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필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저쪽과 인연이 있다.
블로그 김단장께서도 그렇겠지만 필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 키드다.
대학시절 처음 이 잡지를 알았을 때, 나는 이 잡지를 "사진잡지"로 소개 받았다.
사진이 정말 뛰어 나기 때문에 볼만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한글판도 없었고,
매월 신간이 교보문고인가 들어오기는 했는데 비싸서 헌책방에서 과월호를 구해도 봤었다.
필자의 영어가 볼 만한 것이 있다면 구할은 이 잡지 덕이다.
엄선된 사진, 뛰어난 필진, 비중있는 편집, 이 잡지는 내게 있어 완벽 그 자체였다.
완성도 면에 있어 이 잡지를 따라올 만한 것은 없었다고 본다. 그것이 대략 1980년대이다 (이 당시에 전세계적으로 1200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이 잡지의 전성기였다고 할수 있다).
이때 기억나는 것으로 메릴 스트립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있었다.
유부녀가 동네에 작업하러 온 (!) 사진기자와 바람나는 이야기였는데 이 영화가 나왔을 때가 1995년이었다.
여러모로 아직 이런 주제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한국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 영화가 크게 문제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바람난 남자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기자"였던 것도 그 이유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당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니 바람날 만하다는 옹호론이 기억난다).
바로 얼마 전 타계하신 안정효 선생이 스스로를 "헐리우드 키드"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적어도 필자는 고백하자면 "내셔널지오그래픽 키드"였던 것임에 틀림없다.
90년대 들어서던가 이 잡지의 한글판도 나오기 시작하고 먹고 살기가 나아지면서 영문판도 비로소 제달치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때가 되면 이미 필자에게 이 잡지는 단순한 "사진잡지"는 아니었다.
이 잡지가 일반인뿐 아니라 당시 전문가들에게도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했다.
미국의 관련학회에 이 잡지의 시니어 에디터가 한번 뜨기라도 하면, 단번에 좌중의 중심이 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 에디터들은 지금 다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아 참.
필자가 처음 조선시대 미라를 접한 것이 2001년. 단국대 교수로 있을 때였다.
유명한 소년 미라였는데, 그 당시 석주선박물관장이 바로 손보기 선생이셨다.
이 미라는 처음 석주선박물관에서 조사한 무덤에서 발견되어 그 다음 단국대 의대 해부학교실에 조사의뢰가 왔었는데, 당시 이 만남이 필자가 조선시대 미라를 처음 조사하게 된 계기였다.
필자로서도 조선시대 미라를 처음 보는지라 망연하던 차에, 당시 석주선 박물관장-손보기 선생이 하신 말이 아직 기억 난다.
"내가 어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찾아봤는데 말야, 거기에는 미라 조사를 어떻게 했냐 하면..."
그것이 한국에서의 조선시대 미라에 대한 과학적 조사의 첫발이었다고 해도 좋다.
손보기 선생도 댁에 이 잡지 과월호를 비장하고 계셨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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