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원위치 백률사터, 817년(헌덕왕 9) 또는 818년(헌덕왕 10) 건립.
22세, 혹은 26세이던 법흥왕 15년(528), 자신을 희생해서 이적(異跡)을 일으킴으로써 신라에 불교를 공인케 한 인물. 전자를 따르면 생몰년은 507(지증왕 8)~528년이며, 후자를 따르면 503(지증왕 4)~528년이 된다.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는 계보가 전하지만, 조부가 아진종(阿珍宗)이라는 다른 기록도 있다. 이처도(伊處道), 거차돈(居次頓), 혹은 박염촉(朴厭觸)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15년(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하였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하였다.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더니, 왕의 딸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궁궐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였는데 신봉자가 가끔 있었다. 이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였으므로 왕이 난처하였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자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왕이 말하였다. “뭇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와는 사뭇 다르다>
해동고승 권1 : 법공(法空)은 신라 제23대 법흥왕이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원자(元子)이니,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키가 7척이며 너그럽고 덕이 있어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신령스럽고 거룩해서 만백성이 밝게 믿었다. 3년(516)에는 용이 양정(楊井) 안에서 나타났고 4년(517)에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었고, 7년(520)에는 율령을 반시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주자지질(朱紫之秩)을 정했다. 즉위한 이후 항상 불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므로 왕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도(阿道)의 지극한 바람을 생각해 신하들을 불러 묻기를 "성조 미추왕께서는 아도와 함께 처음으로 불교를 펴려 하셨지만 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이후로) 능인(能仁. 석가-역주)의 묘한 교화가 막히어 행해지지 못했으니 나는 매우 슬프게 생각하오. 마땅히 큰 가람을 세우고 다시 상(像)을 조성해 선왕의 공적을 따라 좇으려 하는데 그대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고 했다. 대신 공알(恭謁) 등이 간하기를 "근자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데다 이웃 나라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해 전쟁이 쉼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을 괴롭히는 공사를 일으켜 쓸데없는 집을 지으려 하시나이까"라고 했다. 왕은 좌우가 믿음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탄식하며 이르기를 "과인이 부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왕위를 이어 받으니 음양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이 편안치 못한 것 같소이다. 그런 까닭에 신하들도 (내 뜻을) 거슬러 따르지 않으니, 누가 능히 묘한 법의 방편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수 있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오래도록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16년(529)에 이르러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이차돈<異次頓이라고도 하며 거차돈<居次頓>이라도고 한다)은 나이 26세이니 정직한 사람으로 마음가짐이 성실하고 깊어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떨쳤다. (왕의) 큰 소원을 돕고자 몰래 아뢰기를 "왕께서 만일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신은 청하옵건대 거짓을 왕명이라 속여 유사(有司)에 전하기를 '왕께서 불사(佛事)을 창건하려 하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반드시 간할 것이니 (이 때 왕께서) 바로 칙령을 내리셔서 '나는 그런 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댔는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틀림없이 신의 죄를 추궁하고자 할 것입니다. 만일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복종할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그들은 이미 완고하고 오만하니 비록 그대를 죽인다 한들 어찌 복종하겠는가"라고 했다. 이에 아뢰기를 "대성(大聖)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것이오니 만일 소신을 베시면 마땅히 천지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있다면 누가 감히 오만스럽게 거역하겠습니가"라고 했다. 왕이 이르기를 "본디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려 하거늘 도리어 충신을 해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몸을 희생해서 인(仁)을 이룸은 신하된 자의 큰 절개이거늘 하물며 불법이 영원히 빛나고 왕조의 영원한 결속을 위해서라면사 죽는 날이 바로 태어나는 해가 될 것입니다"고 했다. 왕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베옷을 입엇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라고 하며 이에 염촉과 함께 큰 서원을 깊게 맺었다.드디어 그 뜻을 전해 말하기를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니 집사들은 칙령을 받들어 일을 일으키라"고 했다. 조정 신하들이 과연 면전에서 그 일에 관해 쟁론했다. 왕은 이르기를 "나는 그런 영을 내린 적이 없노라"라고 했다. 