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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불교문화재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by taeshik.kim 2018.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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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재)만해사상 실천선양회가 발간하는 잡지 《불교평론》 36호(2008년 10월 10일)에 투고한 글이다. 


불교문화재 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김태식 연합뉴스 기자


[36호] 2008년 10월 10일 (금) 김태식  taeshik@yna.co.kr


1. 잘못된 진단과 처방 


이 글을 쓰는 7월 20일은 일요일임에도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분쇄하고자 정부와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그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보도에 따르면 독도 수호를 위해 해저 광물질 조사단 구성, 운영과 국민에 대한 독도 접근권 보장, 해양호텔 건립을 비롯한 독도 관광상품 개발 등의 ‘독도 유인도화(有人島化)’가 그 핵심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당ㆍ정은 현재 독도에 주둔한 전투경찰을 철수시키는 대신, 해병대를 투입하는 방안도 오갔다는 말도 들려온다. 다만 해병대 투입 문제는 우리 스스로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대외에 선전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다고 한다.


나는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이런 독도 대응을 볼 때면, 진단과 처방 모두, 아니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진단은 차치하고라도 처방만 보건대, 저런 논의처럼 과연 우리가 ‘독도 유인도화’로 골자를 잡을 수 있는 실효적 지배 조치로 독도 정책을 선회한다고 해서 과연 일본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을 누그러뜨리거나 분쇄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담하거니와 설혹 우리가 독도에다가 해병대를 항시 주둔시킨다고 해서, 나아가 그 주변 일대를 매립하여 일본 오사카의 간사이 공항, 나아가 인천공항 같은 시설을 만든다 해도, 결코 일본은 독도가 그네들 영토라는 주장을 굽히거나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 열 손가락 다 장을 지져도 좋다.


그러면서 나는 적어도 1945년 이후 독도를 우리가 점유 중이며, 그렇기에 그에는 한국 경찰력이 상시 주둔 중이며, 나아가 독도 전체 18만 7554㎡는 ‘독도 천연보호구역’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11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실효적 지배’의 증거 아닌가, 이보다 더한 ‘실효적 지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되묻기도 한다.


결론은 하나다. 진단이 잘못되니까 처방도 잘못일 수밖에 없다.


이 비슷한 사례는 같은 일본이 개입한 소위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있다. 이 또한 독도 문제처럼 주기를 방불하면서 재현하거니와, 그때마다 그 대증(對症) 요법으로 항용 내세우는 것이 역사교육 강화이다. 이 역사교육 강화는 마침 소위 ‘인문학 위기’와 맞물리면서 그것을 선전하는 역사학계와 언론, 시민단체, 심지어 정부까지 주동이 되어 정말로 일본의 역사왜곡이 우리의 역사교육이 강화되지 않은 데서 말미암았다는 결론을 도출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한답시고, 대입 수능시험이나 각종 공무원 시험, 혹은 입사시험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한다거나, 일선 교육현장에서 역사 수업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연결되곤 한다. 이번과 같은 독도 사태를 정부 외교력의 무능으로 치부하는 여론은 급기야 독도 대책본부가 신정부로 권력이 이양하면서 대책 없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끄집어내면서, 마치 그것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었더라면 이번과 같은 독도 사태는 없었을 것이라거나, 혹은 그에 기민하게, 그리고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호도된 결론까지 도출하고 마는 것과 비슷하다. 여담이지만 이런 ‘조작된 여론’은 조만간 국책 독도문제연구소 비슷한 기구를 출범하는 데 일조하리라.


장담하거니와, 우리가 역사교육을 강화한다 해서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왜곡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른 자리를 빌려 내가 누누이 강조한 말을 여기서 되풀이하자면 우리의 역사교육 강화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전혀 무관계하다. 진단도 잘못되고 처방도 잘못되었다. 탈이 난 맹장을 고쳐야 할 판인데 뇌종양을 제거하는 꼴이 벌어진 셈이다. 


