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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법공法空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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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3대 법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얻었다는 이름. 다만, 그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많은데다, 법공의 실체를 둘러싼 의문도 적지 않다. 

해동고승 권1 법공(法空) 전 : 법공(法空)은 신라 제23대 법흥왕이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원자(元子)이니,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키가 7척이며 너그럽고 덕이 있어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신령스럽고 거룩해서 만백성이 밝게 믿었다. 3년(516)에는 용이 양정(楊井) 안에서 나타났고, 4년(517)에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었으며, 7년(520)에는 율령을 반시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주자지질(朱紫之秩)을 정했다. 즉위한 후 항상 불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므로 왕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도(阿道)의 지극한 바람을 생각해 신하들을 불러 묻기를 "성조 미추왕께서는 아도와 함께 처음으로 불교를 펴려 하셨지만 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이후로) 능인(能仁·석가)의 묘한 교화가 막혀 행해지지 못했으니 나는 매우 슬프게 생각하오. 마땅히 큰 가람을 세우고 다시 상(像)을 조성해 선왕의 공적을 따라 좇으려 하는데 그대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고 했다. 대신 공알(恭謁) 등이 간하기를 "근자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다 이웃 나라의군사가 국경을 침범해 전쟁이 쉼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을 괴롭히는 공사를 일으켜 쓸데없는 집을 지으려 하시나이까"라고 했다. 왕은 좌우가 믿음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탄식하며 이르기를 "과인이 부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왕위를 이어 받으니 음양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안치 못한 것 같소이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도 (내 뜻을) 거슬러 따르지 않으니, 누가 능히 묘한 법의 방편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수 있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16년(529)에 이르러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이차돈<異次頓이라고도 하며 거차돈<居次頓>이라도고 한다)은 나이 26세이니 정직한 사람으로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깊어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떨쳤다. (왕의) 큰 소원을 돕고자 몰래 아뢰기를 "왕께서 만일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신은 청하옵건대 거짓을 왕명이라 속여 유사(有司)에 전하기를 '왕께서 불사(佛事)을 창건하려 하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반드시 간할 것이니 (이때 왕께서) 바로 칙령을 내리셔서 '나는 그런 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댔는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틀림없이 신의 죄를 추궁하고자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복종할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그들은 이미 완고하고 오만하니 비록 그대를 죽인다 한들 어찌 복종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아뢰기를 "대성(大聖)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것이오니 만일 소신을 베시면 마땅히 천지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있다면 누가 감히 오만스럽게 거역하겠습니가"라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본디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려 하거늘 도리어 충신을 해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몸을 희생해서 인(仁)을 이룸은 신하된 자의 큰 절개이거늘 하물며 불법이 영원히 빛나고 왕조의 영원한 결속을 위해서라면사 죽는 날이 바로 태어나는 해가 될 것입니다"고 했다. 왕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베옷을 입엇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라고 하며 이에 염촉과 함께 큰 서원을 깊게 맺었다.드디어 그 뜻을 전해 말하기를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니 집사들은 칙령을 받들어  일을 일으키라"고 했다. 조정 신하들이 과연 면전에서 그 일에 관해 쟁론했다. 왕은  이르기를 "나는 그런 영을 내린 적이 없노라"라고 했다. 염촉이 이에 크게 외치기를 "신이 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법을 행하면 온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 참으로 경제에 유익함이 있다면 비록 거짓으로 국령을 꾸며냈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물었다. 모두 이르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아이 머리에 누더기 옷을 입고 괴기한 의론을 일삼으니 정상의 도가 아닙니다. 만일 경솔히 그 말을 따른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죽을 죄를 범할지라도 감히 칙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염촉은 분명히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대개 비상한 사람이 있는 연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불교는 심오하다 하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완강해 거절할 수가 없고 경이 혼자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말을 다 들을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형리에게 넘겨 목을 베라고  했다. (염)촉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나는 법을 위해 형벌을 받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 만일 신령함이 있으시다면 신이 죽을  때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고 했다. 마침내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끊어진 자리에서는 흰 젖이 욧솟음쳐서 높이 수십길로 올랐다. 햇빛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선느 아름다운 꽃이 내렸으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임금과 신하 백성 할 것없이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이 법을 존중하여 목숨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서로 바라보며 슬피 울었다. 그리고는 유체를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하고 예배했다. 그때 임금과 신하들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밝으신 신령은 우리를 죽이소서"라고 했다. 군자는 이르기를 "대성인은 천 백년만에  만나게 된다. 인(仁)은 길상을 발하고 의는 상서를 움직인다. 천지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일월에까지 뻗쳤으며 귀신을 감동시켰거늘 하물며 사람들에게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스스로 도를 믿는다면 천지도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을 이룩함을 귀히 여기고, 업은 넓힘을 귀히 여기나니, 그러므로 진실로 큰 원이 있으면 태산도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게 된다. 장하구나 그의 죽음은 그것을  얻었도다"고 했다. 이해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했다(국사 및 여러 옛 전기를 참고하여 생각하며 술한다).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내가 동도(東都)에 가서 놀 때 금강산 마루에 올라 외로운 무덤과 짤막한 비석을 보고는 슬피 울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날 산인들이  회식하려 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오늘이 바로 우리 사인의 기일이라 했다. 또한 떠남이 오래일 수록 생각은 더욱 깊은 것이라 하겠다. 아도비를 살펴보면, 법흥왕은 출가하여 법명은 법운, 자는 법공이라 했다고 돼 있지만, 지금은 국사와 수이전을  참고하여 두 개의 전기로 나누었으니, 옛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찬하여 말한다. 대개 나라 임금이 아랫 일을 일으킴에 있어서는 이루어 놓은 일을  지킬 수는 있어도 시작하기를 우려하는 일은 꾀하기 어렵다. 더구나 시기가 이롭지 못함과 믿고 믿지 않음에 달려 있음이랴. 원종은 비록 불법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본원력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또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에 힘입어 능히 미리(美利)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여 마침내 한나라 명제와 수레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위대하고 위대함이여. 여기에 무슨 잔말이 있겠는가. 양나라 무제에게 그를 비교함은 잘못이다. 무제는 임금의 몸으로 대동사(大同寺)의 사노(寺奴)가 되어 제왕으로서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지만 법공은 이미 왕위를 사양하여 그 후사를 튼튼히 해놓고 자기 스스로 사문이 되었으니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염촉의) 경력은 소위 왕과 비구는 몸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음을 (보여주었다). (왕이) 환상의 구름을 쓸어 헤치고 본성이 공한 부처님의 지혜의 빛을 발하면서 그것을 품고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염촉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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