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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북위 탁발선비 알선동 유적 축문 탑본 北魏拓跋鮮卑嘎仙洞遺址石刻祝文搨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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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박물관 북위 특별전 



嘎仙洞은 현재의 우리 발음이 알선동인 반면 중국어, 이른바 문화어 기준으로는 Gaxiandong 가셴동이라

이 알선동은 그 존재가 이미 북위시대 역사를 정리한 위서魏書에 출현하고, 나아가 저 기념비를 새기게 된 내력과 그 축문 역시 이 위서에 적혔으니, 그만큼 이 사건이 그네들 역사에서는 중요하다 위서 편찬자들이 판단했음이겠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근자 개막한 북위 특별전 첫 머리에는 그 북위 시발을 이루는 부족 혹은 정체政體가 선비鮮卑이며, 개중에서도 그네들을 구성한 여러 부족 중에서도 탁발拓跋이라는 성씨를 썼다 해서 탁발씨拓跋氏라 일컫는 데라

그 시원을 알려주는 중대 흔적이라 생각했음인지 그 탑본을 첫머리에 내걸고는 이를 준거로 삼아 탁발선비가 훗날 낙양에 정착하기까지 장구한 이동로를 지도로 적기했으니


알선동 명문 탑본 


1980년에야 발견된 이 축문 탑본 사진을 제시하고 그것을 정서체로 풀어보면 아래와 같다.

가셴동 유적 축문 탁본
嘎仙洞遺址石刻祝文搨本
Rubbing of the Stele in Gaxiandong
후룬베이얼박물원

維太平真君四年癸未歲七月廿五日
天子臣燾使謁者僕射庫六官
中書侍郎李敞傅菟用駿足一元大武
柔毛之牲敢昭告于
皇天之神啓壁之初祐我皇祖于彼土田
歷載億年聿來南遷應受多福
光宅中原惟祖惟父拓定四邊慶流
後胤延及冲人闡揚玄風增構崇堂剋
翦凶醜威暨四荒幽人忘遐稽首來王始
聞舊墟爰在彼方悠悠之懐希仰餘光王
業之興起自皇祖綿綿瓜瓞時惟多祜
歸以謝施推以配天子子孫孫福祿永
延薦于
皇皇帝天
皇皇后土
皇祖先可寒配
皇妣先可敦配
尙饗 東作帥使念鑿

본래는 말할 것도 없이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로 적어가는 한문의 전형적인 패턴을 현재의 우리한테 익숙한 왼쪽에서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바꾼 것이라

유의할 점은 줄바꾸기가 단순히 글자가 차서가 아니라 공격空格 피휘避諱라 해서 존숭의 뜻에서 그런 존숭을 표해야 하는 단어는 줄을 바꾸거나 그 앞에다가 빈칸을 둔 흔적이 완연하다는 것이니, 그런 공격 피휘 글자 혹은 구절은 푸른색 고딕으로 표시했다.

이걸 보면 어째 광개토비 냄새가 서체에서 물씬하다. 열라 악필이다. 



이를 온전한 문장으로 죽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참고로 한문은 요새와 같은 끊어읽기가 없어 저 전체가 한 문장이라 실은 아래와 같이 이해하고 접근하며, 죽 문장은 이어서 번역해야 그네들 본래 뜻에 더 가깝게 다가선다.

維太平真君四年癸未歲七月廿五日天子臣燾使謁者僕射庫六官中書侍郎李敞傅菟用駿足一元大武柔毛之牲敢昭告于皇天之神啓壁之初祐我皇祖于彼土田歷載億年聿來南遷應受多福光宅中原惟祖惟父拓定四邊慶流後胤延及冲人闡揚玄風增構崇堂剋翦凶醜威暨四荒幽人忘遐稽首來王始聞舊墟爰在彼方悠悠之懐希仰餘光王業之興起自皇祖綿綿瓜瓞時惟多祜歸以謝施推以配天子子孫孫福祿永延薦于皇皇帝天皇皇後土以皇祖先可寒配皇妣先可敦配尙饗東作帥使念鑿

이를 한성백제박물관 안내판에서 옮긴 것을 내가 조금 손을 보았으니 다음이라

태평진군太平真君 4년 계미(443) 7월 25일에 하늘의 아들이자 신하인 도燾(북위 세조 태무황제 탁발도 北魏世祖太武皇帝拓跋燾-인용자)가 알자복야謁者僕射이자 고육관庫六官인 중서시랑中書侍郎 이창李敞과 부두傅菟를 보내 빠르고 훌륭한 말과 제사용 소, 양을 제물 삼아 황천皇天 신께 감히 아뢰오니