염촉이 이에 크게 외치기를 "신이 실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이 법을 행하면 온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 참으로 경제에 유익함이 있다면 비록 거짓으로 국령을 꾸며냈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를 모아 이 일에 대해 물었다. 모두 이르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아이 머리에 누더기 옷을 입고 괴기한 의론을 일삼으니 정상의 도가 아닙니다. 만일 경솔히 그 말을 따른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죽을 죄를 범할지라도 감히 칙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고 했다. 염촉은 분명히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대개 비상한 사람이 있는 연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불교는 심오하다 하니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완강해 거절할 수가 없고 경이 혼자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말을 다 들을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형리에게 넘겨 목을 베라고 했다. (염)촉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나는 법을 위해 형벌을 받지만 부디 정의와 이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께 만일 신령함이 있으시다면 신이 죽을 때는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고 했다. 마침내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끊어진 자리에서는 흰 젖이 욧솟음쳐서 높이 수십길로 올랐다. 햇빛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선느 아름다운 꽃이 내렸으며, 땅이 크게 진동했다. 임금과 신하 백성 할 것없이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이 법을 존중하여 목숨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서로 바라보며 슬피 울었다. 그리고는 유체를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하고 예배했다. 그 때 임금과 신하들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께 귀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밝으신 신령은 우리를 죽이소서"라고 했다. 군자는 이르기를 "대성인은 천 백년만에 만나게 된다. 인(仁)은 길상을 발하고 의는 상서를 움직인다. 천지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일월에까지 뻗쳤으며 귀신을 감동시켰거늘 하물며 사람들에게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무릇 스스로 도를 믿는다면 천지도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을 이룩함을 귀히 여기고, 업은 넓힘을 귀히 여기나니, 그러므로 진실로 큰 원이 있으면 태산도 기러기 깃털보다 가볍게 된다. 장하구나 그의 죽음은 그것을 얻었도다"고 했다. 이 해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했다(국사 및 여러 옛 전기를 참고하여 생각하며 술한다). 21년(534) 천경림의 나무를 베고 정사를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주초와 석감(石龕)과 섬돌을 발견하니 과연 그곳은 옛날 초제(招提)의 옛 터였다. 대들보감으로 쓸 재목은 다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다 마치자 왕은 왕위를 사양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법공이라고 고치고 삼의(三衣)와 와발만을 생각했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으며, 일체 자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절 이름을 대왕흥륜사라고 했는데, 이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것이 신라에서 절을 창건한 시초이다. 왕비도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한 것은 헛된 찬사가 아니다. 그 뒤로는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어 그의 지난날을 추모했다. 태종왕 때에는 재상 김량도가 서방을 신앙하여 두 딸을 희사했다. (두 딸은) 화보와 연보라 했으며 이 절의 사비로 삼았다. 또 역신이 모척 일족도 천역에 충당하였으므로 구리와 주석 두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천역을 맡고 있다. 내가 동도(東都)에 가서 놀 때 금강산 마루에 올라 외로운 무덤과 짤막한 비석을 보고는 슬피 울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날 산인들이 회식하려 하기에 그 까닭을 물으니 오늘이 바로 우리 사인의 기일이라 했다. 또한 떠남이 오래일 수록 생각은 더욱 깊은 것이라 하겠다. 아도비를 살펴보면, 법흥왕은 출가하여 법명은 법운, 자는 법공이라 했다고 돼 있지만, 지금은 국사와 수이전을 참고하여 두 개의 전기로 나누었으니, 옛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찬하여 말한다. 대개 나라 임금이 아랫 일을 일으킴에 있어서는 이루어 놓은 일을 지킬 수는 있어도 시작하기를 우려하는 일은 꾀하기 어렵다. 더구나 시기가 이롭지 못함과 믿고 믿지 않음에 달려 있음이랴. 원종은 비록 불법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행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본원력을 받들어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또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에 힘입어 능히 미리(美利)로서 세상을 이롭게 하여 마침내 한나라 명제와 수레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위대하고 위대함이여. 여기에 무슨 잔말이 있겠는가. 양나라 무제에게 그를 비교함은 잘못이다. 무제는 임금의 몸으로 대동사(大同寺)의 사노(寺奴)가 되어 제왕으로서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지만 법공은 이미 왕위를 사양하여 그 후사를 튼튼히 해놓고 자기 스스로 사문이 되었으니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염촉의) 경력은 소위 왕과 비구는 몸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음을 (보여주었다). (왕이) 환상의 구름을 쓸어 헤치고 본성이 공한 부처님의 지혜의 빛을 발하면서 그것을 품고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염촉의 힘이었다.
