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의 싸움, 오사카의 진을 거치며
에도막부를 마침내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다만, 에도막부는
이 막부를 쓰러뜨릴 전쟁이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하고
그 최후의 전쟁, 반 에도막부 세력과의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질 시기에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도록 막번체제를 설계하였다.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에 도전할 아마겟돈 전쟁을 어떻게 준비했을까?
그 이야기를 좀 적어보겠다.
먼저 다이묘大名의 분봉.
에도시대 다이묘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신판親藩, 후다이譜代, 도자마外樣 다이묘가 그것이다.
신판 다이묘는 도쿠가와 집안의 혈족이 영주인 번이다.
후다이 다이묘는 도쿠가와 집안이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이겨 천하를 손에 넣기 전부터 이에야스를 따라다니며 신종하던 집안이 영주인 번이다.
이 신판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는 믿을 수 있는 친 도쿠가와 세력이라고 이에야스는 보았다.
반면 혈족도 아니고 세키가하라 싸움 이후에야 도쿠가와 아래로 들어온 영주들,
이들이 바로 도자마 다이묘인데, 앞의 두 다이묘에 비해서는 믿을 수 없는 세력으로 보았다.
특히 세키가하라 이후 이에야스의 반대편에 섰다가 간신히 살아 남은 다이묘들이 서부 지역의 도자마 다이묘로 재배치되었다.
혹시 머리를 쳐들까봐 영지의 크기도 엄청 줄여 분봉했다.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서군의 맹주 역할을 한 모리 테루모토의 경우,
그야말로 목숨만 붙여 서쪽 끝인 야마구치 현 지역에 배치했다.
이 번이 바로 죠슈번으로 300년 후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도쿠가와씨를 타도하게 되었다.
어쨌건 에도 막부는
에도와 쿄토를 연결하는 소위 도카이도 주변 지역은
믿을 만한 신판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를 직접 배치하고
그보다 먼 지역에 도자마 다이묘를 배치하였다.
에도막부가 흔들리는 최후의 아마겟돈 전투가 시작되면
주변 도자마 다이묘는 독립하고 반막부의 전쟁을 시작해도
에도와 쿄토를 중심한 신판, 후다이 다이묘 지역은 여전히 친막부파로 남을 것이라 본 것이다.
다이묘를 일본 전국에 이런 식으로 배치한 것은
명확히 에도막부가 유사시 반막부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한 장기적 포석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 수 없겠다.
우리가 후삼국 시대를 보면, 고려와 후백제가 독립한 후에도 경상도 지역이 여전히 신라의 세력으로 남아
후삼국 정립 후에도 무려 한 세대를 더 버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후삼국시대의 신라 영역, 이것이 바로 에도 막부의 신판다이묘, 후다이 다이묘의 지역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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