(천지가) 계벽啓壁(개벽開闢)할 적에 이 땅(알선동 일대 주변 땅)에서 우리 조상을 도우시어 긴 세월이 지나 마침내 남쪽으로 옮기고, 많은 복을 받아 중원을 성덕으로 널리 다스리다 오직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사방 변방을 개척하고 안정케 하니 그 경사로움이 후손으로 이어져 저에게까지 내려와 현풍玄風을 널리 밝히고 높은 묘당을 더 세우는가 하면 흉악한 무리를 이겨 없애매 사방으로 그 위엄이 미쳐 먼 나라[幽人] 사신이 길이 멀다 않고 머리 조아리며 내조해 처음으로 우리 조상 옛 터가 이곳에 있음을 듣게 되었으니

아득히 먼 옛날을 생각하며 남은 은덕을 우러러 보고자 하나니 왕업의 성함이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어 끊이지 않고 자손이 번성한 것은 때 맞춰 하늘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알선동으로) 돌아와 감사하며 베풀고 받들어 하늘에 바치오니, 자자손손에 복록이 영원히 이어지기 바라오며 위대하신 하늘의 신과 위대하신 대지의 신께 제사를 올리며 조상 선가한先可寒과 황후 선가돈先可敦을 배향하오니, (하늘이시어 땅이시어) 흠향하옵소서. 동작수사東作帥使인 염念이 새깁니다.

이 명문은 여러 모로 북위 혹은 선비 탁발부 역사를 증언하는 1급 사료라 해서 주목되지만, 유의할 점이 많다. 무엇보다 이 명문을 알선동에다 새긴 때가 5세기 중엽이라, 이 무렵이면 이미 북위가 북방 패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할 때라, 무엇보다 그 정체성 확립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런 목적에서 그 왕조 출현 혹은 시발이 되는 곳을 찾아 그곳을 신성화함으로써 그 연원이 유구하며 무엇보다 천지신명이 도왔음을 이데올로기로 포창해야 했으니, 그런 목적에 딱 부합하는 일이 탁발선비 출발지점 확인이고 그 신성화였다.


이를 증거로 진짜로 탁발선비가 저 알선동 혹은 그 인근 어딘가에서 출발했다는 믿음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저 명문에서 말하듯이 탁발선비 출발선이 저 동굴이라는 것은 수백년이 흘러 북위에 조공한 유인幽人이 알려준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

안 봐도 비디오라, 이 유인이라 표현된 북방 어느 민족이 황제한테 잘 보인다면서 "너 너희 조상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르제? 우리는 안데이. 그곳이 바로 이곳인기라" 했으니, 그러면서 지목한 데가 실은 지금의 알선동이라, 이걸 듣고 가만 있으면 바보 되니 탁발도가 "그래? 거기가 어데고? 니가 안내할 수 있나?" "있습니데이 여부가 있습니꺼?" 하고는 안내서 간 데가 바로 알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황제 명을 받고 저곳을 간 사신들은 돌아버리는 줄 알았을 것이다. "씨불 하필 나야? 왜 내가 가야하는데? 이 더위에?"

저걸 새긴 시점이 음력 7월이라, 졸라 더웠을 것이라, 땀 삐질삐질 흘리며 바리바리 선물 싸들고 저곳을 향해 북상했으니, 저 길을 행차한 중서시랑 이창은 그 유인이라는 족속 사신을 패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알선동유지 마애각석축문嘎仙洞遗址摩崖石刻祝文은 동굴 입구 전청前厅 서쪽 15미터 지점 석벽에 있으며 명문을 새긴 각석 구간만 보면 通高 90센티미터,너비 120센티미터이며 글자는 19행이고 각 行은 12글자 내지 16글자를 새겼지만 불균등한 것은 앞서 말한 피휘 공격으로 말미암았다. 全文 201글자다.

알선동 동굴은 천연 산에 뚫린 동굴이며 그 입구는 半山腰峭壁之上에 위치하고 지표에서 25미터 지점이다. 전형적인 배산면수背山面水이며,동굴 입구는 서남 방향으로 뚫렸다. 안쪽 규모를 보면 남북 길이 120미터에 동서 폭 약 28미터이며 지붕까지 높이는 20여 미터가 된다. 전반으로 보아 삼국형이다.

입구는 너비 20미터에 높이 12미터다. 내부는 전청前厅、대청大厅、고청高厅、후청后厅의 4개 부분으로 나뉠 수 있으며, 내부 면적은 2천 평방미터. 길이 40미터, 너비 8~13미터, 높이 8~12미터 구간은 탁발선비가 이곳을 인공개착해 석굴사石窟寺로 만든 구간이지만 미완성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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