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ho'sWho in Ancient Korea

봉상왕(烽上王)

by taeshik.kim 2018. 3. 13.
반응형

고구려 제14대 왕이며 생년을 알 수 없고, 재위기간은 292∼300년이다.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臿矢婁)라 한다. 서천왕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이었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데서도 아랑곳없이 대규모 공사를 강행하다가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쫓겨나 자살했다. 봉산원(烽山原)에 묻힌 까닭에 시호가 봉상이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조 : 봉상왕(烽上王)은 이름이 상부(相夫)<삽시루(歃矢婁)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의 태자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23년에 죽자 태자가 즉위했다.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諸父]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 보게 되자, 의심하여 음모로 죽였다. 국인들이 말했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지금 그가 죽으니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 눈물을 뿌리고 서로 문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가 침입해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감으로써 적을 피하려 했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자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사실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거의 따라잡게 되었으므로, 왕은 두려워했다. 그때 신성 재(新城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해 물러갔다. 왕이 기뻐하고 고노자에게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식읍으로 주었다. 9월에 왕은 그 아우 돌고(固)가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자살케 했다. 국인들은 돌고에게 죄가 없었으므로 애통해 했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들판으로 달아났다.  3년(294) 가을 9월에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해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니,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모용씨가 군대가 날래고 강해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했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으니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7년(298) 가을 9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치니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에 왕은 궁실을 증축하니 극히 사치하고 화려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곤핍해 졌으므로, 여러 신하기 자주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못했다. 8년(299) 가을 9월에 귀신이 봉산(烽山)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9년(300)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8월에 왕은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인 자들을 징발해 궁실을 수리하니,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일에 지쳐서 그 때문에 도망쳐 흩어졌다. 창조리가 간했다. “재난이 거듭 닥쳐 곡식이 자라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려,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서 뒹구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들을 몰아 토목 일로 고달프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부모된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왕은 화내며 말했.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다.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가로채려고 하는구나.”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국상의 자리를 잠시 채우고 있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칭찬을 가로채겠습니까?” 왕은 웃으며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겠느냐? 다시는 말하지 않기 바란다.”고 하였다. 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두려워, 물러나와서 여러 신하와 모의해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이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며, 두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봉산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왕이라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4대 봉상왕(烽上王)은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相夫)이다. 임자년에 즉위해 8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49(열전 제9) 창조리 :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는데 그때 모용외(慕容)는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의 군사가 강하여 여러 차례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는 어질고도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침략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 그를 신성(新城)태수로 삼았다. 그 후로 모용외가 다시 침범하지 않았다. 9년(292) 가을 8월에 왕이 국내의 나이 15세 이상 장정 남자를 동원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이 식량 부족과 부역에 시달려 이로 인해 유망하게 되니 창조리가 간하였다. “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길을 잃어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고 어린이와 늙은이는 구렁텅이에 뒹구니 지금은 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 공사에 시달리게 하니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물며, 이웃에는 강한 적이 있어 우리의 피폐함을 틈타 쳐들어온다면 국가와 백성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 왕이 성을 내면서 말하였다.“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 바라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의 중함을 보여 주겠는가? 지금 상국(相國)이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창]조리가 말하였다.“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어진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국상의 자리를 이어 받았으니 감히 말을 아니 할 수 없을 뿐이지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합니까? 바라건대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였다.조리가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을 알고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폐위할 것을 모의하니 왕이 면할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 즉위년 : 미천왕(美川王)<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을불(乙弗)<우불(憂弗)이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咄固) 아들이다. 앞서 봉상왕이 아우 돌고가 배반할 마음이 있다 의심해서 그를 죽이니, 아들 을불은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반응형

'Who'sWho in Ancient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思道)  (0) 2018.03.13
구륜(仇輪)  (0) 2018.03.13
창조리(倉助利)  (0) 2018.03.13
서천(西川)  (0) 2018.03.13
을지문덕(乙支文德)  (0) 2018.03.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