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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보(徐耕輔. 1771~1839)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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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4 15:55:51


台植注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관련 항목 문장 기술을 약간 손질해 재가공했다. 문장이 맘에 들지 않아 바꿔봤다. 더불어 내가 생뚱맞게 이 서경보를 다룬 까닭은 오늘자 기사에서 그의 중국 시선집 옥생관시수(玉笙館詩粹)를 다루게 됐기 때문이다.  


서경보(徐耕輔. 1771~1839)

1771년(영조 47)∼1839년(헌종 5).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임세(任世), 호는 묘옹(卯翁). 본관은 대구(大丘)다.

문헌공 서종태(徐宗泰) 현손이자 대제학 서유신(徐有臣) 아들이다. 이조판서 서영보(徐榮輔)는 그의 형이다. 어려서 서유로(徐有老)의 양자로 들어갔다. 음보(蔭補)로 기용돼 순창과 예천군수를 지내다가 1825년(순조 25)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대사성에 제수됐다. 


1827년 이조참의를 거쳐 1828년 전라도감찰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전라좌도암행어사 유성환(兪星煥)에게서 도내 정무를 게을리 했다 해서 탄핵받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됐다. 1832년 호군(護軍)으로 있다가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로 다시 발탁되고, 그해 형조판서로 임명됐지만 이번에는 우포장(右捕將) 김영(金煐)의 과실로 다시 파직됐다. 그해 말 동지사(冬至使)의 정사(正使)로 임명돼 이듬해 연경에 다녀온 뒤 병조판서가 됐다가 대사헌에 임명됐다. 헌종이 즉위하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지낸 공로로 가자(加資)됐다. 


1836년(헌종 2) 이조판서를 거쳐 1837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됐지만 영흥부(永興府) 선원전(璿源殿)에 봉안한 태조 영정이 찢기는 사건이 일어나 다시 파직됐다. 이후 공조판서와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묘옹집》, 편서로는 《기백편(己百編)》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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