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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한국인명지명사전

자장(慈藏)

신라 중기 때 고승. 김씨(金氏). 아버지는 소판을 지낸 무림(茂林)이다. 인평(仁平) 3년(636), 왕명에 따라 제자 10여 명을 데리고 당(唐)에 들어가 청량산(淸凉山)에서 수도했다. 선덕왕 12년(643) 귀국하고, 2년 뒤인 동왕 14년(645)에 창건한 황룡사탑 발원자다. 불학 중에서도 율학(律學)의 대가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5년(636)...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 말하였다.두꺼비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듣건대, 서남쪽 변경에 이름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니 혹시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명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갑자기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12년(643)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배우던 고승 자장(慈藏)이 돌아왔다. 14년(645) ..3월에 황룡사탑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자장(慈藏)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35년(574)에는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였다. 혹 전하기를 아육왕(阿育王)이 띄운 배가 황금을 싣고 사포(絲浦)로 들어왔으므로 (그것을) 가져와 주조했다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자장전(慈藏傳)에 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진덕왕(眞德王) :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태종춘추공 :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뚱이는 둘이요, 발은 여덟이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육합(六合)을 통일할 상서(祥瑞)입니다." 이 왕대(王代)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과 아홀(牙笏)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삼국유사 권 제3 흥법(興法) 제3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이상(泥像)은 아도(我道)·염촉(염촉)·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이상(泥像)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 뒤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해서 감응하여 비결(秘訣)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했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黃鐵)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려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三尊佛)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安置)했다.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년 갑진년(甲辰; 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住持)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菩薩像)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불법을 전해주는 것을 감응해서 얻었는데(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실려있다),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天竺)의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험한 탓으로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간사한 말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때때로 혹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한 것이다."  말을 끝내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法師)가 중국 대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오?" 자장이 대답했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물었다.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倭國)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했다.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했다.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租貢)하여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外賊)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京畿)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 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恩德)을 보답하겠소." 말을 하고 옥(玉)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 말하기를,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서 탑 세울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 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는 일을 멈춘 것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대화사大和寺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중략)...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제4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 <당승전唐僧傳>에서는 12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唐)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 구의 게(偈)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라婆佐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예치구야)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낭伽희伽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達예盧舍那)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法師)는 두루 보살(菩薩)의 유적(遺跡)을 찾아 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法師)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偈)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년(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고 하였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 동안 헐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형제(<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의 세 부자父子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니 신룡神龍 원년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다.  왕王가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이니 신문왕神文王의 둘째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 효조孝照는 이름이 이공理恭이니 혹은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이는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자는 일조日照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政明 신문神文이 잘못 전해진 것인 듯싶다.  효명孝明은 효조孝照, 혹은 소昭의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  이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다)가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라 하나 잘못이다)에 와서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각 무리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닿아 여러 날 유람하는데, 갑자기 어느날 밤에 두 형제가 속세(俗世)를 벗어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五臺山;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8월 초에 왕王이 산속에 숨었다고 했으나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싶다.  상고해 보건대,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  만일 태화太和 원년이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갑진甲辰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지났으니 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다.  이것으로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에 들어가니 그를 시중들던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禮)를 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臺)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쪽 대(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대(臺)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령산(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를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서른 여섯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혹은 부처의 얼굴 모양이 되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 모양이 되고, 또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불두(萬佛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등(萬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교(金橋)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고(金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신통(神通)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루(金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륜(金輪)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된다.  또 혹은 오색 광명(五色 光明)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圓光)의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금전(金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은전(銀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뇌전(雷電) 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오(金烏)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말이 사자(獅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닭이 봉(鳳)을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청룡(靑龍)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백상(白象)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유저(遊猪) 모양으로도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 모양으로도 변해 보였다.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 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기記에는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있은 지 20여 년이라 했다.  