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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성덕왕(聖德王)

by taeshik.kim 2018.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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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3대 왕(재위 702∼737)이며 태어난 해는 모른다. 본래 이름은 륭기(隆基)였지만 당 현종(玄宗)과 같아 흥광(興光)으로 개명했다. 신문왕(神文王)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神穆王后) 김씨(金氏). 재위 3년(704)에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 딸 성정왕후(成貞王后) 김씨를 비로 맞았지만 15년(716) 출궁케 하고 19년(720)에 이찬(伊) 순원(順元)의 딸을 납비하니 이가 소덕왕후(炤德王后)다. 이 사이에서 효성왕 김승경(金承慶)과 경덕왕 김헌영(金憲英)을 두었다. 제37대 선덕왕(宣德王) 어머니인 사소부인(四炤夫人)도 그의 소생이다. 동복형 효소왕(孝昭王, 692~702)이 후사 없지 죽자 왕위를 이었다. 어린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즉위 초반기는 모후 신목이 섭정한 듯하다. 36년에 달하는 그의 재위기간은 안정을 구가했다고 평가된다. 당과도 우호 관계를 지속했다. 성덕왕 31년(732) 발해가 당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자 당측 요청으로 발해 남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죽어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묻혔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성덕왕 : 성덕왕(聖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래 이름은 융기(隆基)였는데, 당나라 현종(玄宗)의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선천(先天) 연간에 고쳤다.<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 하였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하여 애도하고 이틀간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아울러 왕을 신라 왕으로 책봉하고 그 형이 가졌던 장군도독(將軍都督)의 칭호를 이어받게 하였다. 원년(702) 9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문무 관리들에게 관작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으며, 여러 주와 군의 1년간 조세를 면제하였다. 아찬 원훈(元訓)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삽량주(歃良州)에서 도토리 열매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2년(703) 봄 정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영묘사에 화재가 났다. 서울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중시 원훈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아찬 원문(元文)을 중시로 삼았다.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아찬 김사양(金思讓)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였다.3년(704) 봄 정월에 웅천주(熊川州)에서 금빛 영지[金芝]를 바쳤다. 3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김사양이 돌아와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다. 여름 5월에 승부령(乘府令)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4년(705) 봄 정월에 중시 원문이 죽었으므로 아찬 신정(信貞)을 중시로 삼았다. 3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노인들에게 술과 밥을 내려 주었다. 9월에 왕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였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나라 동쪽의 주(州)와 군(郡)에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 다녔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5년(706) 봄 정월에 이찬 인품(仁品)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나라 안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3월에 뭇별이 서쪽으로 흐르듯 떨어졌다. 여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에 중시 신정(信貞)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므로 대아찬 문량(文良)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잘 여물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2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6년(707) 봄 정월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으므로 한 사람에게 하루 벼 3되씩을 7월까지 나누어 주었다. 2월에 크게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오곡 종자를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7년(708) 봄 정월에 사벌주에서 상서로운 지초[瑞芝]를 바쳤다. 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4월에 진성(鎭星)이 달을 침범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8년(709) 봄 3월에 청주(菁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에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9년(710) 봄 정월에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천구(天狗)가 떨어졌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지진이 일어났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10년(711) 봄 3월에 많은 눈이 내렸다. 