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봉상왕 때 모용외 침입을 봉쇄한 인물. 북부 출신이며 봉상왕 2년(293), 소형(小兄)으로 신성(新城)을 지킨 지방관 중 하나로 생각되는 신성재(新城宰)로 있다가 고구려를 침입해 봉상왕을 압박한 모용외 군대를 물리쳐 그 공으로 대형(大兄)으로 승진하고, 3년 뒤 다시 모용외가 침입해 서천왕 무덤을 도굴하고 물러나자 신성태수가 되어 모용외를 막았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해 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 했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러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사실을 알고는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거의 따라잡게 되니, 왕이 두려워했다. 그때 신성재(新城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그들을 힘껏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해 물러갔다. 왕이 기뻐 고노자에게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해 와서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서는 서천왕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니,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모용씨가 군대가 날래고 강해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하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했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진 데다 용감하기까지 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으니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했다.
삼국사기 권 제49(열전 제9) 창조리 :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는데 그때 모용외(慕容廆)는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는 군사가 강해 여러 번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창조리가 대답했다.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는 어진 데다 용감하기까지 합니다. 대왕께서 침략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왕이 그를 신성(新城)태수로 삼으니 그 후로 모용외가 다시 침범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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