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시대 소설 중에 《몽견제갈량》이란 게 있다.
1908년(순종 2) 유원표(1852-?)가 저술한 국한문혼용체 정치소설로, 유원표 자신이 비스마르크 전기를 읽다가 소르르 낮잠에 빠지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그러다 꿈 속에서 그 유명한 제갈량을 만나 동아시아 삼국, 특히 중국과 한국이 살아날 방법을 두고 문답을 주고받는 내용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있던 《삼국지연의》에 편승하는 듯 하면서도
정작 저자는 《삼국지연의》에 빠진 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제갈량을 내세워 일종의 '이이제이'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애국계몽(갑자기 소름이...) 운동기에 적잖이 나타난 몽유록계 소설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몽견제갈량》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천하역적 일당 이완용(1858-1926)이 역시 꿈에서 제갈량을 만났다고 해서이다.
《일당기사》 연보에 따르면 1917년 12월 12일 밤, 이완용은 <중추원관제개정안건>을 들고 꿈속을 걷고 있었다.
그 '감정'을 위해서 고인이 된지 오래인 한성판윤 이채연(1861-1900)과 함께 산간의 작은 길을 걸어 한 초당에 찾아드니, 거기 '제갈공명 선생'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나아가 절을 드리고 약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꿈에서 깨었다는데...
'역대의 무용지물'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가 뭣이 중하다고 제갈량을 찾아가 '감정'해주십사 할 건 무엇이며,
미국을 같이 다녀오고 같은 독립협회 창립멤버로 동고동락한 옛 동지 이채연은 또 왜 뜬금없이 그의 꿈에 찾아왔을까.
기왕이면 초대 회장 안경수(1853-1900)까지 나와야 유.관.장 삼형제의 삼고초려가 성립될 것을...
하지만 그렇게 찾아온들, 내가 제갈량이라면 아마 '완용 리'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나는 없는 나라도 만들어 지켰는데, 너는 있는 나라도 팔아먹었구나?"
무슨 <몽유도원도> 같은 이런 이야기까지 버젓이 적어놓은 걸 보면 아무래도 《일당기사》 연보는 이완용이 쓴 일기를 토대로 취사선택한 모양이다.
그 일기는 다 어디로 갔을지 모를 일인데, 만약 전질이 남았다면 《윤치호 일기》급 대접은 받았음직도 한데 말이다.
'探古의 일필휘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13년, 이완용의 경주 유람기 (1) | 2025.01.25 |
---|---|
1896년, 독립협회 창립 주축 멤버들 (1) | 2025.01.18 |
커피에 오트밀을 즐긴 이완용, 술은 마시지 않았다 (3) | 2024.12.30 |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찍먹 감상기 (3) 유물의 팔자 (24) | 2024.12.26 |
이름의 중요성 (23) | 2024.1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