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과 내 새끼는 하나” : 東漢의 제오륜(第五倫) [수정] [삭제] 2011.06.15 08:57:15
이른바 주자성리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되는 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편찬토록 한 동몽서(童蒙書)로 《소학(小學)》이 있으니, 《대학(大學)》에 대칭하는 이 《小學》이란 문헌은 실상 유자징이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을 모은 것이 아니라 先代 문헌 이곳저곳에서 동몽(童蒙)을 가르치는 데 적절하다 생각하는 구절들을 가려 뽑아 정리하고 나열하며 편집한 이른바 짜깁기 책이니 요즘 같으면 저작권법 위반으로 책이 회수되고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일이지만 옛날 동양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하고 비재했다.
《小學》은 실상 그 내용을 볼작시면 내 보기엔 이렇다 할 거창한 철학을 담았다고 보기는 힘들며, 다른 무엇보다 朱熹 當代의 실정과는 전혀 맞지 않는 記述이 허다했으니, 그러함에도 그보다도 다시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그것도 조선 땅에다가 이를 절대도덕으로 세우고자 한 일군의 무리가 출현했거니와, 그 오야붕이 바로 조광조임은 익히 알 터이다.
《小學》은 전체 6편이니, 그 마지막 제6편은 편명(篇名)이 ‘선행(善行)’이라, 소제목처럼 이 篇에는 주로 역대 문헌에 보이는 善行과 관련된 역사상 인물의 일화라든가 言說을 모았다. 이 善行편은 다시 세분하니, 그 세부항목 중 하나가 바로 ‘실경신’(實敬身)이라.
제목을 풀어보면 ‘敬身을 實한다’이니, 예서 實은 實證이란 뜻에 가까우니,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신(敬身)’이란 무엇이냐가 그 小篇이 주장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노골화하거니와, 이때의 敬身을 나는 愼獨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大過는 없다고 본다. 말 그대로 몸가짐을 공손히 한다는 뜻이니, 따라서 ‘실경신’(實敬身)은 역사상 몸가짐을 제대로 한 實例들의 집합이 되는 셈이다.
이 ‘실경신’이 인용한 역대 인물고사 중 하나로 《후한서(後漢書)》에서 뽑아다 온 제오륜(第五倫)이란 사람의 행적이 있으니, ‘제오륜’은 표기로만 보면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와는 하등 관계가 멀 듯 하지만 실은 사람 이름이다.
姓 제오第五, 이름이 륜倫이니, 한데 성과 이름을 합쳐서 그 자체서 그의 사상적 지향점이 어디인지가 드러나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지향점은 孔子가 대표하는 儒家之學이라 할 것이니, 《後漢書》 班彪列傳 下에서 이르기를 “第五倫字伯魚京兆”, 즉 제오륜은 字를 백어(伯魚)라 하는데 京兆(서울) 사람이라 했다.
伯魚는 또 뭐냐 하면, 글자 그대로는 물고기 중에서도 맨 우두머리, 오야붕을 말하니, 이는 바로 鯉(리), 즉, 잉어를 일컫는다. 잉어란 천년을 묵으면 龍이 된다 해서, 예로부터 靈物로 취급되었음은 무수한 일화가 증명하거니와 그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略하되, 다만 伯魚가 공자의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자에게 백어(伯魚)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가 아비보다 먼저 죽었다는 건 이미 《논어(論語)》에 보이거니와, 나는 제오륜이 하고 많은 표기 중에서도 伯魚를 字로 선택한 까닭은 그가 바로 공자의 아들이고자 했음을 자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떻든 《후한서後漢書》 卷41에 수록된 그의 전기인 ‘第五倫 傳’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정리하면, 그는 동한(東漢) 때 경조(京兆) 장릉(長陵), 곧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으로 그의 선대는 전국시대 전씨(田氏)였으니, 그 선조 전씨가 서한(西漢) 원릉(園陵)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면서 성씨를 第로 바꾸었다.
제오륜은 젊을 때는 지금의 기초자치단체 중급 공무원 정도에 해당하는 향색부(鄉嗇夫)로 있다가 지금의 서울시장 정도에 해당하는 경조윤(京兆尹) 염흥(閻興)이 불러 개인 비서격인 주부(主簿)로 삼으니, 이를 발판으로 나중에는 지금의 공무원 특채 정도에 해당하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회계(會稽)와 촉군(蜀郡)을 다스리는 지방관 오야붕인 태수(太守)를 역임한다. 그의 관직 생활은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小學》 제6편 ‘善行’ 중 ‘실경신’(實敬身)에서는 《後漢書》 第五倫 傳 가운데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제오륜第五倫에게 묻기를 “공께서도 사사로운 마음이 있습니까?” 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천리마를 주려 한 적이 있다. 나는 비록 받지는 않았지만 三公이 모여 인물을 선발하고 천거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났다. 그러나 끝내 등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조카가 지난번에 병들었을 때 하룻밤에 열 번을 찾아갔지만 돌아와서는 편안히 잠들었다.
하지만 내 자식이 병이 났을 때는 비록 한 번도 병세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행동들에 어떻게 사심이 없다고 하겠는가?”
或問第五倫曰, 公有私乎. 對曰, 昔人有與吾千里馬者, 吾雖不受, 每三公有所選擧, 心不能忘, 而亦終不用也. 吾兄子嘗病, 一夜十往, 退而安寢. 吾子有疾, 雖不省視, 而竟夕不眠. 若是者豈可謂無私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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