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 프랑스 공사 김만수의 세계여행기》라는 근간이다. 보도자료용으로 배포되어 언론사에 배포되었으니, 무심히 이런 자료가 있었나 하고는 그 해제를 보는데, 2007년에 발견되었다는 구절이 보인다.
선문대 국어국문학과 구사회 교수팀이 이끄는 이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BK21플러스 사업팀 성과물이다. 그 해설 역주에는 구 교수를 책임자로 해서 양지욱 양훈식 이수진 이승용 다섯 사람이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자료가 공개되었다는 2007년이면 내가 문화재와 학술을 현역기자로 전담할 때라, 그 공개에 즈음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내가 간여한 모든 일을 기억할 수는 없으나, 경험칙에 미뤄보면 이럴 때 거의 두 가지 중 하나다. 첫째, 우리 공장이 아닌 다른 언론사에서 보도했거니나 둘째, 우리 공장이라 해도 내가 아닌, 문화부가 아닌 다른 부서에서 썼거나 이 둘 중 하나에 해당한다.
그래서 우리 공장 내부 기사 검색기를 돌린다. '김만수 프랑스 공사 일기'라는 키워드를 넣으니, 아니나 다를까 아래와 같은 2007년 11월 16일자 대전충남지사 박주영 기자 기사 1건이 검출된다. 발신은 충남 아산이다. 아산인 까닭은 기사 본문에서 언급된다.
2007년 언론을 통해 공개된 김만수 일기 일부분.
대한제국시대 주불공사 김만수 일기 발견
(아산=연합뉴스) 박주영 기자 = 대한제국시대 프랑스에 주재했던 외교관의 일기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선문대 인문과학연구소 양지욱 연구원은 1901-1902년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프랑스에 주재했던 김만수(1858-?) 공사의 일기 3권을 지난 6월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했다고 16일 밝혔다.
대한제국시대 우리나라에 왔던 프랑스 외교관이 대한제국에 대해 기록한 사료(史料)는 많이 있으나 우리나라 외교관이 프랑스에 관해 쓴 기록물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발견된 일기는 김 공사가 1901년 4월 14일부터 1902년 2월 14일까지 프랑스에 있으면서 겪은 내용을 적은 일록(日錄), 일기책(日記冊), 주법공사관일기(駐法公使館日記) 등이다.
김만수 일기 영인본 한 장면
이들 일기에는 '일본이 영국은행에서 오천만원을 차관으로 빌렸다', '일본 전(前) 총리 이등박문이 파리를 방문했는데 혹 차관문제가 아닌가 살펴보고 있다' 등 국제 정세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1902년 프랑스 예산의 규모와 증가율 등 프랑스의 국내 사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또 1901년 10월 4일자 일기에는 '본국에서 지원이 끊겨 공관 월세를 내지 못하게 돼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어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상태를 미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양 연구원은 "김 공사의 일기는 초기 한-불 외교관계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희귀한 사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공식적인 국가 수행원이 남긴 기록물이기 때문에 사행(使行)문학으로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자료는 17-18일 선문대 학생회관에서 열리는 '2007 한민족문화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jyoung@yna.co.kr
(끝)
해제와 본문을 중심으로 기사에서 언급하지 않은 부분 몇 가지를 보충하면, 이때 공개된 김만수 일기는 3권이라기보다는 3종이라, 일록과 일기책 주법공사관일기가 그것이다. 한데 그 체제와 규격이 달라, 이런 현상이 빚어진 이유는 초고와 편집이 진행된 차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김만수 자신, 혹은 그 후손이 초고를 기초로 삼아, 정리에 들어갔지만, 무슨 곡절이 있어 출판물로는 빛을 보지 못하고 모조리 필사본 형태로 남았다. 따라서 저들 김만수 일기 필사본은 초고와 그것을 기초로 삼아 출판 단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의의가 있다. 그 어중간 며칠치 일기가 누락됐으니, 원고 망실에 따른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조선시대 일기는 보통 그날그날 쓰는 것이 아니라, 며칠치를 몰아쓰는 방식을 택하는데, 이에 따른 누락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만수는 1901년 3월 16일 독일공사 민철훈, 영국공사 민영돈과 함께 프랑스 공사로 공식 발령나서, 이들과 함께 동년 4월 14일(음력 2월 26일) 함녕전으로 고종을 배알하고는 유럽으로 떠난다. 당연히 배편을 이용했으니, 제물포를 떠나 산동반도로 갔다가 죽 남하해 상해와 홍콩, 사이공, 콜롬보, 지부티, 포트사이트를 거쳐 지중해를 횡단해 마르세이유를 통해 상륙한 다음, 그해 6월 6일 파리에 안착했다.
귀국길은 육로를 이용해 러시아로 갔다가 우크라이나로 남하한 다음 오데사에서 출항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해 출국길과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왔다.
혹 여유가 있으면 이 일기에 보이는 사항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우리 공장 김용래 파리특파원이 요새 프랑스 지역 식민지시대 자료 발굴에 혈안이 됐거니와, 이 책자도 그에게 보내면서, 틀림없이 파리 쪽에 김만수 관련 자료가 있을 터인데 찾아보면 좋겠다고 일러두었는데, 여타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빗자루 들자 마당 쓸라 하면 좋아하는 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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