튿날 아침 8시면 이미 내부가 텅 비고 말았다.

이는 발굴이 아니라 도굴이었다. 당연히 어떤 유물이 어떤 상태로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정보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개봉한 무령왕릉 내부

 

 

밤샘 작업에 지쳤던지, 혹은 그 흥분이 이내 가라앉아 그랬던지, 아침이 되어 텅빈 무덤방을 뒤로하면서 몰래 공주를 빠져나와 자동차 편으로 서울로 가면서 김원룡은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속이 후련하다.” 

그는 후련했을지 모르나, 이는 두고두고 체증으로 남는다. 

가뭄 끝 단비

무령왕릉은 이처럼 그 발굴 방법이 도굴과 같았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세계고고학사에서는 비판받는다. 그렇지만 그 성과는 최고였다.

우선 무령왕릉은 놀랍게도 고려시대 이전 여러 왕조에서 재위한 한국고대사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공이 드러난 사례다. 백제엔 31왕, 이 왕국과 동시에 존재한 천년왕국 신라는 56왕, 고구려는 27왕이 있었다. 세 왕국을 합친 왕은 114명. 한데 무령왕릉은 현재까지 무덤 주인공이 밝혀진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이다. 

 

 

뜯는 사람들

 

 

나아가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망각에서 구출했다. 백제는 한국고대사의 암흑과도 같았다. 관련 문헌 기록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무령왕릉은 그 공백을 메웠다. 우리는 그 출토 유물들을 통해 백제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게 되었다.

무령왕에 대해서는 부족하나마 정보가 있었지만, 그 왕비에 대한 정보는 오직 출처가 무령왕릉이 있을 뿐이다. 돌판 두 장에 적힌 문자 분석을 통해 우리는 백제가 어떠한 장례 습속을 지녔는지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왕릉답게 각종 화려한 문물 100여 종 3천여 점을 쏟아냈다. 개중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음이 분명한 유물이 많았다. 더불어 목관은 수종 분석 결과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 열도 한 군데서만 자생한다는 금송(金松)임이 밝혀졌다. 백제는 관재를 일본 열도에서 수입한 것이다.

이런 발굴 성과는 백제가 해상을 무대로 활발한 국제무역을 전개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무령왕릉 발견은 한국고대문화사 복원에는 가뭄 끝 단비와도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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