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사전에서 홍대용洪大容(1731~1783)을 검색하면 화상畵像 하나가 빠지지 않고 소개되거니와 영정조시대를 살다간 이 위대한 조선후기의 실학자라는 사람 모습이라며 동시대 북경에서 그를 만난 중국인이 그린 것이다.
예컨데 구글위키피디아에서 홍대용을 검색하면 아래와 같거니와
저 사진만 따로 검출하면 다음이라
이것이 바로 홍대용이다.
연배로 보면 연암 박지원보다 6살이 많은 그는 이른바 연암학파라 일컫는 인물들과도 직접 교유도 적지 아니했으며 유럽에서 유래하는 최신 사상 소개에도 주력해 지전설을 비롯한 괄목할 만한 주장을 열성으로 소개한다.
저 담헌湛軒을 소개할 적에 빠지지 아니하는 저 화상畵像...1999년 내가 천하에 공포함으로써 알려진 자료다.
이걸 찾은 사람은 따로 있어 순천향대 중문과 박현규 교수다. 이 분이 북경에서 저 자료를 포함한 홍대용 관련 자료를 잔뜩 들고 나타났으니, 아래 첨부하는 세 가지 당시 내 기사가 그걸 정리한 것이다.
연합뉴스가 배포함으로써 이제는 보편화한 저 사진..신통방통하게도 정작 우리 공장 DB에선 누락해 버리고 아무리 찾아도 없다. ㅋㅋ
관련 사진들은 당시 연합뉴스가 회원 각 신문방송에 뿌렸으므로 저리 살아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까 싶다만 못내 찝찝하다.
1999.03.22 18:56:00
엠바고 1차 : 1999.03.22 18:56:00
실학자 홍대용 화상(畵像) 중국서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조선 후기 영-정조때 활약한 저명한 실학자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을 그린 그림이 중국에서 발견됐다.
한·중 교류사 전공인 박현규(朴現圭) 순천향대 중문과 교수는 최근 중국 북경대 선실본에서 영조 42년(1766년, 건륭 31년)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을 비롯한 조선외교사절단과 주고 받은 시문과 서찰 등을 중국인이 기록한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을 찾아내 23일 공개했다.(이 책에 대해선 별도 기사 참조 )
이 책은 중국 남쪽지방인 항주에서 북경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마침 북경에 머물고 있던 홍대용 일행과 교유했던 엄성(嚴誠)이라는 항주 문인이 남긴 것으로 특히 여기에는 홍대용을 비롯한 조선외교사절 6명의 화상이 인물평과 함께 들어있다.
홍대용은 당시 외교사절단 서장관이던 삼촌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을 방문했다가 사절단 정사 순의군(順義君) 이훤(李煊)의 군관 이기성(李基聖)의 소개로 엄성을 비롯한 항주 문인들과 교유를 갖게 됐다.
초상화가 남겨진 인물은 홍대용을 비롯해 홍억,이훤,이기성 외에 사절단 부사였던 참판 김선행(金善行)과 그의 사촌동생 김재행(金在行)이다.
지금까지 홍대용 초상화는 동국대 김태준 교수가 《홍대용 평전》(1987.민음사)에서 이번에 중국에서 발견된 화상과 같은 것을 소개한 적이 있을 뿐이며 그나마 원본을 다시 베낀 모사본인데다 필체가 흐릿해 세밀한 얼굴묘사 등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박 교수가 찾아낸 이 화상은 유복(儒服)을 걸친 채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소맷자락 안에 넣은 홍대용을 그린 것으로 `홍고사대용'(洪高士大容. 고사는 높은 선비라는 뜻)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으며 무엇보다 보존상태가 완벽해 온화한 듯한 그의 얼굴 표정까지 또렷이 읽을 수 있다.
일하제금합집 필자인 중국인 엄성은 그의 책에서 홍대용은 처음 만날 때는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으나 다음날 유복으로 갈아입은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기성 화상은 선 모습을 그린 것으로 무관 복장을 했으며 김재행 화상 또한 입상(立像)으로 무관복장을 한 호걸스런 풍채가 돋보이며 정사 이훤 화상은 왕족답게 근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 김선행 화상은 탑상 위에 걸터 앉아 필담하는 모습을 담았고 홍대용의 삼촌 홍억의 화상은 과묵한 듯 얼굴이 숙인 채 앉아 있는 장면이 있다.
엄성은 홍대용에 대해 "시를 짓지 않지만 시에는 조예가 깊다"고 평가하고 있다. (관련 사진있음)
1999.03.23 09:33:00
<`일하제금합집' 내용과 발굴 의미>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순천향대 중문과 박현규 교수가 중국 북경대도서관에서 발굴해 23일 공개한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이하 합집)은 당시 청나라 서울 북경을 찾은 조선사절단을 만난 중국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외교사절로 중국,즉 청나라를 다녀온 뒤 남긴 기록을 흔히 연행록(燕行錄)이라 하는데 우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행록이라면 홍대용의「을미연행록」(乙未燕行錄)과 그와 절친했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굴된 「합집」은 홍대용이 그의 삼촌인 홍억(洪檍)을 따라 영조 42년,청나라 건륭황제 31년(1766년) 북경을 방문했던 때 홍대용을 비롯한 조선사절단 일행과 엄성(嚴誠)을 비롯한 중국 남쪽 항주 출신 문인들이 주고받은 시문과 서찰 등을 엄성이 기록한 것으로 말하자면 중국인이 쓴 연행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합집」은 홍대용이 북경을 다녀온 뒤 남긴 일종의 기행문인 「을미연행록」과는 같은 내용을 다룬, 쌍둥이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북경대 도서관 선실본에 소장된 이 「합집」은 전부 3책으로 크기는 29.7x17.4㎝이며 북경에 머물고 있는 홍대용 일행을 직접 찾아가 이들과 교유했던 엄성의 유언을 받들어 1767년 주문조(朱文藻)라는 중국인이 편찬한 것이다.
