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여러 번, 그것도 시도때도없이 이곳저곳에서 강조한 글이라, 다시금 이곳에서도 정리한다.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고, 후첩들을 지칭하는 봉작이 과연 생전에 얻은 것인지, 혹은 죽은 뒤에 얻은 것인지, 나아가 생전이라 해도, 왕건 생존시인지, 아니면 왕건 사후인지도 구별치 아니하니 각종 억설이 난무한다.
《고려사》 후비열전을 보면, 고려 건국주인 왕건의 여인들로 다음 29명이 적기되고, 그들의 생애가 간단히 정리된다.
1.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2.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3.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
4.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5.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
6.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
7.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8.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9.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
10. 숙목부인(肅穆夫人)
11.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
12.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
13.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
14.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王氏)
15.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왕씨(王氏)
16.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
17.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
18.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王氏)
19.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김씨(金氏)
20.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金氏)
21.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22.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康氏)
23.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24.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25.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26.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
27.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朴氏)
28. 몽양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朴氏)
29.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이들 중에서 작호(爵號) 혹은 봉작(封爵)으로 보면 왕건에게 왕비라고 칭할 만한 여인으로는 6번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까지이며, 그 아래 7번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는 볼짝없이 대부인이라는 봉작으로 보아, 그 딸이 후대 누군가의 왕비가 되어 얻었음을 추찰한다. 8번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이하는 봉작이 부인이니, 앞보다 더욱 격이 떨어지는 첩들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를 보고 왕건은 적어도 6명에 달하는 정식 왕비를 거느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박종기를 비롯한 고려사 전공자들 글을 읽어보면 조선시대와 비교해 고려는 일부다처제라고 하거나, 혹은 그런 전통이 매우 강한 것처럼 기술하지만, 이는 오판이다.
왕후 혹은 왕태후라 일컬은 저 여인 6명 중에서 정비는 오직 넘버원 신혜왕후 유씨가 있을 뿐이다.
후비열전을 보면 신혜왕후는 왕건의 첫번째 부인으로서, 죽은 후 신혜왕후라는 시호를 받고는 태조가 묻힌 현릉(顯陵)에 합장했다고 하거니와, 남편과 합장하는 자격은 오직 1명에게 주어질 뿐이거니와, 이는 그가 바로 정비임을 여실히 웅변한다.
그는 왕건보다 일찍 죽었다. 나아가 후사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시호가 왕후였다.
6명 중 왕후라 일컬은 여인이 넘버2 장화왕후 오씨와 정덕왕후 유씨가 있거니와, 이들 역시 왕후라는 봉작은 죽은 뒤에 받은 이름인 시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죽을 때는 왕비가 아니었는데 그 아들이 용케도 왕이 되어 왕후라 일컬어진 것이다.
그의 아들들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그들의 작호는 왕태후가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머지 세 여인, 다시 말해 3번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와 4번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그리고 5번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가 왜 왕태후인지를 여실히 안다. 그들의 후사가 왕이 되고, 그때도 살아있었던 까닭에 왕태후라는 존호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죽은 다음, 혹은 그 후사가 왕이 됨으로써 얻은 작호 혹은 존호들이지, 결코 왕건 생전에 왕비로 일컬을 수는 없었다.
왕건 시대를 무대로 하는 각종 사극에 왕건의 여인들이 모조리 같은 급의 왕비로서 취급하고, 그리 소개되는 것은 역사 조작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박종기를 필두로 하는 기존 고려사학계의 잘못된 연구성과에 비롯한다.
말한다.
고려는 결코 일부다처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일부다처제의 근거로 설명하는 왕건시대의 여인들도 하나하나 모조리 검토하면, 오직 왕비는 동시기에 단 한 명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비슷한 양상을 연출하는 현종시대 역시 마찬가지라, 현종 역시 그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정비를 동시에 두 명을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이 법이고 관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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