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삼근왕 2년). 백제인. 문주왕 2년(476)에 병관좌평에 임명되어 임금까지 무시하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그 해 9월에는 사냥나간 문주왕을 자객을 시켜 암살했다. 문주 아들인 삼근이 13살로 즉위하자 군사와 정무를 독단하다가 동왕 2년(478)년에는 은솔 연신과 더불어 대두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덕솔 진로에게 토벌되고 그 자신은 죽임을 당했다. 비류왕 9년(312)에 병관좌평으로 임명된 해구(解仇)와는 다른 인물이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문주왕본기 : 2년(476)…가을 8월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4년(478) 가을 8월에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법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밖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을 시켜 해치게 하여 드디어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삼근왕본기 : 삼근왕(三斤王)<임걸(壬乞)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 맏아들이다. 문주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이가 13세였다. 군무와 정사 모두를 좌평 해구에게 위임하였다. 2년(478) 봄에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燕信)과 더불어 무리를 모아 대두성(大豆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다시 덕솔(德率)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 군사 500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 저자[市]에서 목을 베었다. 논한다. 춘추(春秋)의 법에 임금이 시해(弑害)를 당하였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아니하면 이를 깊이 책망하여 신하[臣子]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를 시해하자 그 아들 삼근(三斤)이 왕위를 이었는데도 그를 능히 죽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가 한 성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킴에 이른 연후에야 두 번이나 큰 군사를 일으켜서 이겼다. 이른바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으면 굳은 얼음을 만들게 되고, 반짝거리는 불똥을 끄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는 것』이니 그 말미암는 바는 점차적인 것이다. 당나라 헌종(憲宗)이 시해되었으나 3세(世) 뒤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였다. 하물며 바다 모퉁이의 궁벽한 곳에 있는 삼근과 같은 어린아이야 또한 어찌 족히 말할 나위가 있으랴! 3월 초하루 기유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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