2. 남대문이 닫은 성균관 


화마(火魔)에 휩싸인 남대문(사진...생략) 


진단과 처방, 그 잘못된 만남은 문화유산이라고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하기야 독도 또한 그 일종인 천연기념물이니, 문화재라는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겠거니와, 작금 문화유산계 최대 사건이라 할 만한 남대문 방화 또한 그런 사례에 속한다. 이 남대문이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불에 타던 그 시점 나는 테헤란발(發) 인천행(行)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약 9시간이 걸린 이 비행시간 직전, 테헤란공항에서 적어도 내가 몸담은 문화유산계는 이렇다 할 만한 일이 없음을 확인하고 출발한 내가 인천에 발을 디뎠을 때 날아든 소식은 남대문이 간밤에 불탔다는 벽력이었다. 나는 그 대상이 ‘남대문’이란 소식을 집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남대문 시장을 말하는 줄로 알았다. 그것은 ‘숭례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덜 익숙해서가 아니라,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국보 제1호라는 남대문이 불타 내릴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나 서울 시민도 그랬으리라. 그럼에도 엄연히 불타 내린 대상은 서울 성곽 4대문의 정문(正門)인 남대문이었다. 더욱 정확히는 내려앉은 것은 남대문의 문루(門樓)였지만, 그것이 문루건, 아니면 그것을 포함한 남대문 전체건 무에 중요하랴. 다만 중요한 것은 남대문이 불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언론인으로서 문화유산계에 꼬박 10년을 채운 나에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 직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어디 있는 줄도 모르던 사람들이 문화유산 애호가를 자처해 등장하는 현상은 곰곰 생각하면 문화유산 그 자체를 위해서는 그리 나쁠 것도 없으리라. 나아가 그런 ‘냄비 현상’이 때로는 문화유산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던 것은 남대문이 난데없이 정쟁(政爭)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남대문은 그 관리권이 서울시, 더욱 정확히는 서울 중구청에 위임됐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대통령 취임을 눈앞에 둔 대통령 당선자는 서울시장 출신이었고, 더구나 그가 서울 도심 무인도처럼 남은 그것을 시민에게 돌려놓은 주인공이었으며, 현재의 서울시장 또한 조만간 집권당이 될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이에 더해 서울 중구청장 또한 한나라당 소속이다.


그래서인지 예비야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反)예비여당 세력들은 집요하게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무분별한 남대문 개방이 이와 같은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친정부 성향을 유지하던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 또한 이에 가세해 공세를 가중했다.


이에 맞서 예비여당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측은 한편으로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그 맞대응 카드로 현 정부 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남대문과 같은 국가 지정 문화재 최종 관리권은 중앙정부에 있고, 더욱 구체적으로는 문화재청장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 이들은 조만간 물러날 노무현 대통령 대신에 유홍준이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당시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결국 불명예 퇴진했다.


마침 남대문 화재 기간에 단행한 해외 유럽 여행이 외부 찬조를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이 부각됨으로써, 불타 내린 남대문을 안고서 한때는 부총리급 차관급 청장으로 불리던 유홍준은 낙마했다. 그의 낙마는 한국 문화유산 정책의 총체적 부실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일련의 사태 전개를 목도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낙담하곤 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개방과 방화는 직접 관계가 전혀 없으며, 나아가 이번 사건에 유홍준이 책임질 일이라고는 실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강조하거니와 남대문이 방화의 대상이 된 것은 그것이 무분별한 개방이 이뤄졌기 때문이 아니다.


남대문은 이명박 서울시장 재임 당시 개방이 이뤄지기 전에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실제도 그러했다. 80년대 한국사회를 풍미한 최인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1984)>을 보아도 남대문은 부랑인의 소굴로 등장하며, 이곳에서 심지어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도 등장한다.


나아가 남대문 관리책임자는 서울 중구청장이다. 문화재청장은 그에게 그런 관리권을 위임했을 뿐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감독권이라는 문제가 남기는 하나, 그래도 남대문 방화에 책임을 진다면, 그것은 중구청장이지 서울시장도 아니며, 대통령도 아니며, 문화재청장도 더더구나 아니다. 이것이 현행법이다.


