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3.31 08:32:57
<기자수첩> '동맥경화' 걸린 고구려(2005.3.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요즘 고구려가 짜증난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연구가 짜증난다.
중국이 동북지방 경제개발을 위해 추진하는 소위 '동북공정'에 고구려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노골적 의도가 개입돼 있다 해서 국내에서는 이에 분개한 반(反)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잇따랐고 현재도 나오고 있다.
가장 대표적 성과물이 지난해 3월에 출범한 고구려연구재단 결성이다. 이 거창한 기구 출범만이 아니라 그에 즈음해, 또 '동북공정'이 국내에서 이슈화하고 난 지난 약 2년 동안 ‘고구려 구출’을 표방한 각종 행사가 봇물을 방불할 만큼 이어지고 있다.
그에 동반해 고구려 관련 출판물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국역사상 이와 같은 ‘고구려 붐’은 보기 힘들었다. 조선후기 이른바 실학자들이 고구려를 외쳤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고구려 호황'은 없었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지난 2년 동안 쏟아져 나온 고구려 관련 연구성과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해 '재방송'에 지나지 않는다. 어림잡아 90% 이상이 흘러간 옛 노래를 마치 같은 음반을 계속 틀어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늘 그 소리가 그 소리다. 고구려는 북방을 호령하고 중국에 대항하며, 때로는 중국을 위협까지 한 ‘강성대국’이었다는 주장도 새로울 게 없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느니,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으므로 발해사는 한국사 영역에 속한다느니 하는 말도 이젠 귀가 아플 지경이다.
동북공정에 대항하겠다며 고구려연구재단을 비롯한 각종 기관이라든가 단체에서 발주한 '고구려 프로젝트'들도 제목만 뜯어보아도 "또 그 소린가?"라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바야흐로 고구려는 '동맥경화' 상태다. 그럼에도 중국에게서 고구려를 구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말한다. 고구려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연구가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그 질이 부족한 것인가?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더욱 문제가 심각한 것은 후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고구려 동맥경화'가 일어나는가? 무엇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혹은 십수 년 동안 같은 목소리를 내는 연구자들이 연구를 독점하고 있고, 그들이 흐름을 여전히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석ㆍ박사 논문에서 맴도는 그들이 과연 고구려 구출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탈진 상태의 고구려는 그래서 슬프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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