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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자료를 기증해본 학예사가, 기증도 잘 받는다.

by taeshik.kim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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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민호 한국족보박물관 학예연구사




네번째 문화유산 나눔

박물관 학예사로 우리 박물관에서 가지지 못한 자료를 많은 국민의 기증에 의해 수집하고 전시하고 있다.

학예사는 수집을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수집가는 아니다. 학예사가 자신이 근무하는 박물관의 수집 대상이 되는 자료를 수집하는 행위는 이해충돌 방지법에 저촉되는 동시에 학예사 윤리 규정을 위반할 소지가 많다.

학예사가 개인 수집가로 활동하게 되면 박물관이 소장해야할 자료를 업무상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선취하여 소속 기관을 상대로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학예사는 물욕을 버려야 한다.

나는 공무원 힉예사의 길에 발을 들이는 첫 의식으로 내가 일하기 시작하는 박물관에 기증을 했다.

한국족보박물관이 개관을 준비하는 2009년 업무를 시작하고 보니, 그동안 공원과의 녹지직과 행정직 공무원들이 수집해 놓은 자료는 최신판 족보 자료였다. 박물관 자료라고 부르기 어려운, 도서관 열람실에 있을 법한 자료를 철제 캐비넷 두개 분량을 인수 받았다.

나는 내가 개관하게 될 박물관의 유물 수집 첫번째 업무로 당시 내가 보관하고 있던 외갓집 족보를 기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옛집을 허물고 새롭게 신축하며, 오래된 물건들을 고물장수가 가져갔다.

그리고 나까마라 부르는 고물장수들에게 내주지 않은 외가의 필사본 “안동권씨 충정공파세계” 1책을 국문과 대학원을 다니는 외손자인 내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내가 보관하는 외가의 문화유산을 국민과 나누기 위해 스스로 한국족보박물관 제1호 기증자가 되었다.

한국족보박물관의 기증유물번호 제1번은 내가 기증한 자료인데, 박물관 개관 후 대전 서구 괴정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안동권씨 어르신들이 기증자 이름도 틀리느냐며 항의 빙문을 했다.

어찌 안동권씨 자료를 심씨가 기증했다고 하냐며 항의 하셔서, 괴정동 동사무소 뒷편에 살다 돌아가신 권모 어르신이 저의 외할아버지의 형님이시며, 이 자료는 성환에 사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유품임을 설명드리고 오해를 풀었다.

그리고 안동권씨 문중의 괴정동 사무실에서 상당한 양의 족보를 기증받게 되었으니, 내가 우리박물관에 기증한 필사본 족보 1책이 유물 수증의 마중물이 되었다고 나 혼자 자평한다.

성환에 있던 외갓집 개축과정에서 외할머니의 미싱을 가져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현재 대전시립박물관이된 대전향토사료관에 기증했다.

한밭도서관 별관에 세들어 있던 대전향토사료관이 도안 신도시 택지개발 지구에 건물을 신축하고 있을 무렵 시민 소장품 기증을 추진했다.

구청 말단 공무원 학예사인 내가, 상급기관인 시청 학예관께서 추진하시는 일에 적극협조하고자 민속자료로 활용하기를 희망하며 외할머니의 미싱을 기증했는데, 미싱이란 물건이 아직까지는 잔존 수량도 많고 연대가 높은 자료가 아닌 관계로 전시실에서 구경한 적은 없다.

언젠가는 전시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하고 있다.


나는 대전 중구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직장도 대전중구청이다. 아버지께서 대전으로 나오셨는데, 선대는 금산군 서대산 아랫동네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셨다.

할머니께서는 9살에 민며느리로 시집오셔서 온갖 궂은일을 하시며 자식들을 기르셨는데, 남의 인삼밭에 가서 일을하시고는 인삼으로 품삯을 받아 경주, 포항 등지로 인삼을 파는 행상을 다녀오셨다.

그때 인삼 행상을 다니시며 삼의 무게를 재는 손저울을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 유품 정리과정에서 다 태워버리는 것을, 내가 집어왔다.

손저울은 나무로 만든 균형대와 조약돌을 매단 무게추로 된 작은 물건이었다. 여성 행상이 가지고 다니기에 무겁지 않고, 인삼이란 약재를 소량으로 유통하는 행상이 기지고 다니기에 알맞은 계측 도구였다.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 인삼박물관을 만든다고 할 적에 기증했다. 기증 후에 생각해보니 손때 묻은 작은 손저울이 나에게는 의미가 깊은데 그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별 의미가 없을 듯했다.