그럼에도 ‘무분별한 개방’이라는 슬로건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암암리에 남대문 방화사건은 정말로 그로 인한 것인 줄 모두가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에 나는 몇몇 자리를 빌려 개방과 방화는 관계가 없고, 나아가 이로 말미암아서 개방이 대세인 문화유산이 국민과 시민에서는 더욱 멀어져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애초에 종묘도 범행 대상으로 생각했으나 그곳은 경비가 삼엄하고 접근도 어려워 남대문을 골랐다.”라는 70대 방화범의 경찰 진술은 위력이 그만큼 컸다. 강조하거니와 남대문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근다 해서 저와 같은 방화에서 남대문을 구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남대문 사태는 무엇을 불러왔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두 가지 새로운 풍경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성균관 문을 닫아 버렸다는 사실이다. ‘무분별한 개방’이 방화 혹은 화재를 부른다는 이 논리가 먹혀들었음인지 남대문으로 인근 중구청이 곤욕을 치르는 장면을 목도한 종로구청은 그 이전에는 개방하던 성균관 문을 닫아 버린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조차 담그지 못한 셈이다.


녹아내린 낙산사 동종 남대문이 낳은 또 다른 풍경은 소방 물대포를 든 스님들을 등장케 했다는 것이다. 우리 사찰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킨다 해서, 언론매체를 불러놓고 소방훈련을 실시하는 풍경이 어느덧 낯설지 않게 되었다. 


3. 낙산사 화재 


이런 말 하는 나를 부디 용서해 달라. 구경거리 중에 불구경, 싸움 구경이 제일이라 하는데, 그 여하(如何)한 실상을 나는 2005년 낙산사에서 보았다. 비록 남대문 화재 순간은 이란에 있는 바람에 놓쳤으나, 낙산사가 불타는 ‘장관’을 나는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때는 4월5일, 공교롭게도 식목일이었다. 지금은 공휴일에서 제외됐으나 그때만 해도 공휴일이었는데,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회사에 출근해 있었다. 양양 일대 산불이 나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라, 담당 기자들은 고생하겠구나 하고 조금은 ‘느긋하게’ 산불 진행 과정을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시청’하던 나는 그 불길이 갑자기 낙산사로 덮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았다.


낙산사가 불타 내리는 광경은 그 자체만큼은 ‘장관’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문화유산계 투신 이후 문화유산에 대한 내 신념이랄까 생각이 확 바뀌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 나는 문화유산이라면 무엇보다 ‘보존’이라고 입에 달고 다녔으며, 그래서 훼멸 일보 직전에 처한 문화유산의 ‘구출’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고, 그 일환으로 급격한 도시화에 파괴 일보 직전에 처한 서울 풍납토성을 지킨답시고 나름대로는 부산을 떨었지만, 이 낙산사 화재는 어쩌면 그것이 일순간에 아무 소용이 없을 수도 있으며, 그렇기에 그렇게 구출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나에게 얼마나 충격파를 주었는지는 몰라도,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문화유산 현장을 가면, 반드시 방재시설이 어디에 어떻게 구비되어 있는가를 적어도 한 번쯤은 따지게 되었다. 나아가 발굴현장에 가서도 그에서 무슨 새로운 성과가 나왔는지, 그리고 그에 더불어 이제 그렇게 나온 유적과 유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조금은 진지하게 묻게 되었다.


낙산사 화재는 다른 무엇보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을 녹아내린 엿가락 같은 앙상한 잔해로 남겼다.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왕이 그의 아버지인 세조(수양대군)를 위해 제작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해서 만들었다는 높이 158㎝, 입지름 98㎝인 이 범종 잔해는 화재 6일 뒤인 4월 11일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져 공개됐거니와 그 처참한 몰골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아가 화재 당시에는 현장을 둘러보지 못했지만, 그 얼마 뒤 낙산사 현장을 방문했을 때, 그 황량함이란 형언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이 낙산사 화재는 문화유산, 특히 그 태반을 점거하는 불교 문화유산이 처한 상황을 재점검케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유야무야되어 버리고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은 남대문 화재로 재발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미 낙산사 화재 때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 애호가가 양산되었던가. 평소에는 어디 있는 줄도 모르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열렬한 문화유산 애호가로 돌변해 각종 언론매체에 등장해 사자후를 토하면서 문화유산을 이 상태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공염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2005년 낙산사는 남대문과 결합하면서 그 위력을 배가했다. 예컨대 낙산사 때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 ‘문화재 방재의 날’을 탄생케 했는가 하면, 속내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건축 문화유산만큼은 방재시스템 전반에 대한 실태 점검과 관련 설비 구축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4. 성보 문화유산의 수난 


