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미라와 북극 (6)

신동훈 (서울의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학연구실)


앞에서 밝혔듯이 프랭클린 원정대의 실종 후 영국은 이 원정대의 종적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프랭클린 원정대를 찾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는 당시 돈으로 20,000 파운드 (2019년 환산 15억 정도) 현상금을 걸기까지 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프랭클린원정대 수색을 성공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현상금 포스터 


프랭클린 원정대의 운명은 20세기 후반부터 밝혀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인류학자-고고학자들이 주축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해군의 구조 사업이었던 것이 100년을 훨씬 넘어가면서 고고학적 탐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탐사는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니고 80년대 들어 지속적으로 여러 그룹에 의해 반복적으로 시도되었는데 주요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1981년. Alberta 대학 인류학과는 프랭클린 원정대가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King William Island를 조사하였다. 


King William Island


먼저 이 섬으로 말할 것 같으면, 


1859년 영국의 수색대에 의해 프랭클린 원정대가 이 섬에 머물렀다는 증거를 이미 발견 한 바 있었기 때문에 Alberta 대학의 조사는 전혀 무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영국 수색대는 이 섬에 남겨진 돌무더기 속에서 프랭클린 원정대가 남긴 메모가 발견하였는데 그 메모에 의하면,  


1847년 5월까지도 프랭클린원정대는 이 섬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다고 적혀 있어 이때까지만 해도 승무원들은 무사했다는 것이확인되었다. 하지만 1847년 6월이 되자, 선장인 프랭클린을 포함한 총 24명의 장교가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었고 1848년이 되자 (출항한지 3년 째이다. 3년치 식량을 가지고 출항 하였으니 들고간 식량은 이시기에 거의 소진되었을 것이다) Erebus와 Terror 두척 배가 완전히 얼음에 갇혀 승무원들은 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올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메모는 사망한 프랭클린을 대신하여 당시 대원을 지휘한 장교가 배를 떠나기 전 쓰여졌는데-.


메모에 의하면 결국 두 척 배는 킹 윌리엄 섬 주변 얼음에 갇힌채 버려졌고 그때까지도 살아 남은 105명의 승무원들은 배를 떠난 것이 확실하였다. 이들은 아마도 다른 곳 어디론가로 이동했다가 그 후 전멸한 셈이 되겠다. 



프랭클린 사망 후 남은 대원을 지휘한 장교가 남긴 메모. 1859년에 킹 윌리엄 섬에서 발견되었다. 메모를 발견 한 사람은 이를 영국 해군성으로 전달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보인다. 이때가 이미 출항 후 3년 째인데 북극이라는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엄격한 군인 다운 통제가 프랭클린 원정대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lberta 대학의 1981년 킹 윌리엄 섬에 대한 인류학 조사에서는 몇몇 인골 파편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발견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발견된 인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보고가 있었다. 

'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라와 북극 (8)  (0) 2019.10.26
미라와 북극 (7)  (1) 2019.10.19
미라와 북극 (6)  (0) 2019.10.12
미라와 북극 (5)  (0) 2019.10.05
미라와 북극 (4)  (0) 2019.09.07
미라와 북극 (3)  (0) 2019.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