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하는 세계유산으로 흔히 다음 세 가지를 혼용해서 마구잡이로 씁니다.
1. 세계유산 world heritage
2. 인류무형문화유산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
3. 세계기록유산 memory of the world
하지만 이 세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세계유산과 인류무형유산 두 가지는 각기 그들의 존재를 가능케 한 국제협약에 근거를 둡니다. 쉽게 말해 각국이 이런이런 협약을 만들고 그것을 준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그에 일정 국가 이상이 비준함으로써 발효하는 협약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 것입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에 등재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 회의. 독일 본.
이를 다시 상론하자면, 먼저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유엔의 전문기구 중 하나인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the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UNESCO)가 1972년 11월 16일 채택한 세계문화자연유산보호에관한협약(the 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 약칭 세계유산협약(the World Heritage Convention)에 기초를 두고 벌이는 사업입니다.
이 협약은 1975년 12월 17일에 비준국이 20개국에 도달함으로써 마침내 실제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협약에 '뛰어난 보편적 가치(the 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를 지닌 것들을 선정해 세계유산 리스트(world heritage list)에 등재(inscription)토록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기존에 등재된 것 중에서도 보존관리가 심대한 위험에 처한 곳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the List of World Heritage in Danger)'에 올리기도 합니다.
이 세계유산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협약 정식 명칭을 보시면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라고 한 대목이 그것입니다. 유산을 두 가지 범주(categories)로 나누었는데, 그 기준은 글자 그대로입니다. 인간이 남긴 흔적이냐, 아니면 인간의 간섭없는 자연의 흔적이냐에 따른 것인데, 이 둘은 실은 족보가 다릅니다. 다른 족보를 하나로 엎어쳐서, 하나의 협약으로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둘은 큰 틀에서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은 비슷하나 그 세부로 들어가면 프로세스를 달리합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사전 등재를 심사하는 기구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유네스코는 한국 정부 조직으로 빗대면 행정조직입니다. 각국 혹은 여러 개 국가가 한데 힘을 모아 이런이런 것을 세계유산 목록에 올려주십시오라는 요청을 하면, 유네스코 자체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거나, 하기 힘든 구좁니다. 왜냐? 행정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해야 합니다. 우리 행정부는 보통 이럴 때 외부 전문가 집단에게 맡기게 되는데, 문화재 행정에서는 문화재위원회라는 것을 두게 됩니다. 전자를 보통은 연구용역 혹은 평가용역이라 하고, 후자를 보통 심의를 부친다고 하는데, 특별한 돌발변수가 없는 한, 정부기관에서는 이들 전문가 집단 평가 결과나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를 따릅니다. 왜? 그래사 뒷말이 덜 나고, 일이 터지면 우린 그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지요.
세계유산도 이와 근간이 똑같습니다. 문화재위원회는 그것이 다루는 안건에 따라 여러 개 분과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계유산은 애초 이질적인 문화유산과 자연유산 두 범주가 있기에 이에 따라 그것을 사전에 심사 평가하는 기관이 다릅니다. 이 일을 담당하는 기관을 자문기구(Advisory Bodies)라 하는데, 세계유산과 관련한 자문기구로는 크게 세 곳이 있으니, 이코모스(ICOMOS·International Council on Monuments and Site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와 세계자연보호연맹(IUCN·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 그리고 이크롬(ICCROM·ㅅhe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Study of the Preservationand Restoration of Cultural Property)이 그것입니다.
문화유산은 이코모스 몫이고, 자연유산은 IUCN 몫이며, 이크롬은 뭐랄까 그 정책 방향에 관한 철학 혹은 논리 개발 담당이랄까, 혹은 교육 담당이랄까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들 세 자문기구 중 이코모스와 IUCN은 그에 대한 영어 약자인데 이크롬만은 뉠리리 짬뽕이라, 무엇의 약자인지 저는 아지 못합니다. 암튼 족보 수상한 국제기구입니다.
