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채납 절차-국립고궁박물관>
삼국사기 신라 신문왕본기 3년(683) 조에는 현직 왕이 왕비를 채납하는 기사가 희유하게 실렸으니,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봄 2월)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작은딸을 맞아 부인으로 삼기로 하고, 그에 앞서 이찬 문영(文穎)과 파진찬 삼광(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智常)을 보내 납채(納采)하게 했으니,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백3십5수레였으며, 벼가 1백5십 수레였다.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愷元)을 김흠운 집에 보내 책봉하고는 부인(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大常)ㆍ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ㆍ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량(梁)과 사량(沙梁) 두 부(部)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이하도록 했다. 부인이 탄 수레 곁에서 시종하는 관원과 부녀자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왔다.
三年 春二月 以順知爲中侍 納一吉飡金欽運少女爲夫人 先差伊飡文穎波珍飡三光定期 以大阿飡智常納采 幣帛十五轝 米酒油蜜醬豉脯 醯一百三十五轝 租一百五十車 夏四月 平地雪深一尺 五月七日 遣伊飡文穎愷元抵其宅 冊爲夫人 其日卯時 遣波珍飡大常孫文阿飡坐耶吉叔等 各與妻娘及梁沙梁二部嫗各三十人迎來 夫人乘車 左右侍從官人及娘嫗甚盛 至王宮北門 下車入內
이렇게 해서 채납한 왕비가 신목왕후(神穆王后)다. 삼국사기 효소왕본기 즉위년 조에는 왕이 신문왕 태자라 하면서 어머니 신목이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운<雲>이라고도 한다> 딸”이라 했다.
이번이 신문왕에게는 새장가였다. 그에겐 이미 태자 시절에 받아들인 원비(元妃)가 있었으니,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문왕본기 즉위년 조에 이르기를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루되어 궁중에서 쫓겨났다”고 했으니, 이렇게 해서 빈자리를 신목으로 채운 것이다. 김흠돌이 반란에 연루되어 패망한 것은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이다. 이후 2년 반 정도를 돌싱으로 지내다가 장가를 간 것이다.
저 대목은 신라시대 왕비 채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비교적 상세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를 보면 우선 채납 대상자를 선정하고, 이어 혼인 날짜를 정하며, 예비 왕비 집에다가 각종 예물을 보내는 납채를 한다. 납채 품목은 저 기사에서 자세히 보인다.
석달 뒤,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을 한다. 왕비 책봉례는 왕비 집에서 거행되었다. 책봉례를 한 그날 바로 왕비를 궁중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이 있었다. 입궁은 묘시에 거행됐다. 묘시는 대략 오전 5~7시이니 매우 이른 시간이다. 왕비 호종은 량부와 사량부 두 부 귀한 가문 집 여자 30명씩, 총 60명이 했다.
혼인 혹은 혼례라고 할 적에 '혼'은 지금은 보통 '婚'이라 쓰나, 이 글자는 나중에 생긴 글자이며, 본래는 '昏'이다. 이 글자를 설문해자는 "日冥也。从日氐省。氐者,下也"라고 했으니, 해가 뜨기 전 어둑어둑한 광경을 묘사한 말이다. 다시 말해 미명 혹은 새벽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단옥재는 주석하기를 "冥이란 깊은 것이다[窈也]。깊음[窈]이란 깊고 멀다는 뜻이다[深遠也]라고 했다. 그러면서 단옥재는 정목록(鄭目錄), 다시 말해 정현의 목록을 인용하면서 이르기를 "사대부가 부인을 맞이하는 의식은 새벽을 시점으로 삼았으므로 그런 까닭에 이렇게 이름한다. 모름지기 혼인을 새벽에 하는 까닭은 양기가 오고 음기가 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士娶妻之禮。以昏爲期。因以名焉。必以昏者、陽往而陰來)고 했다.
요새는 혼인을 대체로 낮엔 하지만, 전통시대엔 새벽에 했으니, 그런 사정이 신문왕 새장가 가기에도 그대로 통용함을 본다.
이 의식을 조선시대 왕비 채납 의식과 비교하면, 놀랍게도 똑같다. 혼인 의식이 이미 규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 사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걸린 조선시대 왕비 채납 의식이다.
추기) 이 기록이 왜 남았을까? 삼국사기 전반적인 기술 체계에서 저 장가가는 의식이 이채롭다. 이에서 우리는 왜 이 기록이 남았을까를 물어야 한다. 간단히 왕이 이때 장가 갔다 이런 식으로만 남겼을 수도 있다. 나아가 장가 갔다는 게 무에 중요한 일이라고? 그리해서 저 사실 자체를 몽땅 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삼국사기 찬자, 혹은 그 저본이 되었을 문헌에서 그 찬자는 저 기록을 왜 남겼을까?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첫째, 이때 비로소 신라에서 중국식 예제, 개중 혼인례가 시행되었기 때문일 수 있고, 두번째로 현재의 왕이 장가가는 일은 드물었기에 그것이 희귀한 일이라 해서 자세히 남겼을 수도 있다. 나는 두 가지 이유가 다 작동했다고 본다.
이 중에서 첫번째와 관련해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신문왕이 혼례한 저 시기가 마침 그 이전 전통적 신라식 지배계층의 혼인 전당인 포석사가 심대한 지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유념해도 좋다고 본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포석사는 화랑들의 전당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왕실 지배계층에도 그런 존재였다. 그런 까닭에 김춘추가 김유신 동생 문희랑 혼인할 때도 포석사에서 했다고 한다.
이런 포석사, 곧 지금의 포석정이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니, 신문왕 즉위 원년에 발발한 김흠돌의 난이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흠돌은 그 자신 풍월주 출신이며, 왕을 몰아내고 신왕을 세우려는 반란에 그만이 아니라 다른 역대 풍월주, 그리고 화랑 낭도들이 다수 관여한 까닭에, 난을 진압함과 동시에 화랑을 폐지했다고 한다.
화랑의 폐지는 곧바로 포석사 지위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불러왔을 것임이 확실하다. 포석사가 예식 전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그 자리를 중국식 예제가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후 언제인가 포석사는 옛날 지위를 많이 회복했음이 확실하다. 얼마 뒤 화랑이 부활한 데다가, 포석사 역시 신라 하대까지 화랑들의 전당으로 활용되는 모습이 간헐적이나마 포착되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