그러나 원본은 사라지고 현재 북경대에 남아있는 것은 청 도광 30년(조선 철종 원년.1850년) 나이지(羅以智)라는 중국인이 주문조의 책을 필사한 것이 남아있다.
서문은 엄성 일행이 북경으로 과거 보러갔다가 홍대용 등을 만나게 된 과정을 수록하고 있고 본문은 조선사신단 6명의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책1은 주문조의 서문을 포함해 이기성과 김재행의 인물과 홍대용의 화상까지 수록하고 있으며 책2는 홍대용 문장만 수록했으며 책3은 조산 삼사와 나이지 발문이 남아 있다.
특히 이 책은 홍대용을 비롯한 화상을 수록하고 이들과의 교유 과정과 인물평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이들 조선사신들의 시 또한 많이 수록하고 있는데 이들 중 많은 시가 국내에는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이 책 홍대용편에는 그의 화상과 함께 그의 서찰 16편,별지 1편 등이 남아있는데 특이한 것은 다른 조선사신단과는 달리 홍대용의 시가 한편도 없다.
이는 "홍대용은 시를 짓지않는다"는 엄성의 평가와 더불어 현재 국내에도 그의 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미뤄보면 홍대용이 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주문조가 쓴 이 책 서문에 따르면 건륭 31년 고향이 같은 엄성과 육비(陸飛),반정균(潘庭筠) 등 3명은 과거를 보러 연경에 갔다가 조선사신단 일행 중 한명인 이기성(李基聖)을 만난 것이 계기가 돼 홍대용을 비롯한 나머지 조선사신들과도 `진실되고 아름다운 교유를 하게 됐다'.
조선사신단과 엄성 일행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종이에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데 그 필담 종이는 조선사신들이 가져갔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다.
국내 홍대용 연구전문가인 동국대 김태준 교수(국문학)는 "이 책은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사료집진'이라는 간행물에 따르면 충남 연기에 사는 홍사덕씨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숭실대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후 국내에서는 자취를 감춘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문헌이 중국에서 발굴됨으로써 `을미연행록' 하나로만 이뤄지던 홍대용,혹은 그와 중국문인들간 교류사 연구가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1999.03.23 18:09:00
엠바고 1차 : 1999.03.23 18:09:00
<국내 소장 `일하제금합집' 어디로 사라졌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순천향대 중문과 박현규 교수가 중국 북경대도서관에서 발굴해 국내에 소개한 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 관련 기록인 「일하제금합집 」은 사실 해방 후에까지도 국내에 있었다.
이런 사실은 홍대용 연구에만 일생을 바치다시피하며 그에 대한 단행본만 3권을 출판한 김태준 동국대 교수(국문학)가 증언하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중요문헌 해설서인 「조선사료집진」에는 이 책을 「조선사신화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면서 여기에 실린 홍대용을 비롯해 1766년 북경에 갔던 조선사신단 일행 4명의 화상을 다시 게재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 「조선사료집진」은 이 책은 충남 연기에 사는 홍사덕이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있다고 소장처까지 밝히고 있다.홍사덕은 홍대용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록을 주목한 사람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을 만든 역사학자 고 김양선 교수였다. 김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홍사덕씨가 소장하던 「합금」 원본을 인용하면서 "지금은 숭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숭실대 박물관에는 현재 이 책이 남아있지 않다.
김태준 교수는 "조선총독부와 김양선 교수 기록을 보고 숭실대 박물관과 김교수 유족을 비롯해 이 책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면서 "이 책이 국내에서는 아예 자취를 감췄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공개를 하지 않은 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 북경에서 홍대용 일행을 만난 중국 항주 출신 문인인 엄성(嚴誠)의 기록인 이 「합금」은 언제 조선에 유입됐을까.
홍대용이 남긴 기록을 뒤져보면 그는 생전에 중국에서 이 책을 받아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을 남긴 엄성은 북경에서 홍대용을 만난 다음해 복건성에서 학질에 걸려죽게 된다.
그런데 홍대용이 북경에서 돌아온지 12년째,즉 엄성이 죽은 지 11년째되던 정조 2년(1778년) 홍대용은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방문했다 돌아온 손유의(孫有義)에게서 「합집」으로 추정되는 엄성의 유고를 받았다고 홍대용이 손유의에게 쓴 편지에서 적고 있다.
이로 미뤄 보면 홍대용은 엄성이 남긴 이「합집」을 넘겨받아 보관해 왔으며 그것이 일제때 그 후손 홍사덕을 거쳐 숭실대 김양선 교수까지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1999.03.23 07:15:00
<사진-15>중국서 발견된 조선외교사절단 화상(畵像) 《↕》
*23일 오전7시에 발행예정
조선 후기 영-정조때 중국을 방문한 조선외교사절단의 모습과 시문,서찰 등을 기록한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이 23일 공개됐다. 사진 좌상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절단 정사 이훤(李煊), 예조판서 김선행(金善行),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서장관 홍억(洪檍). /문화생활부 기사 참조 1999.3.22 (서울=연합뉴스)(끝)
**** 이후 숭실대박물관에서 홍대용 자료를 일부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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