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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철의 고고통신

인동총忍冬塚?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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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갑자기 인동총忍冬塚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기본자료는

홍사준, 1970, 유문개有文蓋의 청동합靑銅盒, 《고고미술》 제3권 제1호(통권 18호)

위치에 대한 내용은

齋藤努·藤尾慎一郎, 2010, 《日韓青銅製品の鉛同位体比を利用した産地推定の研究》, 国立歴史民俗博物館研究報告 第158集

에 대략적인 범위로 표기가 되어있다.


 

 

 

 

*** (台植補) ***

 

인동총이라는 말이 금시초문이라, 저 차순철 선생 소개에 즈음하여 관련 자료를 검색했더니만 인동총이라 명명한 데는 없다. 학술명칭으로 채택할 수는 없다. 

 

문제의 청동합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이라는데 나는 본 적 없다. 

 

다만 홍사준 저 글을 훑어보니 아래가 전문이라 옮긴다. 주술관계가 맞지 않는 데가 더러 있고 표현 역시 시대를 풍미한 일본투지만 그대로 두며, 한자는 병기하거나 문맥 이해에 문제가 없는 곳은 한글 음으로 표기한다.

 

 

홍사준, 1970, 유문개有文蓋의 청동합靑銅盒, 《고고미술》 제3권 제1호(통권 18호)

 

1961년 11月 11일에 경주도시계획에 의한 시청 앞 도로 남측에 하수도구下水道溝를 동서로 신설하기 위하여 개구開溝공사에서 의외의 적석총積石塚이 100m를 격隔하여 2기가 발견되었다. 그 1기에서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은 나대羅代 유물이 기타 토기와 섞여서 발견되었는데 이 청동기가 출토됨을 보아 적석총 중심부를 측구側溝가 통과한 것 같은데 시급히 학술조사가 요要한다고 보는 바 지금까지 발굴에 착수치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되는 바이다.


현품現品은 총고總高 (개부蓋付)가 12.5㎝로 盒의 高 8㎝, 구경口徑 19㎝, 하저경下低徑 8인데 그릇의 굽은 기체器體와 붙여서 만들어졌으나 내면에서 보면 반구형半球形으로 되었다. 합盒의 외표外表에는 구연口緣에 2조條 중원重圓이 둘러 있고 구연을 평행해서 기복器腹에도 등간격의 철대凸帶가 2조로 둘러있다.  

 

합개盒蓋는 高 4.5에 개경蓋徑이 14.8~15.5의 타원형이나 합구盒口 내內에 맞도록 개연蓋緣이 만들어졌다. 개蓋에도 역시 등간격의 3條 철대凸帶가 개蓋의 꼭지를 중심해서 둘러있다. 그릇 꼭지는 대추씨[枣仁] 두 개를 연결한 듯 상첨중세上添中細하며 盒 전체에 비하여 작아보인다. 특히 蓋의 꼭지 주위의 원내에는 세선細線으로 인동문양忍冬文樣이 선각線刻되었는데 고구려벽화에서 보는 인동문과 흡사(이상 193쪽)하고 개변측蓋邊側에도 인동문양을 연속해서 세선으로 조각되었다.

 

발견 당시의 蓋와 盒의 상태는 뚜껑이 뒤집혀져 합구盒口에 놓여 있었는데 30도 경사져서 있었다. 그 盒內에는 별다른 유물이 있지 않았으나 합내 일부에 세마포細麻布로 인정되는 포편布片이 붙어 있는데 삭아서 손을 댈 수가 없다.

 

상개하기上蓋下器의 철대원권凸帶圓圈들은 부어뺄 적에 형型에 의한 조작 같으며 세선細線의 인동문들은 그릇이 된 후에 선각한 것으로 추측되는 바 고졸한 品이며 순박한 수법은 시대적으로 통일신라 이전의 유품이라 생각된다. (이상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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