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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삼국사기의 엄정함, 고국원왕 전사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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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종병기 활 한 장면

 

고구려 제16대 왕은 죽은 뒤 받은 이름이 고국원왕故國原王, 혹은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 일컫는 이라, 본명은 사유斯由 혹은 쇠釗라 한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책봉되고 그 32년에 아버지 미천왕이 죽자 즉위했다.

이 분은 장장 41년 간이나 재위했지만 말년이 비참했다. 그해(371) 겨울 10월 백제왕 근초고와 그 태자 근구수가 이끄는 백제 3만 대군을 맞아 평양성에서 옹성하다가 류시流矢에 맞아 그달 23일 숨을 거두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그의 죽음을 분명 유시라고 적었다. 저 유시는 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때 쓰는 말이다. 백제군이 쏜 화살일 수도 있고 아군이 쏜 화살일 수도 있다. 

저 죽음을 두고 당연히 백제에서는 자기네가 죽였다고 선전했다. 그런 사실을 무엇보다 김부식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고국원왕본기에 삼국사기가 이르기를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했지만 지나친 말이다"고 분명히 밝혔다. 

삼국사기는 이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각기 상이한 기록을 처리할 때 세심히 다루었다. 

양측이 주장하는 고국원왕 죽음 원인이 분명히 다름을 알고 있었고, 그에서 가장 객관적이라 할 류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저 일을 두고 당대 기록으로 올라가면 당연히 고구려는 류시 혹은 자연스런 죽음을 주장했을 것이요, 백제는 당연히 그네들 혁혁한 전과로 기록했지만, 삼국사기는 저처럼 엄정했다. 

광개토왕 시대를 논급할 때 최우선은 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비가 아니라 삼국사기여야 한다. 후대 기록이라서 견강부회가 심해? 웃기는 소리 작작해라. 

당대 기록일수록 얼마나 많은 축소과장왜곡이 심한 줄 아는가? 

저 엄정함은 나오는 대로 지 꼴리는대로, 지 맘대로, 지 유리한 대로 지껄인 광개토왕비나 일본서기나 노동신문이 감히 넘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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