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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1) ‘怪物(괴물)’의 출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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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원고는 2010년 11월 6일 가브리엘관 109호에서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개최한 그해 추계학술대회에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라는 제목을 발표한 글이며, 그해 이 학회 기관지인 《한국고대사탐구》 제6집에는 '‘世紀의 발견’, 『花郞世紀』'라는 제목으로 투고됐다. 이번에 순차로 연재하는 글은 개중에서도 학회 발표문을 토대로 하되, 오타를 바로잡거나 한자어를 한글병용으로 하는 수준에서 손봤음을 밝힌다. 



1. ‘괴물怪物’의 출현 


 역사는 두 개의 축을 갖는다. 둘 중 하나만 무너져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소설’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인간과 자연이 얽어내는 파노라마다. 시간 혹은 공간을 무시한 역사 구축은 이미 역사의 영역을 탈출해 신화, 혹은 판타지의 영역이 된다. 이런 점에서 작금 인기리에 방영한 MBC 사극 《선덕여왕》은 이 두 개의 축을 모두 붕괴한 토대에서 구축한 ‘소설’이요 판타지다. 


 우선 드라마는 공간을 무시한다. 예컨대 드라마 초창기에 진평왕의 쌍둥이 딸 중 동생으로 설정한 선덕은 아마도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쯤으로 생각되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여기에서 온갖 간난을 겪는 것으로 설정한 점이 그것이다. 나아가 《선덕여왕》은 시간을 무시한다. 이 드라마를 엮어가는 주된 축 중 한 명인 김유신은 595년생임이 각종 기록에서 명백하며, 나아가 나중에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 김춘추는 604년생이지만, 이런 ‘시간’은 오직 9살 차이인 김유신과 김춘추 두 명의 관계에 대해서만 설득력을 지닐 뿐, 그 외 우수마발牛溲馬勃은 모조리 시간 무시다. 선덕에게 시종 맞서 권력욕의 화신처럼 그리는 미실美室은 드라마에서 10대 때 김유신이나 20대 때 김유신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더불어 미실의 가장 주된 참모 역할을 한다고 묘사한 설원랑은 이 드라마의 원전 격인 《화랑세기》에 의하면 549년에 태어나 건복建福 23년, 즉, 606년 7월에는 향년 58세로 죽어 이미 퇴장해야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계속 생존했다. 문노라는 인물 또한 같은 《화랑세기》에는 설원랑과 같은 해에 저승길로 가거니와, 이 무렵 김유신은 12살에 지나지 않지만, 드라마는 이런 김유신이 청년이 되어서야 문노를 독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처리해 퇴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선덕여왕》은 사극이라면 으레 숙명과도 같은 논란, 즉,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했느니 아니했느니 하는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 나로서는 기이하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하사극을 표방한 드라마는 언제나 이런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 드라마는 이 괴물의 출현 없이는 태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화랑세기》라는 이 괴물을 충실히 재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선덕여왕》은 시간 무시, 공간 무시라는 기법을 통해 《화랑세기》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는 《화랑세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언제나 《화랑세기》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에 《화랑세기》는 족쇄다. 


 이 괴물은 여타 괴물이 그렇듯이, 그리고 봉준호가 탄생시킨 ‘한강 괴물’이 그랬듯이, 1989년에 홀연히 등장했다. 왜 홀연이라 하는가? 이름만 전해지다가, 혹은 그 편린 중 한두 조각만이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갑자기 그 전모에 가까운 모습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홀연은 필연적으로 혼란을 낳는다. 


 일서(逸書)의 출현. 이런 사건은 늘 대하드라마가 역사 왜곡 논란이 휘말리듯이 ‘괴물’ 《화랑세기》 또한 텍스트 그 자체가 이미 출현과 더불어 거센 진위 논쟁에 휘말렸다. 이 논쟁은 그것이 출현한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의 기미는 없다. 《화랑세기》라는 말은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에 보인다. 이에 이르기를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에 의한다면 《화랑세기》 외에도 여타 김대문의 저술은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인종 시대 무렵(1134)에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더불어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576) 조에서는 신라에 화랑 제도가 창설된 연원을 기술하는 와중에 金大問이 《花郞世記》에서 했다는 말로써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라고 하고, 같은 인용 구절이 같은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김흠운 열전에도 보인다. 


 이 외에도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더러 보이거니와,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조에 이르기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고 하며 이와 흡사한 언급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남해왕南解王 조에도 같은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있다. 


 또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條에서는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음을 언급하면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해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이을지어다’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고 하고,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조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 다음에 金大問의 말이라면서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했다. 


 김대문에서의 인용은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조에서 이 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사실을 전하면서, 이를 마련한 그 유명한 사건, 즉, 이차돈의 순교를 전하거나와 《삼국사기》는 이것이 “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김대문 혹은 《화랑세기》의 흔적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아직도 남아있다”는 김대문의 저술은 《화랑세기》를 포함해 모조리 멸종됐다. 이렇게 멸종됐다는 그의 저술 중 홀연히 《화랑세기》가 출현했다는 데 이것이 어찌 ‘사건’이 되지 않겠으며 ‘괴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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