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21년(475)…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문주왕본기 즉위년 : 문주왕(文周王)<문주(汶洲)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毘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성품이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었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에 서울[都]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2년(476)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여름 4월에 탐라국(耽羅國)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8월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3년(477)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중수(重修)했다.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封)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4년(478) 가을 8월에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법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을 시켜 해치게 하여 드디어 죽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은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개로(盖鹵)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즉위했다. 도읍을 웅주(熊川)로 옮겼다. 2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37(잡지 제6) 지리 : 고전기(古典記)를 살펴보니, 동명왕(東明王) 셋째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서울을 웅천(熊川)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에 이르러 서울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 곧 의자왕 재위 20년(660)에 이르러, 신라의 유신(庾信)이 당나라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쳐서 이를 평정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 <고전기(古典記)>에 의하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묘卯; 前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慰禮城)으로 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컬었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洲)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으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세 성왕(聖王) 대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세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삼근왕본기 즉위년 : 삼근왕(三斤王)<임걸(壬乞)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 맏아들이다. 문주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이가 13세였다. 군무와 정사 모두를 좌평 해구에게 위임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3대 삼근왕(三斤王)은 삼걸왕(三乞王)이라고도 한다. 문주(文周)의 아들이다. 정사년에 즉위해 2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동성왕본기 즉위년 : 동성왕(東城王)은 이름은 모대(牟大)<마모(摩牟)라고도 한다>이며 문주왕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담력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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