여름 5월에 짐승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나라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였다. 중시 문량이 죽었다. 11월에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1년(712) 봄 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이찬 위문(魏文)을 중시로 삼았다. 당나라에서 노원민(盧元敏)을 사신으로 보내와 칙명으로 왕의 이름을 고치도록 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이 온수(溫水)에 거둥하였다. 가을 8월에 김유신의 아내[妻]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12년(713) 봄 2월에 전사서(典祀署)를 설치하였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현종이 문루(門樓)에 나와 그들을 접견하였다. 겨울 10월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김정종(金貞宗)이 돌아왔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표기장군(驃騎將軍) 특진(特進) 행좌위위대장군(行左威衛大將軍) 사지절(使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林州諸軍事) 계림주자사(林州刺史) 상주국(上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봉하였다. 겨울 10월에 중시 위문(魏文)이 나이가 많아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12월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개성(開城)을 쌓았다.  13년(714) 봄 정월에 이찬 효정(孝貞)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쳐 표문(表文) 쓰는 일을 맡게 하였다.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나라]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고 그를 총애하여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윤 2월에 급찬 박유(朴裕)를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니, 조산대부(朝散大夫) 원외봉어(員外奉御)의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여름에 가물었고 많은 사람들이 돌림병에 걸렸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산도토리 열매가 변하여 밤이 되었다. 겨울 10월에 당나라 현종이 내전(內殿)에서 우리 사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조칙으로 재상과 4품 이상의 주요 관리[淸官]들에게 참여하도록 하였다. 14년(715) 봄 3월에 김풍후(金楓厚)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청주(菁州)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5월에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6월에 크게 가물어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못 가에서 비 내려주기를 빌게 하였더니, 곧 비가 열흘 동안 내렸다. 가을 9월에 금성[太白]이 서자성(庶子星)을 가렸다. 겨울 10월에 유성이 자미(紫微) [별자리]를 침범하였다. 12월에 유성이 천창(天倉)으로부터 태미(太微)로 들어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왕자 중경(重慶)을 태자로 봉하였다. 15년(716) 봄 정월에 유성이 달을 침범하여 달이 빛이 없어졌다. 3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성정왕후(成貞王后)<[성정(成貞)을]>를 [궁궐에서] 내보냈다. 채색비단 500필과 밭 200결(結), 조(租) 1만 섬과 집 한 채를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당나라에 들어갔던 하정사(賀正使) 김풍후가 귀국하려 하니, 그에게 원외랑(員外郞)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여름 6월에 가물었으므로 또 거사 이효(理曉)를 불러 비내려주기를 빌도록 하니 비가 왔다.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16년(717) 봄 2월에 의박사(醫博士)와 산박사(博士) 각각 1인씩을 두었다. 3월에 새 궁궐을 지었다. 여름 4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태자 중경(重慶)이 죽으니, 시호를 효상(孝)이라 하였다. 가을 9월에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大監)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과 10철(十哲) 및 72제자(七十二弟子)의 초상화를 바쳤으므로 대학(大學)에 안치하였다. 17년(718) 봄 정월에 중시 효정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파진찬 사공(思恭)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왕이 나라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며 위문하였는데, 나이 많은 이와 홀아비, 홀어미, 부모없는 어린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몸소 위로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3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6월에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더니, 수중랑장(守中郞將)의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겨울 10월에 유성이 묘(昴) [별자리]로부터 규(奎) [별자리]로 들어가니, 여러 작은 별들이 이를 뒤따랐다. 천구(天狗)가 동북방[艮方]에 떨어졌다. 