이차돈순교비 중 이차돈 순교 순간 조각.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髑滅身) : [원종이 불법을 일으킨 것은 눌지왕(訥祗王) 시대부터 100여 년 뒤의 일이다.]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이르기를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에 하급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불법을 위하여 자기 몸을 죽였다”고 했으니,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527)로 서천축(西天竺) 달마(達摩)가 금릉(金陵)에 온 해다. 이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도 처음으로 영취산(靈鷲山)에 머물면서 불법을 열었으니, 원화(元和) 연간(806~820)에 남간사(南澗寺) 스님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일이 매우 상세하게 실려 있다. 그 대략은 이러하다. 옛날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동쪽을 굽어 살펴보면서 말하기를 ‘예전에 한나라 명제(明帝) 꿈에 감응을 받아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과인이 왕위에 오른 다음부터 백성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조정 신하들이[향전(鄕傳)에서는 공목(工目)과 알공(謁恭) 등이라고 한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따를 뿐 절을 세우려는 신령스런 생각을 따르지는 못했다. 그러자 대왕이 탄식하며 말했다. “오호라! 과인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위를 이어 받았으니,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어그러뜨리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지 못하였소. 그래서 정사를 보는 틈틈이 마음을 불교에 두었지만, 그 누가 과인과 함께 일을 할 수 있겠소?” 이때 내양자(內養者)가 있어 성은 박씨고 자는 염촉(厭髑)[혹은 이차(異次)라고도 하고 이처(伊處)라고도 하는데, 방언의 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역하면 염(厭)이라 한다. 촉(髑)·돈(頓)·도(道)·도(覩)·독(獨) 등은 모두 쓰는 사람 편의에 따른 것으로, 이것은 모두 조사다. 윗글자는 번역하지만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아 염촉(厭髑) 또는 염도(厭覩) 등이라 한 것이다.]인데, 그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니, 바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 아들이다. [신라 관작은 모두 17등급인데, 그 네 번째가 파진찬(波珍飡) 또는 아진찬(阿珍飡)이라고 한다. 종(宗)은 이름이고 습보(習寶)도 이름이다. 신라 사람들은 왕으로 추봉된 사람들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으니, 그 뜻은 역사를 기록하는 신하들도 잘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살펴보면, 사인(舍人·이차돈)이 순교할 때 나이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이며 할아버지는 공한(功漢)이고, 증조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염촉은 대나무와 잣나무 같은 절개에 맑은 거울 같은 심지로 선행을 쌓은 집의 증손이었다. 그는 궁궐 안에서 왕을 보좌하는 신하가 되기를 바랐고, 또 거룩한 조정의 충신이 되어서 태평성대에 왕을 모시고 싶어했다. 당시 나이가 22세였으니 사인(舍人)[신라 관직에 대사(大舍)와 소사(小舍) 등이 있는데, 대체로 낮은 등급 관직이다.]이 되었는데, 용안을 우러러보고 왕의 심정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나무꾼에게도 계책을 물었다고 합니다. 원하옵건대 신이 큰 죄를 무릅쓰고 아뢰고자 합니다.” 왕이 말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인 염촉이 말했다. “나라를 위해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며, 군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의리입니다. 폐하의 말씀을 잘못 전했다고 해서 신의 머리를 베시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서 감히 임금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왕이 말했다. “옛날 시비왕은 자기 살을 베어 저울에 달아서 메추리를 쫓던 매에게 주어 그 메추리를 살렸다. 피를 뿌리고 목숨을 끊어 일곱 마리의 짐승을 불쌍히 여겼노라. 짐의 뜻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있는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쌓으려고 하지만 죄를 피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자 사인이 다시 말했다. “일체 버리기 어려운 것으로 자신의 생명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이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불법이 아침에 행해질 수 있다면, 불법의 해가 다시 하늘 한가운데로 떠오르고 임금님께서도 길이 편안하실 것이옵니다.” 왕이 다시 말했다. “난새와 봉황의 자식은 어려서도 하늘 위로 솟구칠 마음이 있고, 큰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태어나면서부터 파도를 해칠 기세를 품는다고 하더니, 네가 바로 이와 같구나. 보살의 행실이라 할만 하도다!” 