내가 알기로 불교계 일부에서는(전체인지도 모른다.) 문화재, 혹은 문화유산 개념에 알레르기 비슷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래서 그것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말이 이른바 ‘성보(聖寶)문화재’다. 문화재이기 이전에 신앙 대상물이라는 대목을 강조한 개념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문화유산에서 불교 성보문화재가 차지하는 나름의 독특한 위치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성보문화재 대다수는 그 자체의 희귀성과 골동성, 나아가 재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여타 일반 문화유산과 결코 유리할 수 없는 공통점을 아울러 지닌다. 더불어 ‘성보문화재’라는 개념은 불교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 그리고 그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곧잘 여타 문화유산과는 사뭇 다른 충돌을 야기하곤 한다. 특히 이 후자의 논란은 성보문화재를 사찰 대웅전과 같은 성보의 공간에서 박물관과 같은 보다 안전한 공간으로 이치(移置)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논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불교 문화유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거대한 고민은 다른 문화유산과의 공통성과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아울러 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해 보라는 자리가 지금 이 순간, 이 지면을 통해 주어졌지만, 그에 대한 명쾌한 방안을 나는 낼 수 없다. 다만 앞서 지적했듯이 제대로 된 진단이 있고서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에 대한 단견(短見)을 덧붙이는 한편, 내가 실제 현장에서 본 두어 가지를 소개함으로써 갈음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확실히 할 것은 ‘불교문화재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거나,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훼손, 인멸(湮滅) 등의 위험에 처한다는 절박감을 전제로 한다. 이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따라서 우선 진단이라는 측면에서 불교 문화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훼손, 인멸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진단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크게 천재지변과 인재의 두 가지로 나눈다면 전자로는 지진이나 벼락, 산불과 같은 화산 폭발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 외 홍수가 있을 터이고 요즘 특히 석조문화재에 문제가 되는 산성비도 있으며 목조문화재에는 치명적인 흰개미도 있다. 황룡사 목탑은 이미 신라시대 창건 이후 지진이나 벼락으로 여러 차례 훼손되었다가 몽골 침략의 병화에 결국 잿더미로 변했으며, 최근 석가탑 중수기 공개로 드러났듯이 석가탑과 불국사 또한 11세기에 빈발한 지진으로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은 이젠 하늘 탓만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한반도는 지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땅이라 치부되었으나,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미 신라 문무왕 시대에 경주 토함산이 갈라져 불길을 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아도 한반도는 지진 피해가 빈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즘은 내진 설계와 같은 공법으로 그 피해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조처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실제 문화유산 복원 현장에서 이런 공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낙산사를 삼킨 산불을 볼 때, 이에서 성보 문화유산, 특히 일단 유사시에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부동산’ 성보문화재는 여전히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


더불어 적어도 ‘동산’ 성보 문화유산만 해도 일을 만나서야 허겁지겁 등에 메고 안전장소로 대피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법당을 떠나 더욱 안전한 공간으로 모시는 결단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 화마의 위험에서 대웅전 부처님을 업고 정신없이 뛰었다는 불교계 무용담은 이제는 그만 듣고 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보 문화유산은 문화재이기에 앞서 신앙의 대상이라는 ‘성보(聖寶)'라는 개념과 곧잘 충돌한다. 하지만 최근 큰 사찰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성보박물관’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성소(聖所) 아닌가? 왜 이런 공간에 ‘성보’를 모시는 행위를 ‘퇴출’로만 접근하려 하는지 나는 의아스럽기만 하다.