한산주 도독 관내에 여러 성을 쌓았다.  18년(719)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가을 9월에 금마군 미륵사(彌勒寺)에 벼락이 쳤다. 19년(720)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상대등 인품(仁品)이 죽었으므로 대아찬 배부(裵賦)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이찬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여름 4월에 큰 비가 내려 산 13곳이 무너졌고, 우박이 떨어져 벼 모를 상하였다. 5월에 관리에게 명하여 해골을 땅에 묻게 하였다. 완산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6월에 왕비를 책봉하여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웅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쳤다.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중시 사공(思恭)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파진찬 문림(文林)을 중시로 삼았다. 20년(721) 가을 7월에 하슬라(何瑟羅) 지역의 장정[丁夫] 2천 명을 징발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21년(722) 봄 정월에 중시 문림이 죽었으므로 이찬 선종(宣宗)을 중시로 삼았다. 2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가을 8월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겨울 10월에 대나마 김인일(金仁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 도적들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22년(723) 봄 3월에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쳤다. 한 명은 이름이 포정(抱貞)으로 아버지는 나마 천승(天承)이고, 또 한 명은 이름이 정완(貞菀으로 그 아버지는 대사 충훈(忠訓)이었다. 그들에게 의복, 그릇, 노비, 수레와 말을 주어 예(禮)를 갖추어 보냈더니, 현종(玄宗)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왕의 고종자매로서 친척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여 왔으니, 나는 차마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못하겠다.” 그리고는 후하게 선물을 주어 돌려 보냈다. 정완비(貞菀碑)에는 『효성왕 6년 즉 천보(天寶) 원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 지 알 수 없다. 여름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果下馬) 한 필과 우황, 인삼, 아름다운 다리[美],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 매를 아로새긴 방울[鏤鷹鈴], 바다표범 가죽[海豹皮], 금은 등을 바쳤다. 아울러 글을 올려 말하였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구석진 데 있고 땅은 먼 모퉁이에 처하여, 본래부터 천주(泉州) 상인의 진귀한 보배도 없고 남만인(南蠻人)의 공물과 같은 재화도 없어서, 감히 토산물로써 황제의 관청을 더럽히고 노둔한 말로써 황제의 마구간을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연나라의 돼지[燕豕]에 견줄 만한데 감히 초나라의 닭에 비기고자 하니 매우 부끄럽게 여겨져 떨리고 땀이 날뿐입니다.』지진이 일어났다. 23년(724) 봄에 왕자 승경(承慶)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웅천주(熊川州)에서 상서로운 지초[瑞芝]를 바쳤다. 2월에 김무훈(金武勳)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무훈이 돌아올 때 현종이 글을 내렸다. 『경(卿)은 매양 정삭(正朔)을 받들고 [나의] 궁궐에 조공하니, 마음 속에 품은 뜻이 매우 가상하다. 또 바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받고 보니 모두가 큰 바다의 파도를 건너고 거친 들판을 넘어 왔건만, 물건들이 모두 정결하고 아름다워 경의 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이제 경에게 비단 두루마기[錦袍]와 금띠 및 채색 비단과 흰 비단을 합하여 2천 필을 주어 정성스러운 예물에 답하노니, 물건이 이르거든 잘 받으시오.』 겨울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소덕왕비(炤德王妃)가 죽었다. 24년(725) 봄 정월에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3월에 눈이 내렸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중시 선종(宣宗)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윤충(允忠)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땅이 흔들렸다. 25년(726) 여름 4월에 김충신(金忠臣)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5월에 왕의 아우 김근질(金質)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그에게 낭장(郞將) 관작을 주어 돌려 보냈다. 26년(727) 봄 정월에 죄인들을 사면하였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여름 4월에 일길찬 위원(魏元)을 대아찬으로 삼고 급찬 대양(大讓)을 사찬으로 삼았다. 겨울 12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수리하였다. 상대등 배부(裵賦)가 늙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었다. 27년(728) 가을 7월에 왕의 아우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아울러 글을 올려 자제들의 국학(國學) 입학을 청하니, 조칙으로 이를 허락하고 김사종에게 과의(果毅)의 관작을 주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상대등 배부가 늙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고, 이찬 사공(思恭)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28년(729)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가을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9년(730) 봄 2월에 왕족 지만(志滿)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고 작은 말 다섯 필, 개 한 마리, 금 2천 량(兩), 두발(頭髮) 80량, 바다표범 가죽 10장을 바쳤다. 