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2010년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가 공간하는 잡지 <<일본공간>> 8호에 투고한 내 논문 '한일간 문화재 반환, 우리를 반추한다' 중 말미다.
Ⅵ. 우리 안의 반환 청구 문화재
이 글 첫 머리에서 필자는 경복궁 경내에 있는 異質의 석조문화재 2건을 언급했다. 그 중에서도 필자 또한 열렬히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열망한 한 사람으로서, 경복궁 경내에 선 그 복제비를 보면서 이제 5년이 흐른 지금은 그런 열정이 상당 부분 식었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은 “차라리 북관대첩비를 반환받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에 그대로 두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북관대첩비가 반환되어 북한으로 돌아감으로써 이제 그것이 대표하는 제국 일본의 한국문화재 약탈을 생생히 증언하는 실물 하나가 줄어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북관대첩비가 일본에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왔다는 흔적은 기록으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 복제비를 보는 지금은 마음 한 켠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와 나란한 지광국사 현묘탑은 어떠한가? 한국전쟁의 폭격에 워낙 산산조각이 났다는 이력을 고려한다고 해도, 왜 현묘탑은 그 일란성 쌍둥이라 할 지광국사 현묘탑비와는 여전히 떨어져 있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제자리를 떠나 遊離 생활을 하는 ‘우리 안의 문화재’가 현묘탑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또 다른 비극이 숨어있다고 필자는 본다.
2005년 개관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적지 않은 석조문화재가 있다. 개중에는 필자의 고향인 경북 김천 갈항사 터에서 실어 나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한 쌍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야외 석조물 또한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이들 석조물 앞에 반드시 있는 문화재 안내판과 그 내력을 추가로 조사해 보면, 그 대부분이 식민지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징발’해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빛내기 위해 긁어모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왜 아직 이곳에다 눌러 놓느냐고 윽박지르는 식으로 따질 수만은 없다. 피치 못할 사정도 있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박물관에 수장되고, 국가와 국민의 소유물이 됨으로써 그것이 지금처럼 보존되게끔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일조했다고 긍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제자리를 떠난 저들 석조물을 국립박물관 뜰에다가 세워놓을 수는 없다. 저들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물론 이런 주장에 박물관 측은 “현지에서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흔히 댄다. 하지만 저런 논리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피식민지 국가의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한 반대논리와 대단히 흡사하다. 문화재를 약탈하고, 그것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논리에는 어쩌면 또 다른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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