근사한 미술픔도 아니고, 어떤 역사적 기록도 아닌 민속품은 삶의 흔적이 담긴 지역 박물관으로 기증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당시에 금삼군에서는 박물관이 없었던 관계로, 풍기 인삼박물관으로 기증하게 되었으니, 지방자치단체는 하루라도 빨리 박물관을 지어야 지역 문화유산의 외부 유출을 막을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세 번의 기증은 조부모님으로 부터 물려 받은 문화유산을 나눔하는 일이었다면, 네 번째 기증은 내가 사용하던 물건이다.

설화, 전설을 조사하고 돌아오면, 채록한 테이프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며, 녹취 전사자료를 만드는 일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60분 짜리 테이프를 전사하는 작업은 녹음 상태에 따라 2-3일에서 열흘씩 걸리기도 한다. 노인분들의 부정확한 발음과 사투리를 이어폰을 꽂고 반복해서 듣다보면 정신이 혼미해져 집중력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타이핑 속도에 테이프의 같은 구간을 반복적으로 재생해서 듣는 일이 3번에서 10번이 넘어가기도 한다.

속기사셨던 큰아버지께 수기로 하는 속기를 배워보기도 하였으나, 속기록을 해독하며 다시 전사하는 작업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리는 작업인지라, 당시 개발된 컴퓨터 속기를 민속조사에 활용해보고자 2000~2002년 무렵에 150만원 정도의 컴퓨터 속기 키보드를 구입했었다.

두 벌씩 키보드 자판의 경우 초성, 중성, 종성을 각각 타이핑 해야하기 때문에 음절당 2타~3타를 쳐야 하기 때문에 말의 속도를 타자로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초-중-종성을 한번에 눌러, 1음절당 1타로 타이핑하는 컴퓨터 속기를 민속조사에 활용하면 효율성이 좋을거 같아 시작했지만, 속기는 역시 잘 훈련된 전문가의 영역이었고, 나처럼 연구의 보조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익숙해지기 어려운 장비였다.

연초에 집에 25년 가까이 잘 모셔두었던 속기 키보드가 한글박물관에 수집품으로 있을까 긍금했다. 타자기가 전시되고, 타자기를 소장품으로 수집하고 있다면 앞으로 키보드도 수집할 것인데 한글 속기 키보드가 필요할 것 같았다.

김희수 전시과장께 연락하니 담당자를 연결해 주었고, 기증 의향서를 접수하고 석달쯤 지나 기증 절차를 진행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진동 차량을 보낸다는 담당학예사의 전화에 화들짝 놀라 우편으로 보냈다. 무사히 잘 도착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바로 잊었다.

마음도 홀가분해 졌다. 당시 수능국어과외로 학생 한 명당 월 15~20만원 정도 받았으니, 열달치 과외비를 모아 산 것이라는 아쉬움에 버리지도 못하던 물건이었는데, 기증으로 새로운 활용의 기회를 만들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한글박물관에서 기증증서와 함께 기념품이 왔다. 이거 겨우 키보드 한 개 기증하고 기증 증서를 받으니 민망한 기분이다. 여기에 도자기 기념품까지 받으니 몸둘바를 모를지경이다.

버리지도 못하고 애물단지처럼 가지고 다니던 물건을 문화유산 나눔이라는 거창한 의식으로 내게서 떠나 보냈으니 오히려 보관료와 감사의 선물을 박물관에 드려야 할 것인데, 거꾸로 선물을 받았다.

박물관 학예사는 자료 확보를 위한 수집활동으로 기증을 권유하고 다니지만, 정작 기증을 먼저 해본 학예사는 많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기증자의 마음를 알기 위해서 학예사가 기증을 실천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우리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한 다른 박물관의 학예사들도 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자, 제1호 타박물관 학예사 기증자는 당진시청(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고대영 학예사다.

고대영 학예사의 아버지께서 소장하고 계시던 제주고씨족보는 문중 족보자료로써 뿐만 아니라, 삼성혈 이야기로 성씨 신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상설전시, 용을 그리다 특별전시 등 여러 차례 활용한 고마운 자료다.

자료를 기증해본 학예사가, 기증도 잘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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