현종이 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의 관작을 주고 명주 100필, 자주빛 두루마기, 비단으로 만든 가는 띠[錦細帶]를 주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현종이 그들에게 물품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었다. 30년(731) 봄 2월에 김지량(金志良)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니, 현종이 그에게 태복소경원외치(太僕少卿員外置)의 관작과 무늬없는 비단[帛] 60필을 주어 돌려 보냈다. 또 조서를 내렸다. 『바친 우황과 금은 등의 물건은 올린 글로 보아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겠다. 경(卿)의 부부가 복되고 삼한(三韓)이 사이좋게 잘 지내, 오늘날 어질고 의로운 나라로 일컬어지고 대대로 공로있는 어진이의 업적을 나타내었다. 문장과 예악은 군자의 기풍을 드러내었고, 성심으로 받들고 충성을 다하니 진실로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요 충성스러움과 의로움의 모범이다. 어찌 이역(異域)의 먼 지방 문화와 한가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대는 의(義)를 사모함에 매우 부지런하고 술직(述職)을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산 넘고 물 건넘에 길이 멀다고 게을리하지 않고 폐백과 보물을 바침에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 우리 제왕의 법도를 지켜 나라의 공식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간곡한 정성을 돌아보니 깊이 가상할 만하다. 나는 매양 새벽에 일어나 생각에 잠기고 밤에도 옷을 입은 채 어진 이를 기다리니, 그런 사람을 보면 마음속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대를 만나면 실로 나의 품은 뜻을 나누고자 기다렸더니, 지금 사신이 와서 그대가 병 때문에 명령을 받들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생각하면 걱정이 더할 뿐이다.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니 병은 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대에게 무늬있는 채색비단[綾綵] 500필과 무늬없는 비단[帛] 2천5백 필을 주노니 마땅히 받으시오.』여름 4월에 [죄수들을] 사면하고, 늙은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31년(732) 겨울 12월에 각간 사공(思恭)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允忠), 사인(思仁)을 각각 장군으로 삼았다. 32년(733) 가을 7월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쳐들어갔으므로, 당나라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왕에게 관작을 더해 주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한 길 남짓 되었으므로 산길이 막히고 군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 없이 돌아왔다. 김사란은 본래 왕족으로서, 앞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회하였을 때 사람됨이 공손하고 예의가 있었으므로 머물러 숙위하게 되었다. 이때 이르러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겨울 12월에 왕의 조카 지렴(志廉)을 당나라에 보내 조회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일찍이 황제가 왕에게 흰 앵무새 암수 각 한 마리씩과 자주색 얇은 비단에 수놓은 두루마기[紫羅繡袍], 금은으로 세공한 그릇, 상서로운 무늬가 있는 비단,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들인 얇은 비단[五色羅綵] 등 도합 300여 단(段)을 주었다. 왕이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가 법을 쥐고 나라를 다스림에 문(文)은 성스럽고 무(武)는 신이(神異)하니, 천년의 왕성한 운수에 응하고 만물의 상서로움을 이룩하였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통하는 곳마다 모두 폐하의 지극한 덕(德)을 받게 되고 해와 달이 비치는 곳마다 폐하의 깊은 어지심을 함께 입게 되었습니다. 신(臣)이 사는 곳은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로 막혔으나 황제의 자애로움은 먼 데까지 젖어들었고, 우리나라[鄕]가 중국을 외면하여도 황제의 은혜는 그윽한 데까지 뻗쳤습니다. 엎드려 조서를 읽고서 꿇어앉아 옥으로 장식한 함을 열어보니, 하늘의 비와 이슬을 머금었고 오색의 봉황과 난새가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말할 줄 아는 영물스러운 새는 흰 것 푸른 것 둘 다 묘하기도 하여 혹은 장안(長安)의 음악을 부르고 혹은 황제의 은택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각종 비단의 다채로운 문양과 금·은 보물의 새김질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하고 듣는 이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 정성을 바친 공의 근원을 따지자면 실로 선조로부터 말미암은 것인데, 분에 넘치는 이 은총을 내리사 말대의 자손[末孫]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충성은 티끌처럼 작은데 은혜는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처지에 따라 분수를 따진다면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조칙으로 지렴(志廉)을 대궐 내전에서 대접하도록 하고 그에게 비단 다발[束帛]을 내려 주었다. 33년(734) 봄 정월에 백관들에게 교서를 내려, 직접 대궐 북문으로 들어와 아뢰고 대답하도록 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이 받은 분부는 신으로 하여금 폐하의 신임표[節]를 가지고 본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쳐서 없애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보고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려고 맹세하였는데, 마침 이때 