내 짧은 불교에 대한 상식으로 사찰 자체가 적멸보궁(寂滅寶宮) 아닌가? ‘성보박물관’을 이 적멸보궁 그 자체, 나아가 그 일부로 인식하는 일은 다름 아닌 불교계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들 성보박물관을 비롯한 성보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공간이 불교계 내부에서는 당당한 불교 건축의 일부로 인정하는 느낌을 주는 데 실패했다.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일이 시급한 것이 아니라, 이들 또 다른 적멸보궁을 성소화(聖所化)하는 데 주력해 봄이 어떨까 제안해 본다. 성보박물관이 대웅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나아가 누전으로 인한 화재 또한 심각한 문제로 대두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정확한 통계 수치는 없지만 화재 원인의 절반은 방화이며, 그 나머지는 이 누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누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사찰 주요 성보 문화유산에 설치된 전기설비는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첩첩산중 중턱에 똬리를 튼 우리의 여느 사찰을 볼 때마다, 주변의 치렁치렁한 전깃줄에 경악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그다지 현지 사정에 밝은 것은 아니지만, 이웃 일본에서는 적어도 지정 성보 문화유산에서 전기 설비를 찾을 수는 없었다. 컴컴하면 어떤가? 추우면 어떤가? 시방세계 어느 부처님이나 신통방통하다는 어떤 보살님도 한밤을 항상 대낮처럼 밝힐 것이며, 한겨울은 여름처럼 뜨겁게 달구라는 사자후를 토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천재지변만큼이나 문화유산, 특히 성보문화재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는 각종 인재가 있다. 남대문 방화는 분명 이에 속하지만, 도굴로 인한 피해 규모 또한 막대해 예컨대 불상의 복장(腹藏)은 남아 있는 게 외려 신기할 정도인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도굴 실태에서 불교계 내부 또한 썩 자유롭지 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요즘에는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불교계 자체의 각종 통제 시스템이 워낙 강해져 안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불교에 반대하는 신념이나 다른 종교에 의한 탄압 또한 파괴력이 만만치 않다. 회교 원리주의로 무장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의한 바미안 석불 파괴 사건은 우리에게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인천국제공항 입국로를 따라 얼마 전부터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모조품을 설치해 놓았지만, 이것이 우상숭배라며 철거하라는 협박성 편지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공항 당국자에게 날아들고 있으며, 그 옆을 장식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사진 또한 퇴출 위기에 몰려 있다. 더불어 최근에는 특정 종교 성직자가 태백산 천신단을 무단 훼손한 일도 있었다. 신념을 무기로 장착한 이런 배타적 행위는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없다는 데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부디 그들에게 자비(慈悲)와 화융(和融)이란 선근(善根)이 자라나길 빌 뿐이다.


이 인재라는 측면에서 최근 새롭게 부각한 사안이 이른바 문화유산에 대한 테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 세력에 의한 성보문화재 자체에 대한 파괴 행위도 있지만, 더욱 심각성을 더하는 일은 그런 공격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다른 의지를 관철하고자 애꿎은 문화유산을 선택하는 사례가 급증한다는 사실이다. 남대문 방화 용의자가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웃 일본에서는 이런 사례가 더욱 빈발해, 천황제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과거 천황 왕실이 건립한 불교 사원에 폭탄을 설치한 일도 있었다. 이에서는 한국사회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치부되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은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5. 방재시스템, 일본의 경우 


