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유학한 신라 중고기 불교 승려로, 진흥왕 37년(576)에 호승(胡僧) 둘을 대동하고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經)》, 그리고 부처 사리를 받쳤다. 황룡사 구층목탑 창건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데 《해동고승전》을 보면, 호승 둘을 데리고 온 이는 안홍이 아니라, 안함(安含)이며, 더구나 그 시기는 진흥왕 시대가 아니라 지평왕 27년(605)라 착란이 있다. 이 점에서 수상했는지 《해동고승전》 찬자는 같은 사람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어쩌면 안함과 안홍은 실제로 두 사람이었는디 모른다"고 했다. 安含과 安弘은 글자 모양이 비슷한데 이에 따른 착간이 있지 않나 한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 37년(576) 봄에...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鬘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진압케 한다.”
해동고승 권2 :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相傳)》에 이르기를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5)에 태어났으니, 이 해에 동방의 성인 안홍 법사가 서역의 세 사람 삼장과 중국 승려 두 사람과 함께 당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주석하기를 "북천축(北天竺) 오장국(烏萇國) 비마라진제(毘摩羅眞諦)는 나이 44세요, 농가타(農伽陀)는 나이 46세, 마두라국(摩豆羅國) 불타승가(佛陀僧伽)는 나이 46세였다. 52국을 경우하여 비로소 중국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해동으로 와서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旃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해 내니, 신라 승려 담화(曇和)가 받아썼다. 얼마 안 있어 중국 승려들은 글을 올려 중국으로 돌아가게 해주기를 청하므로 왕이 허락해 보냈다"고 했으니, 그 안홍이란 아마 이 (안함) 화상일 것이다. 또 <신라본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37년(576)에 안홍이 진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고, 호승 비마라(毘摩羅) 등 두 사람과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과 《승만경(勝鬘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고 하는데 진흥(왕) 말년에서 진평왕 건복까지는 거의 50년 간격이 있는데 어찌 삼장이 온 전후가 이와 같은가? 어쩌면 안함과 안홍은 실제로 두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동행한 삼장과 다르지 않고, 그 이름도 다르지 않으므로 여기에 합해서 전기를 만드는 것이다. 또 서역의 삼장이 가고 머무르고 마친 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cf. 안함安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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