교대하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었기 때문에 제가 계속 머물러 숙위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 왕은 신이 오랫동안 황제의 조정에 머물러 모셨다 하여 종질(從姪) 지렴(志廉)을 사신으로 보내 신과 교대하게 하여,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도착하였으니 신은 곧바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분부를 매양 생각하니 밤낮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앞서 명을 내려 본국왕 흥광(興光)[성덕왕]에게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신임표를 주어 흉악한 도적을 토벌케 하였으니, 황제의 위엄이 닿는 데는 비록 먼 곳이라도 가까운 것 같고,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제가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준동(蠢動)하던 오랑캐들은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리라 생각되나 악을 제거함에는 근본을 다스려야 하고 법을 펴는 데는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내는 데는 의리가 세 번의 승리보다도 더 귀중하지만, 적을 풀어놓으면 후환이 몇 대까지 끼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에 신에게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주시어 황제의 뜻을 가지고 먼 바깥으로 나아가 거듭 선포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 더욱 떨칠 뿐이겠습니까? 응당 또 군사들도 기운을 내어 반드시 그 소굴을 둘러엎고 거친 변방도 안정되어, 마침내 동쪽 신라의 신하인 신의 작은 정성이 이루어 져 국가의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다시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전승의 보고를 대궐에 바칠 것이니, 터럭같은 공적이나마 드러내어 비와 이슬같은 혜택에 보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여름 4월에 대신 김단갈단(金端竭丹)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니, 황제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접견하고 위위소경(衛尉少卿)의 관작과 비색 난포(袍)와 평만은대(平漫銀帶) 및 명주 60필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왕의 조카 지렴을 보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고 작은 말 두 필과 개 세 마리, 금 500량, 은 20량, 베 60필, 우황 20량, 인삼 200근, 두발 100량, 바다표범 가죽 16장을 바쳤는데, 이때 와서 지렴에게 홍려소경원외치(鴻少卿員外置)의 관작을 주었다. 34년(735) 봄 정월에 형혹(熒惑)이 달을 침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나라에서 죽자,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올 때 조칙으로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 35년(736) 여름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표(表)를 올려 사례하였다.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삼가 받았습니다. 신은 바다의 먼 변방에 태어나 살면서 성스러운 조정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비록 정성된 마음을 먹기는 하였으나 나타낼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충성과 정절로 일을 삼았으나 노력은 상받기에 부족하였습니다. 폐하가 비와 이슬같은 은혜를 내리고 해와 달같이 밝은 조서를 내려, 신에게 땅을 주시어 신의 고을들을 넓혀 주셨고, 드디어 개간할 기약이 있도록 해주고 농사짓고 누에칠 자리를 얻게 하였습니다. 신은 조칙의 뜻을 받들어 영예로운 은혜를 깊이 입었음에,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겨울 11월에 왕의 종제(從弟) 대아찬 김상(金相)을 보내 당나라에 조회하게 하였는데, 도중에서 죽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매우 슬퍼하여 그에게 위위경(衛尉卿)의 관작을 추증하였다. 이찬 윤충 사인 영술(英述)을 보내 평양주(平壤州)와 우두주(牛頭州) 두 주(州)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개가 재성(在城) 고루(鼓樓)에 올라가 사흘 동안 짖었다. 36년(737) 봄 2월에 사찬 김포질(金抱質)을 당나라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33대 성덕왕(聖德王)은 이름이 흥광(興光)인데 본명은 륭기(隆基)이다. 효소(孝昭)의 모제(母弟)이다. 선비(先妃)는 배소왕후(陪昭王后)이니, 시호가 엄정(嚴貞)으로 원대(元大) (아간<阿干> 딸이다. 후비(後妃)는 점물왕후(占勿王后)이니 시호는 소덕(炤德)이니 순원(順元) 각간(角干)의 딸이다. 임인년에 즉위해 35년을 다스렸다. 능은 동촌(東村) 남쪽에 있으니 양장곡(楊長谷)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43(열전 제3) 김유신下 : (유신의) 적손(嫡孫) 윤중(允中)은 성덕대왕(聖德大王) 때 벼슬하여 대아찬이 되고 여러 번 임금의 은혜를 입었는데, 왕의 친속들이 자못 질투하였다. 때마침 8월 보름이었는데 왕이 월성(月城) 산 위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부르게 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 간하였다.“지금 종실(宗室)·외척들 중에 어찌 좋은 사람이 없어 소원(疏遠)한 신하를 부르십니까? 또 이것이 어찌 이른바 친한 이를 친히 한다는 일이겠습니까?”왕이 말하였다.“지금 과인이 경들과 더불어 평안 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 조부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과 같이 하여 잊어버린다면, 착한 이를 좋게 여겨 자손에게 미치는 의리가 아니다.”