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에 대한 증언 중에 "도둑처럼 찾아왔다 (함석헌)" 던가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 (박헌영)" 이라던가 하는 표현이 있다.
해방이 불시에, 예측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찾아왔다는 뜻이 되겠다.
최근에는 이를 은유적인 표현이거나, 해방이 올 것은 알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올지 몰랐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보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럴 필요 없이 2차대전 당시 전황을 보면 알 일이라고 본다.
필자가 이전 2차대전 전황도에서 1942년 전황을 보여드렸었는데, 이 지도는 1943년에서 1944년의 전황을 모두 포함한 지도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이후, 과달카날 전역 (1942년 8월-1943년 2월)에서도 미 해군이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여전히 전선은 별 차이 없었다는 점이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이 점령한 각 섬이 하나씩 미 해군 손에 떨어지면서 마리아나 열도까지 점령하게 되는 시기는 1944년 7월이나 되어서였다.
다시 말해서 종전 1년 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괌 일대까지 미군이 진출했고, 레이테만 해전으로 일본해군이 재기불능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은 1944년 10월의 일이었다.
해방되기 불과 10개월 전에야 비로소 미군의 확실한 우위로 상황이 반전되었다는 말이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부터 레이테만 해전까지는 무려 2년 반에 걸친 길고 긴 기간이었다.
이 긴 기간동안 미군은 태평양일대에서 일본군과 일진일퇴의 전역을 펼치고 있었고, 1945년을 목전에 둔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흐름이 완전히 미국 쪽으로 옮겨 갔다는 말이다.
일본 본토 코앞까지 미군이 들이닥친 유황도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는 더 늦어서 1945년 상반기의 일이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것은 빨리 잡아도 레이테만 해전 이전으로는 볼 수 없으므로 조선땅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거나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처럼 찾아온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정보의 통제 때문에 전황이 잘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미군 우위로 확실히 결정난 것은 생각보다 무척 후반기의 일로 1944년 말이나 되어서야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 지는 상태로 들어간 것이 더 큰 이유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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