외국의 문화유산 방재시스템만을 둘러보기 위한 기회가 나에게는 지금까지 두 번이 주어졌다. 한 번은 낙산사 산불이 준 ‘선물’이고 나머지 한 번은 남대문 화재가 쥐여 준 자리였다. 두 번 모두 일본을 택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네들의 문화유산 태반이 우리처럼 목조물이며, 나아가 우리의 방재시스템이 일본의 그것을 모델로 삼고자 하며, 실제 일본에서 시도한 그 일부가 우리 문화유산 현장에서도 구동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일본 또한 문화유산 태반은 불교의 유산이었다. 물론 일본의 그것이 우리의 탈출구가 될 수는 없다. 그에 더불어 일본과 우리가 처한 문화유산 현실이 상통하는 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 입지조건이 현격히 다른 데가 많고 무엇보다 기후가 다르고, 지진과 같은 지리적 조건도 현저히 다르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문화유산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중요성을 나름대로는 체득하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2005년 첫 번째 탐방은 대한불교조계종 문화부가 기획한 와카야마현 진언종(眞言宗) 총본산 고야산(高野山) 일대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2008년 탐방은 명지대 건축문화연구소가 기획한 교토 일대를 둘러봤다. 이를 통해 일본에서는 국가가 지정하는 문화재들인 국보(國寶)나 중요문화재에 일본 고야산 고카와지(粉河寺) 본당 방재시스템 에 대한 방재시설 설치는 일본 문화재보호법이 규정하는 정책과 이에 의한 보조금 교부제도에 의해 시행됨을 확인했다. 그 일환으로 국가지정 문화재에 대한 사업비는 국고보조금으로 충당된다. 전체 사업비 중 보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게는 50%, 많게는 80%에 이른다. 재정이 상대적으로 튼튼한 사찰이나 문화유산 소유자에 대해서는 보조금이 적은 반면, 그럴 만한 자체 여력이 없는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국고보조금이 나온다고 했다.


2005년 현재 일본은 약 2,600건에 달하는 문화재가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이를 포함한 국가지정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연간 2천억 원(한화) 가량의 예산이 책정되고 있다고 전했다. 국고보조금 지원사업 대상은 설계도와 관련 예산서 등을 첨부한 신청서를 관계 당국에 제출해 그 심사에서 합격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건조물 문화재 방재시설로는 경보 설비와 소화 설비, 피뢰침 설비로 나뉜다.


이 중 화재 발생 사실 혹은 그 가능성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경보 설비는 소방법에 의해 설치가 강제화해 있다. 다른 설비는 강제되지 않는다.


실제 문화유산 방재현장에서 무척이나 인상적인 설비가 물대포였다. 2005년 고야산 일대 탐방에서 일본 현지 방재업체가 중요문화재인 고카와지(粉河寺) 본당(本堂, 대웅전)에서 그 실제 사용 상황을 재현했다. 남쪽을 바라보는 이 목조 기와 건축물은 두 개 건물을 마치 2층처럼 포갠 형식인데 전면 33m, 뒷면 25m에 높이는 33m에 이른다. 사찰 기록에 의하면 정덕(正德) 3년(1713)에 중건한 건물이다.


열 감지기는 건물 외부에서 발생하는 화재에는 대처가 곤란하다. 하지만 이곳에 설비된 열 감지기는 빛 센서를 이용해 옥내와 옥외를 막론하고 약 0.3㎡의 불꽃을 감지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다른 조명에 감지기가 오작동하지 않도록 적외선과 자외선의 두 가지 파장의 흔들림을 동시에 검출해 작동하도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고카와지 본당 외곽 주변에서 시행된 실험 결과 작은 불꽃에도 건물에 장치된 화재경보음이 요란스럽게 울려 대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서는 충분한 물과 그 저장을 위한 물탱크 시설이 확보돼야 하며, 이에 더해 그러한 물을 충분한 압력을 가해 적재적소에 쏟아 부어야 한다. 방재에는 맑은 물을 사용한다. 그 까닭은 문화재에 대한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라 했다.


‘방수총’이라 일컫는 물대포가 바로 시설을 쏘아 버린다면 막대한 손상을 낼 수 있으므로, 방수총은 방수 대상 건물에서 일정 거리에 떨어져 설치된다. 사정거리는 25m이며, 1기당 방수용량은 0.7파스칼 압력으로 분당 500~600ℓ를 쏟아내게 된다. 건물 주위를 돌아가며 배치된 방수총은 화재가 난 건물을 향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에워싸며 물을 쏘아 댄다. 고카와지 본당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일본 고야산 부동당 방재시스템 노즐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는 20m 이상을 하늘로 치솟아 마치 아치형 대문을 만드는 듯한 광경을 연출하면서 본당 지붕으로 떨어졌다. 치솟는 물길에 무지개가 형성됐다. 1분이 채 안 돼 본당 처마 끝에는 굵은 물줄기가 뚝뚝 떨어졌다. 이 장면 자체가 장관이었다. 이로 인해 일부 문화유산 현장에서는 이 방수총 출수를 관광상품화할 정도다.