드디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 일을 말하기도 하였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절영산(絶影山)의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불만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개원(開元) 21년(성덕왕 32년: 733)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권유하였다.“말갈발해가 밖으로는 번신이라 일컬으면서 안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 군사를 내어 문죄하려 하니, 그대도 군사를 출동하여 서로 협공하게 하라. 듣건대 옛 장군 김유신의 손자 윤중이 있다 하니, 모름지기 이 사람을 뽑아 장수로 삼으라!”윤중에게 금과 비단 약간을 보내주었다. 이에 대왕은 윤중과 아우 윤문(允文) 등 네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합하여 발해를 치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2 성덕왕(聖德王) :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서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 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김대문 열전 :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족가문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1 말갈(靺鞨) 발해(渤海) : <삼국사三國史>에는 이렇게 말했다. “의봉儀鳳 3年, 고종高宗 무인년戊寅年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그 여당餘黨을 모아 북으로 태백산太伯山 밑에 의지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했다.  개원開元 20年 경에 당唐의 명황明皇이 장수를 보내서 발해渤海를 토벌했다.  또 성덕왕聖德王 32年, 현종玄宗 갑술甲戌년에 발해渤海·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당唐나라 등주登州를 침범하자 현종玄宗은 이를 쳤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 <국사(國史)> 및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상고하면, "진흥왕(眞興王) 14년 계유(癸酉; 553)에 황룡사(皇龍寺)를 처음 세운 후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歷) 원년 무술(戊戌; 698) 6월에 절이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寺中古記>에는 성덕왕善德王 때라 했으나 잘못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제33대 성덕왕 경신(庚申; 720)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戊子;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종, 분황사(芬皇寺)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 종 : 경덕왕(景德王)은 황동(黃銅) 12만 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奉德寺)에 안치(安置)했다. 이 봉덕사는 효성왕(孝成王)이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 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의 명(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 전광대왕 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그 아버지를 위해서 시주한 금金이었으므로 성덕왕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郎) 한림랑(翰林郞) 금필월(해)金弼월(奚)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종의 명(銘)을 지었으니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싣지 못한다.


삼국사기 권 제9(신라본기 제9) 효성왕 : 효성왕(孝成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경(承慶)으로,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34대 효성왕(孝成王)은 김씨다.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아버지는 성덕왕(聖德王)이며 어머니는 소덕대후(炤德大后)이다. 비는 혜명왕후(惠明王后)이니 진종(眞宗) 각간(角干)의 딸이다. 정축년에 즉위해 5년을 다스렸다. 법류사(法流寺)에서 화장했으며 뼈는 동해에 뿌렸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35대 경덕왕(景德王)은 김씨다.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아버지는 성덕(聖德)이며 어머니는 소덕대후(炤德大后)이다. 선비(先妃)는 삼모부인(三毛夫人)인데 출궁(出宮)해 후사가 없었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휘가 경수왕후(景垂王后)인데 수(垂)는 목(穆)으로 쓰기도 한데, 의충(依忠) 각간(角干)의 딸이다. 임오년에 즉위해 23년간 다스렸다. 처음에 경지사(頃只寺) 서쪽 岑에 장사했으며 鍊石을 능으로 삼았다. 나중에 양장곡 안으로 이장했다.


삼국사기 권 제9(신라본기 제9) 선덕왕 :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량상(良相)이다. 나물왕(奈勿王) 10대손으로, 아버지는 해찬(海) 효방(孝芳)이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부인(四炤夫人)으로 성덕왕(聖德王) 딸이다. 왕비는 구족부인(具足夫人)으로 각간 량품(良品)의 딸이다.<또는 아찬 의공(義恭)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36대 선덕왕(宣德王)은 김씨다. 이름은 량상(亮相)이다. 아버지는 효방(孝方) 해간(海干)이니 추봉 개성대왕(開聖大王)으로 곧 원훈(元訓) 각=(角=)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소부인(四召夫人)이니 휘는 정의대후(貞懿大后)로서 성덕왕 딸이다. 비는 구족왕후(具足王后)이니 량품(狼品) 각간 딸이다. 경신년에 즉위해 5년 동안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원성왕 :  원년 2월에…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써 5묘(五廟)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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