이는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을 잘못 전한 것이다.  그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 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王位를 다투었다고 하였는데, <국사國史>에는 그런 글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룡(神龍) 원년(이것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복위復位한 해로서 신라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이다) 을사(乙巳)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는데 이때 성덕왕(聖德王)은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 흙으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堂)에 모셨다.  그리고 이름있는 중 영변(靈卞) 등 5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石)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步)쯤 되는 의니점(矣尼岾)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結)과 밤나무밭 6결(結), 좌위(坐位) 2결(結)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영동(靈洞)의 물을 길어다가 마시더니 만년(晩年)에는 육신(肉身)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쉬었으므로 여기에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밤낮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다.  어느날 장천굴(掌天窟)의 굴신(窟神)이 현신(現身)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000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眞理)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신(神)은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그가 계(戒)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고 있다가 오대산 신성굴(五臺山神聖窟)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도利天)의 신(神)이 삼시(三時)로 설법(說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올렸으며, 40명의 성인(聖人)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修業)했다.  문수보살이 혹 보천(寶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별)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죽던 날, 후일에 산 속에서 행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산맥으로, 각 대(臺)는 진신이 항상 있는 곳이다.  푸른빛 방위인 동대(東臺) 북각(北角) 아래의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서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5명은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엔 <관음경(觀音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하고,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하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원상(圓像)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린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밤엔 <점찰경(占察經)> 예참(禮懺)을 염송하고 이곳을 금강사(金剛社)라 일컬어라.  흰 빛 바위인 서대(西臺) 남쪽 면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원상(圓像)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흰 바탕에 그린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8권의 <법화(法華)>를 읽고, 밤엔 아미타불(阿彌陀佛) 예참을 염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일컬어라.  검은 빛 방위인 북대(北臺)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불(釋迦佛)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엔 <열반경(涅槃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케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일컬어라.  누른 빛 방위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가운데에는 이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삼십륙 문수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이곳을 화엄사(華嚴社)라 일컬어라.  보천암(寶川庵)을 고쳐 세워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원상(圓像) 비로자나삼존(毗盧遮那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문장경(門藏經)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할 것이며,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이곳을 법륜사(法輪社)라 일컬어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淨行 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계속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왕(國王)은 오래 사시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도회(都會)로 삼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예참(禮懺)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齋)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조세(租稅)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代代)의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제4 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자장법사(慈藏法師)는 오대산(五臺山)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巖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鶴)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나,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갔다.  거사는 그것을 집어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후에 그는 중이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는 경주(慶州) 경계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므로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보고, 살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살 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이것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곧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모옥(茅屋)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윽고 중 다섯 명이 오더니 말한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하자 중이 또 말한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그 깃을 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폭 속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化身)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처음에 자장법사가 모옥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았다.  이로부터 점점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다섯 성중(聖衆)과 9층으로 된 석탑(石塔)은 모두 성자(聖者)의 자취이다. 상지자(相地者)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名山)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자장정률(慈藏定律) :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金氏)이니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蘇判; 삼급三級의 벼슬 이름)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맑은 요직을 지냈으나 뒤를 계승할 아들이 없으므로 삼보(三寶)에 마음을 돌려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빌었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갑자기 그 어머니의 꿈에 별 하나가 떨어져서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어서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석존(釋尊)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田園)을 내어 원녕사(元寧寺)를 삼았다.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는데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이 없어지게 했다.때마침 조정에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서 자장이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物望)에 올라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왕이 칙명(勅命)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듣고 말했다.  "내가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자장이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서 사니 양식 한 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더니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鄕邑)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자장은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고 중국으로 가서 대화(大化)를 구했다.  인평(仁平) 3년 병신(丙申; 636, 곧 정관貞觀 10년임)에 왕명(王命)을 받아 제자 실(實) 등 중 10여 명과 더불어 서쪽 당(唐)나라로 들어가서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성인(聖人)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 말했다.  "제석천(帝釋天)이 공인(工人)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冥想)하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범어(梵語)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 생각하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오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이 이야기는 이미 황룡사皇龍寺 탑편塔篇에 나와 있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하고는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은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唐僧傳>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자장은 자기가 이미 성별(聖별)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그를 위무(慰撫)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거처하도록 했다.  