이와 비슷한 방재시스템은 산 전체가 불교성지라 할 고야산 중심지에서도 체감할 수 있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곳에는 일본 국보 21건, 중요문화재 137건, 지방문화재 13건이 포진해 있으며, 이 중 건축물은 국보가 2건, 중요문화재가 18건을 헤아린다. 일본 국가지정 문화재 9%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 고야산 구역 중 단상가람(壇上伽藍)에 자리한 부동당(不動堂)과 그 인근 어영당(御影堂)에서 소방 방재시설 시연이 있었다. 부동당 주변에는 모두 5개에 이르는 물대포가 설치돼 있다. 하지만 본당과는 달리 지붕 마감재가 히노키 껍질이어서 화재에 더욱 취약하기 때문에 지붕 곳곳에 직접 물을 분사하는 시설을 장착했다. 방재용 스위치를 틀자마자 부동당은 온통 하얀 물 연기를 뿜어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용마루 양쪽 끝에 몇 개나 되는 수도꼭지 같은 시설이 있어 연방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붕 전체에 걸쳐 10여 개는 족히 될 만한 수도꼭지가 일시에 뿜어내면서 연출한 광경은 일대 장관을 방불했다. 이런 시설은 40년 전인 1965년에 설치됐다가 10년 전에 개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붕에 직접 방재시설을 설치한 이런 예는 일본에서도 이곳 부동당이 유일하다고 한다. 기술상 굉장히 까다로운 데다 설치에 따른 문화재 원형 훼손과 누수라든가 동파에 의한 건축물 훼손 가능성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장관은 어영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회(檜)나무 껍질로 지붕을 마감한 이 목조건물은 평면 형태가 5칸 4면의 정사각형으로 단상가람 구역에서는 부동당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평가된다. 이곳 방재시스템은 고카와지 본당과 흡사하게 건물 주변에 물대포를 설치했지만 ‘상향식 스프링클러’ 비슷한 별도 설비가 따로 있었다. 사각 건물 주변 바깥을 돌아가며 촘촘히 설치된 노즐을 틀어 대니 폭포수가 분출하는 듯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런 시스템이 이미 1965년에 설치됐다고 하니 부럽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림 1 일본 고야산 어영당 방재시스템(그림 생략)


올해 교토 탐방에서 진언종 총본산 고찰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닌나지(仁和寺)는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종무실을 중심으로 사찰 경내 세 군데에 마련한 화재경보실에는 모두 96개에 이르는 화재경보기 버튼이 있었다. 무려 96개소에 이르는 곳곳에 열 감지기를 설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벽면에는 소방서를 비롯한 관계 당국과 직통인 비상 전화기나 비상벨도 설치돼 있으며, 소화기도 다섯 대가 구비돼 있었다.


물론 열 감지기가 더러 오작동을 빚기도 하나 화재 경보 시 2~3분 안에 소방차가 출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더욱 부러운 점은 관할 소방서와 합동으로 매년 두 차례 실시하는 정기 훈련 외에도 사찰 자율의 방재훈련을 매년 10회 이상씩 한다는 말이었다. 이곳에서도 주요 건축물에는 물대포는 기본이었다. 이곳에서 인상적인 곳은 금당이다. 대낮인 데도 법당 안은 캄캄했다. 금당 어디에도 전깃줄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사실 닌나지가 이토록 철저하게 방재시스템으로 무장한 데는 아픈 역사도 한몫을 했다. 1993년 4월에 폭탄 테러와 1995년 고베 대지진 또한 그중 하나였다. 특히 닌나지에 대한 폭탄 테러는 일본 사회 전체에 충격이었다. 천황제 반대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닌자지 주요 목조문화재 세 곳에 대해 폭탄테러를 시도했다. 금당과 오중탑 등을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아 시간에 맞춰 터지도록 폭탄을 장치한 것이다. 일본 황실에서 세운 사찰이라 해서 이곳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폭탄은 터졌지만, 초기 진압에 성공함으로써 화마의 손길에서 문화재를 극적으로 건져 냈다. 


