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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산송山訟을 쓸어버린 조선총독부 묘지규칙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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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묘지규칙[221]

1) 종전의 폐풍
조선은 예로부터 묘지 존중의 관념이 깊었는데, 여기에는 여러 미신이 수반되어 선조의 묘지가 좋고 나쁨에 자손들의 화복이 결정된다는 풍수설이 견고하여 뿌리 뽑을 수 없는 관념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풍수가가 가리키는 묘지는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이를 얻으려 하였고, 얻을 수 없으면 남의 토지라고 해도 그것을 범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심한 경우에는 타인의 분묘를 발굴發掘하여 자가自家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적 지 않았다. 이로부터 범죄자가 속출하고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묘지와 관련된 민사 소송에서는 가산을 탕진하면서도 이를 다투었다.

그 결과 분묘가 도처에 산재하 여 풍속·교화 및 위생에 해를 끼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양호한 경지를 황폐하게 하고 민력民力을 소모시키는 것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1912년(明治 45) 6월 총독부령 제123호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墓地火葬場埋葬及火葬取締規則’을 발포하여 종래의 미신·누습을 타파하고, 이로부터 생기는 많은 범죄와 쟁송爭訟을 예방함으로써 민력의 육성을 도모하고자 했다. 

2) 묘지규칙과 그 실시
‘묘지규칙’에 의하면 묘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공공단체에서 설치하게 하고, 공동묘지 이외의 곳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동시에 묘지의 신설·변경이 나 폐지는 경무부장의 허가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하였다.

또 조선인은 예로부터 화장을 기피하여 전염병 사체도 모두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한편으로 화장료火葬料를 제한하여 화장을 장려하고 그 폐습을 점차 일소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 규칙은 다소 지나치게 엄격하여, 조선인의 관습·풍속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선인의 불평불만을 샀다.

이에 1915년(大正 4) 7월과 1918년(大正 7) 1월 약간의 개정을 거쳐, 1919년(大正 8) 9월 개정에서 이를 다소 완화했다.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조선에서 수백 년 내려온 옛 관습을 하루아침에 [222] 타파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규칙이 발포되자 근거 없는 소문들이 떠돌며 불만의 목소리가 각지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그 시행에는 주도면 밀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사전에 지방 관헌에게 주동자를 훈계하여 근신하게 하였고, 동시에 일반 인민에게는 법령의 취지를 간곡히 알렸다.

또 그 용지用地는 국유임야를 선택해서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마련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며, 이러한 준비에 기초해 각지에서 시행하기로 했다. 

1913년(大正 2) 9월 1일 먼저 경성부에서 시행하여 점차 각지로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1915년(大正 4) 3월 1일 충청남도를 마지막으로 모든 도에서 시행을 완료하였는데, 각지에서 특별히 서술할 만한 지장이 없이 마무리되었다.24) 

(제1기 데라우치 총독시대) 

출처 :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김민석·최은진·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219~220쪽 
 
***
 
이 묘지 개혁은 단군조선 이래 혁명과도 같다.

물론 저 규칙이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해서 산송이 일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네들 말마따나 저 규칙이 등장함으로써 산송을 둘러싼 폐습은 거의 사라져갔다. 

식민지시대 한 일이라고 덮어놓고 쌍심지 켜서는 안 된다.

또 항용, 저런 일은 일본이 아니었다 해도 대한제국이었다 해도 다 했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저건 혁명이었다.

한편 저 조치에 대해 저 역주본은 아래와 같은 주석을 했다. 

 

24) 조선의 일부 양반층은 이와 같은 묘지규칙에 거세게 반발하였다. 예를 들어 1915년 3월 경남 창녕 직교리의 마을 주민들은 묘지 신고를 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시위를 벌여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성근호 등 3명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양반층은 특히 공동묘지 외에는 매장할 수 없다는 것에 반발하였다. 묘지규칙 위반 건수 는 1917년 2,499건, 1918년 2,590건에 달할 정도로 사실은 반발이 거셌다(장용경, 1910년대 일제의 공동묘 지 정책과 조선인의 경험 , 《역사와 문화》4 19, 2010, 68~73쪽). 농촌의 양반층이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 으로 참여한 데에는 이와 같은 묘지규칙에 대한 반감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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