2018년 12월 현재 세계유산은 1천92건인데 여러 국가에 걸친 소위 초국경(Transboundary)유산이 37건이고, 위험에 처한 유산은 54곳입니다. 요즘은 초국경 유산이 점점 많아지는 추셉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가 삭제된 곳이 두 곳 있습니다. 독일 드레스덴 엘베계곡(Dresden Elbe Valley)이 2009년 세비야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삭제되었는데, 이 당시 제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나아가 아라비아 반도 오만(Oman)의 아라비안 오릭스 보호구역(Arabian Oryx Sanctuary)도 그보다 2년 전인 2007년 세계유산과의 인연을 끊었습니다. 오릭스란 영양 일종입니다.
세계유산 1천92건 중 문화유산이 845건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자연유산은 고작 209건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167건은 뭐냐? 이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해서 이른바 복합유산(Mixed Heritage)이라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복합유산이 따로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암 것도 아니라, 복합유산은 자연유산이기도 하면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복합유산에 대해서는 사전 등재 심사를 앞서 말씀드린 이코모스와 IUCN 두 곳에서 각기 합니다. 왜? 나와바리가 달라서지요.
그렇다면 복합유산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했는데, 그 결과가 다를 때는 어찌할까요? 살아남은 쪽만 살아남습니다. 예컨대 설악산만 해도 우리는 흔히 자연유산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거기에 백담사가 있고 신흥사가 있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합쳐서 복합유산 신청을 했다 칩시다. 한데 유네스코(혹은 자문기구)에서 볼 적에 자연유산은 훌륭해서 세계유산이 될 만한데 백담사니 신흥사니 하는 문화유산은 영 아니다고 해서 그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유산만 덜커덩 등재됩니다.
세계유산을 한 곳 이상 보유한 국가는 167개국입니다. 요새 등재 추세를 보면, 세계유산을 한 곳도 보유하지 않은 국가를 우선 고려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계유산도 사업입니다. 더구나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유네스코로서는 가장 성공한 사업입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업이 더욱 번창하려면 나와바리를 늘려야겠지요? 좀 더 많은 나라에 팔아먹어야 할 거 아닙니까?
인류무형문화유산 사업 역시 국제협약를 존재 기반으로 삼습니다. 유네스코는 2003년 10월 17일, 제32차 총회에서 무형문화유산보호를위한협약(the 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을 채택하게 되는데, 이는 2006년 4월 20일 마침내 비준국 30개국에 도달하자 마침내 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세계유산협약 효력 비준국가가 20개국인 데 비해 무형유산협약은 30개국 점이 다른 듯합니다.) 협약 명칭 그대로 멸실 위기에 처한 무형유산 보호를 위해 채택한 제도입니다. 이 사업은 뒤에서 곧바로 얘기할 세계기록유산어 현재 그런 것처럼, 애초에는 유네스코가 벌이는 자체 프로그램이었다가 나중에 덩치를 키워 국제협약을 기반으로 삼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반면 세계기록유산은 이런 국제협약이 아니라 유네스코 자체로 벌이는 사업입니다. 유네스코 사무국이 우리도 이런 거 하나 해 보자 해서 만들어낸 사업입니다. 그러니 위상을 비교하면 전자 두 가지가 올림픽인데 견주어 기록유산사업은 전국체전입니다. 엄연히 권위와 권능은 다르지요.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에 해당하는 영어 표기 'Memory of the World'를 우리는 '세계기록유산'이라 옮기지만, 실은 정확한 번역은 '세계의 기억'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를 '세계기억공정(世界记忆工程)'이라 옮기고, 일본은 '유네스코기억유산(ユネスコ記憶遺産)'이라 번역합니다. 이는 세계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기록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벌이는 프로그램이지요. 등재 대상은 ▲ 한 국가를 초월해 세계사와 세계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준 자료 ▲ 역사적 중요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거나 그 시기를 특별한 방법으로 반영하는 자료 ▲ 세계사 또는 세계문화 발전에 기여한 지역, 인물, 주제에 대한 정보를 지닌 자료 ▲ 형태와 스타일에서 중요한 표본이 되면서 뛰어난 미적 양식을 보여 주는 자료 등입니다. 