6. 두어 가지 제언


일본의 방재시스템이 우리보다 ‘선진’(先進)의 영역에 돌입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한국의 문화유산, 특히 불교 성보 문화유산에 그대로 통용될 수 없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방수총이니, 물탱크니, 스프링클러니 하는 시스템만 해도 주로 산간벽지에 자리한 우리의 사찰에는 맞지 않는 측면이 많다. 더구나 아무리 소방시스템이 철저하다고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남대문은 웅변으로 증명했다.


전통건축물 특유의 특성으로 인해 폭포수 같은 물을 퍼부어도 소용없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저런 설비는 있어야 한다. 나아가 제아무리 저런 시설이 우리의 지형적 조건에 맞지 않다고 해도 현대의 과학기술은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이에 관계 당국에서 낙산사와 남대문을 거울삼아 다양한 방재 매뉴얼이 마련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에 내가 무슨 말을 보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관계 당국이나 불교계에 두어 가지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있다. 첫째, 방재를 책임져야 할 원초적 책임자는 불교계라는 사실이다. 성보 문화유산은 모든 국민이 향유하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해당 불교계의 자산이기도 하다. 공공성을 띤 자산은 그 법률적 소유주가 우선 관리를 책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계 자체의 노력은 어느 정도인가 자문해 보건대 그다지 후한 점수를 매기기 곤란하다.


돌이켜 보면 낙산사와 남대문 사태에 불교계는 정부 당국을 향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 소리는 결이 다양하지만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세워 방재시스템 구축을 완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예산 투입을 요구한다. 이에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낙산사 이전에, 남대문 이전에 그런 방재 설비 구축을 위해 불교계 자체가 한 일은 무엇인가?


적어도 지정 문화유산만큼은 공공성을 띠었음을 부인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그 보존 관리에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함은 부인할 수 없지만, 혹여 이것만을 빌미 삼아 그 모든 책임을 국가에만 전가한 것은 아닌가? 국가가 책임지라는 말은 어쩌면 국민에 대한 협박이다. 정부 예산은 국민 세금이 원천이다. 정부 예산을 투입하라는 것은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에서 대두하는 역설은 종교는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면세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여타 국민이 국민의 의무 중 하나로 책임지는 납세의 의무에서 대체로 불교를 포함한 종교계는 면탈 대상이다. 정부와 국민에게 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기 전에, 아니 그와 더불어 불교계 자체의 이를 위한 몸부림을 우리는 보고 싶다. 정부가 먼저 예산을 줘야 불교계도 그에 보조를 맞출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 불가능하다. 왜 불교계 자체가 방재시스템을 구비할 수는 없는가?


둘째, 전깃줄은 뽑아 버려야 한다. 적어도 지정 문화재 혹은 그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성보 문화유산에 설치된 전깃줄은 철거되어야 한다.


셋째, 같은 맥락으로 불상을 비롯한 ‘동산’ 성보문화재는 더욱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 자리엔 21세기 부처님을 모시고 기존 부처님이 옮겨간 자리는 새로운 법당이 되어야 한다. 예컨대 성보박물관과 같은 시설은 ‘폼’만 내라고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이런 점에서 중국 측 문화유산 관리체계에서도 참고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적어도 내가 다닌 중국 고찰은 예외 없이 우리의 사적이나 지방문화재에 해당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나 성급(省級), 혹은 현급(縣級) 등의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있었다. 우리의 문화유산 관리체계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물론 불국사나 송광사처럼 일부는 명승지구와 같은 개념으로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긴 하지만, 이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문화재보호법을 손질할 이유는 그다지 없을 것으로 본다. ‘명승’이란 개념을 더욱 확대 적용하면 된다. 사찰 전체가 성보 문화유산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학술ㆍ문화재 전문기자.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연합뉴스 입사. 체육부, 사회부 등을 거쳐 1998년 이후 동(同) 문화부에서 학술ㆍ문화재 전문기자로 활동 중. 저서로 《풍납토성》(김영 사, 2001)과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2) 등이 있고, <봉선대전 (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 순수비>(《백산학보》68, 2004)를 비롯한 논 문 다수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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