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6월, <개벽> 제48호엔 관상자觀相者라는 인물이 쓴 "경성京城의 인물백태人物百態"란 기사가 실렸다.
말 그대로 경성, 곧 서울을 주름잡던 거물들의 모습을 풍자하듯 그린 글인데 그 말미에 이른바 '조선귀족'들도 언급된다.
그 대단한 나으리들의 모습을 볼작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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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泳綺男의 大學目藥은 광고가 잘 되얏스니 더 말할 것 업고
- 민영기(1858-1927)는 을사늑약을 반대한 덕에 '을사오적' 칭호는 듣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뒤엔 제법 친일행적이 있었고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대학목약'? 눈 목자가 들어갔으니 안약인 셈인데, 일제 때 꽤 유명한 상표였단다.
근데 그 신문 광고를 보니 둥근 얼굴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또 다른 특징도 있으나 언급하지 않겠다) 인물이 등장한다(참고자료: http://www.19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20).
위에 실은 민영기의 사진을 보니 이와 썩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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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德榮씨의 장군머리는 참 굉장하다. 그가 달밤에 樓閣골 꼭댁이 阿房宮이라는 칭호를 듯는 집 마당에 나서면 仁旺山 인경바우와 그의 그림자가 어늬 것이 큰지 알 수 업고
- 윤덕영(1873-1940)이 옥인동 산마루에 프랑스식 집을 거하게 지어놓고 살았음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당대엔 그 머리통 생김새로 더 유명해서, 속칭 '대갈대감'이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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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李完用侯의 손툽 무러뜬는 버릇도 이상하다. 賣國하는 것도 그다지 容易치는 안은 모양이다. 그가 合倂 당시에 무슨 생각을 하느라고 손툽을 무러뜨더서 피가 다 낫다 한다. 其子 新男爵 恒九君의 입 실눅대는 것도 볼만하고
- 조선귀족하면 이완용(1858-1926) 부자를 빼놓을 수 있으랴?
그런데 그 이완용에게 손톱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니 우리네 정신을 확 깨게 한다.
매국노도 한낱 손톱 씹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인간이었던가.
그 아들 이항구(1881-1945)는 뭐만 하면 입을 씰룩이던 모양인데...
어보를 잃고서도 "꼴푸놀이"를 하러가던 이왕직 차관 이 남작은 기자들 앞에서도 분명 입을 씰룩였으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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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秉畯伯의 주먹질하고 말하는 것은 野心家의 기분이 뵈히며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로 창씨개명한 송병준(1858-1925),
"야심가" 스타일이라 "야전"으로 성을 갈았던가.
주먹을 휘두르며 말을 하였다니 요즘 어느 자리에 데려다놓으면 쓸 만 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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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丙奭씨의 이마 징그리는 것은 紅顔白髮인 조흔 풍채에 한 欠點이다.
- 민병석(1858-1940)도 경술국치에 적극 협력해 자작 작위를 받는 인물인데, 그 사진을 보면 유달리 이마가 시원하다.
그래서 이마 찡그리는 게 더 잘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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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閔泳徽씨의 눙글눙글한 것은 老來에도 如前하다.
- 휘문고 창설자로 이름높지만 재물에 밝았던 것으로 더 유명했던 민영휘(1852-1935),
그는 사진으로 보면 꽤나 까탈스러워보이는데 의외로 '눙글눙글',
남의 비위 잘 맞추고 허허 하는 면이 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러니 거부도 되었겠고 그 정치의 파도 속에서 끝까지 이기는 쪽에도 붙었겠지.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시대는 그야말로 검열의 시대였음에도 이처럼 다분히 귀족 나리들로서는 유쾌하지 않을 법한 표현이 신문이며 잡지에 적잖이 실려있다는 사실이다.
일제 식민통치자 입장에서 이들을 욕받이 삼아 민중의 '숨구멍'을 틔워놓아야 통치에 편하다고 생각해서였을지?
아니면 다른 무슨 목적이 있었을까?
거기에 하나 더, 과연 1858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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