이밖에도 완성도 또는 완전성에 있어 탁월한 자료, 독특하거나 희귀한 자료에 해당하면 등재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기록유산 등재 유산 유형은 광범위합니다. 필사본, 도서 등 글자 형태의 기록이 담긴 자료와 그림, 프린트, 지도, 음악악보 등 비문자 기록 자료는 물론 전통적인 움직임과 현재의 영상 이미지, 오디오, 비디오, 원문과 아날로그 또는 디지털 형태의 정지된 이미지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전자 데이터가 해당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기록유산은 유네스코 사업 중에서 가장 성공작이라는 세계유산 사업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유네스코 사업은 벌이는 주체에 따라 기구 자체가 벌이는 사업과 회원국들이 약속한 협약에 따라 벌이는 사업이 있습니다. 세계유산은 협약사업인 반면 세계기록유산은 유네스코 자체 사업입니다. 이런 자체 사업에 유네스코는 ○○ 프로그램이라는 명칭을 붙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세계기록유산은 세계유산에 비해서는 그 명성이나 지위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록유산 사업은 1992년에 시작됐습니다. 실무는 유네스코 일반정보사업국 산하에 이 사업 수행을 위해 설치된 국제자문위원회(International Advisory Committee·IAC)에서 맡게 됩니다. 이 자문위에는 사서, 법률전문가, 교육학자, 저술가, 문서관리 전문가 등 30여 명이 활동 중입니다. 이에서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임명하는 위원 14명이서 쏙딱쏙닥하며 기록유산 등재를 심사하게 됩니다. 회의는 통상 2년마다 각국을 돌아가며 개최합니다.
그렇다면 유네스코는 왜 이런 사업을 벌이게 되었을까요?
세계유산은 동산문화재와 부동산문화재 중에서도 부동산만을 대상으로 하고, 그것을 자연유산(natural heritage)과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이것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동산 문화재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어찌해야 하느냐?
인류무형문화유산 한산모시짜기
그렇게 해서 바로 별도 국제협약을 만들어낸 것이 무형유산입니다. 무형유산은 잘 아시겠지만 서구 유럽에서는 없던 개념입니다. 주로 한국과 일본에서 태동한 개념이지요. 실제 이를 성사케 한 원동력이 된 국가가 바로 한국과 일본입니다.
자, 부동산도 됐고 무형도 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문화재라고 하면 이 두 가지로 커버가 될까요? 안 됩니다. 덩치가 큰 다른 하나가 빠졌으니 부동산에 대비되는 동산 문화재를 유네스코가 방치하는 결과를 빚은 겁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동산문화재도 우리 유네스코가 어떻게든 먹어보자 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세계기록유산입니다.
하지만 세계기록유산을 국제협약으로 만들려고 하니, 시일이 걸리고 여러 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국제협약으로 나중에 가건 말건, 이건 일단 급한대로 유네스코 자체 사업으로 해보자 해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기록유산사업입니다.
이 세 가지를 보면 유네스코가 접근하는 문화재 확장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세계유산을 통해 종래의 유산이라고 하는 가장 구찌가 큰 것을 선점했고, 그러다 보니 무형이 빠져서 이것도 먹자 해서 인류무형유산을 만들어내고, 또 그러다 보니 언제건 옮겨다닐 수 있는 문화재가 빠지니 그 그물망을 치자 해서 세계기록유산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형태가 더 나올 지 모릅니다.
우선 세계기록유산을 세계유산이나 인류무형문화유산처럼 별도 국제협약을 만들어 범위를 확장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때 논의되기도 했다고 들은 듯도 없으니,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지금의 세계기록유산 사업이 동산문화재 중 document라는 특성이 농후해 문자 자료 혹은 영상이나 동영상 같은 기록성이 짙은 문화유산에 집중되는 바람에 그에서 벗어난 동산문화재들은 어찌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도 유발하게 됩니다. 예컨대 우리네 같은 경우 '신라인의 미소'로 알려진 신라와당 같은 것은 어찌해야 하는가? 이에 주목한 새로운 사업이 펼쳐지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이상은 과거 내 정리자료를 기반으로 삼되, 그 정확성과 상세함을 보강하는데는 문화재청 세계유산팀 김지홍 사무관과 이곳 출신 임경희 현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관 도움이 많았음을 밝힌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오류 등은 전적으로 내 책임에 귀속한다. 향후 계속 보완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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