태종의 은총과 내린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자장은 그 번거로움을 꺼려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 동안을 살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아 영험이 날로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서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들어오자 또 칙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유(癸酉; 643)에 신라 선덕왕(宣德王)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領)과 잡채(雜綵) 500필을 하사했으며, 또 동궁(東宮)도 비단 200필을 내려 주고 그 밖에 예물로 준 물건도 많았다.  자장은 본국에 아직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이 구비되지 못했으므로 대장경(大藏經) 1부(部)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해서 모두 싣고 돌아왔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 <당전唐傳>에서는 왕분사王芬寺라고 했다)에 있게 하니, 물건과 시위(侍衛)는 조밀하고도 넉넉했다.  어느 해 여름에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게 하고 또 황룡사(黃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7일 밤낮 동안 강연하게 하니,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보고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탄복했다.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불교가 우리 동방에 번져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주지(住持)를 수봉(修奉)하는 규범(規範)이 없으니 이것을 통괄해서 다스리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하고 왕이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장하도록 했다(상고해 보건대, 북제北齊의 천보天寶 연간에는 전국全國에 10통統을 두었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職位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에 선문제宣文帝는 법상법사法上法師로 대통大統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을 삼았다.  또 양梁·진陳의 시대에는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 등 이름이 있었으니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소속되었다.  소현조昭玄曺는 승니僧尼를 거느리는 관명官名이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大德의 성盛함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에 안장법사安藏法師로 대서성大書省을 삼으니 이것은 한 사람뿐이고, 또 소서성小書省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이듬해 신미辛未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寶良法師 한 사람을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고 주통州統 9인人과 도통都統 18인人을 두었다.  자장慈藏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大國統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夫禮郞이 대각간大角干이 되고, 김유신金庾信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僧官을 두고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대사大舍 1인人과 사史 2인人을 사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才行이 있는 이를 뽑아서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有故한 때에는 바꾸어서 연한年限은 정定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율종律宗과 다른 것이다.  향전鄕傳에 보면,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 갔더니 태종太宗이 식건전式乾殿에 맞아들여 <화엄경華嚴經>의 강의를 청하매, 하늘이 단 이슬을 내려 비로소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당전唐傳이나 <국사國史>에 모두 그런 글은 없다). 자장이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가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승니(僧尼)의 5부(部)에 각각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15일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시험해서 지범(持犯)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서 이를 유지해 나가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조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하게 신칙함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에 가장 성했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雅)와 송(頌)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던 일과 같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戒)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니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새로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濟度)했다.  또 자기가 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落成會)를 열어 잡화(雜花) 1만 게(偈)를 강의하니 오이녀(五二女)가 감동하여 현신(現身)해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門人)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어 이상스러운 일들을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복장(服章)이 제하(諸夏)와 같지 않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眞德王) 3년 기유(己酉; 649)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게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永徽)의 연호를 썼다.  이 뒤부터는 중국에 조근(朝覲)할 때마다 상번(上蕃)에 있었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江陵郡; 지금의 명주溟州)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더니 북대(北臺)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이상한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자장이 놀라 일어나서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感應)하여 와 있었다.  그에게 법요(法要)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태백산(太伯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드디어 자취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太伯山)에 가서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이다."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을 세우고 대성(大聖)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늙은 거사(居士) 하나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문인(門人)이 말했다.  "내가 건추(巾추)를 받든 이래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는 게냐."  거사가 말한다.  "너는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면 된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자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필연 미친 사람이겠지."  문인이 나가서 그를 꾸짖어 쫓으니, 거사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치자 삼태기를 거꾸로 들고 터니 강아지가 변해서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빛을 내고는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威儀)를 갖추고 빛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유골(遺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대체로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瑞)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받드는 포색(浦塞)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했다.  자장이 쓰던 도구(道具)·옷감·버선과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존(釋尊)의 유의(由衣)들은 모두 통도사(通度寺)에 있다.  또 헌양현(헌陽縣; 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침압(枕鴨)이 일찍이 이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이란 중이 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갔다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자장을 도와 율부(律部)를 넓게 폈다고 한다.찬(讚)해 말한다.일찍이 청량산에 가서 꿈 깨고 돌아오니/칠편삼취(七篇三聚)가 한꺼번에 열렸네/치소(緇素)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어/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과 같이 만들었네.

삼국유사 권 제4 의해(意解) 제5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중이 될 뜻을 가지니 아버지가 허락하므로 율사(律師)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順濟)가 <사미계법(沙彌戒法)>과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가지고 미륵(彌勒)·지장(地藏) 두 보살(菩薩)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懺悔)해서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  율사(律師)는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하여 물러나와 두루 명산(名山)을 유람하니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 원년 경자(庚子; 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에 가서 변산(邊山)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5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홉을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7일이 되던 날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 주니 손과 팔뚝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精進)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자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도다."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이것은 곧 시(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번째 간자는 법(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現世)의 육신(肉身)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었다.  이 때가 임인(壬寅; 762)년 4월 27일이었다.

삼국유사 권 제5 신주(神呪) 제6 명랑신인(明朗神印) : 법사는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이니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이니 곧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이것은곧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는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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