그리하여 대왕은 일부러 위엄스러운 모습을 하고, 동서로는 바람을 일으킬 것 같은 칼을 늘어놓고 남북으로는 서슬이 퍼런 형을 집행하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신하들을 불러서 물어보았다. “경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일부러 지체시켰는가?” [향전(鄕傳)에서는 “염촉이 왕명이라 속이어서 절을 지으라는 뜻을 전하자, 신하들이 와서 간하였다.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염촉을 문책하고는 왕명을 거짓으로 전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했다.”고 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황급히 맹세하며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은 사인을 불러서 꾸짖었고 사인은 낯빛이 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니 대왕이 분노해 목을 베라 명했다. 유사가 사인을 묶어 관아로 끌고 가니, 사인은 맹세하고 옥리가 목을 베었다. 그때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쳐 올랐고[향전(鄕傳)에서는 “사인이 맹세하기를 ‘위대하고 거룩하신 법왕께서 불교를 일으키시려고 하시니, 내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속세에서 맺은 인연을 모두 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상서로운 조짐을 내리시어 사람들이 두루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날아 올라가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다.”라 했다.] 사방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비낀 햇살마저 빛을 감추었고 온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떨어졌다. 왕이 몹시 슬퍼하며 눈물이 곤룡포를 적시자, 재상들도 걱정하면서 진땀이 모자 밖으로 흘렀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 오르고, 곧은 나무도 먼저 꺾여서 원숭이가 떼를 지어 울었다. 태자의 궁궐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았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맞잡은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질 듯 이별을 슬퍼하였으며, 관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가 마치 부모를 잃은 듯했다. 모두가 “개자추(介子推)가 허벅지 살을 베어낸 것도 염촉의 고통스러운 절개에는 비교할 수 없고,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염촉의 장렬함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임금님께서 불교를 믿는 힘을 도와서 아도(阿道)의 본심을 이룬 것이니, 성자로다!”라고 했다. 마침내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하는 말에 머리가 떨어진 곳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지금 이에서는 이런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일까?]에 장사 지냈다. 대궐 사람들이 이 일을 슬퍼해 좋은 땅을 골라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이때부터 집집마다 예를 올리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도를 행하면 당연히 불법의 이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왕위에 오른 지 5년째인 갑자(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국사(國史)』와 향전(鄕傳)에 의하면 실은 법흥왕 14년 정미(527)에 처음 터를 잡고 21년 을묘(535)에 천경림(天鏡林) 나무를 대대적으로 베어내어 비로소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기둥과 들보 재목은 모두 다 그 숲에서 충분히 가져다 썼으며, 주춧돌과 섬돌과 감실 등도 모두 갖추어졌다. 진흥왕 5년 갑자(544)에 이르러서 절이 완성됐다. 그래서 갑자년이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서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를 지었다. 태청(大淸) 초년(547)에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를 가지고 왔고, 천가(天嘉) 6년(565)에 진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을 받들고 오니, 절이 별처럼 펼쳐지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섰으며,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매달았다. 뛰어난 고승이 이 세상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법이 나라의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 다른 지역 보살이 이 세상에 나타났고,[분황사(芬皇寺) 진나(陳那)와 부석사(浮石寺) 보개(寶蓋)에서 낙산사(洛山寺) 오대(五臺) 등에 이르기까지가 이것이다.]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강림했다. 이로 인해 삼한이 합쳐 한 나라가 되었고 온 세상이 합쳐 한 집안이 되었다. 그래서 그 덕 있는 이름은 천구(天구<金+具>)의 나무에 새겨지고, 그의 신성한 행적은 은하수에 비쳤으니, 이 어찌 세 성인의 위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아도와 법흥과 염촉을 말한다.] 그 뒤 국통(國統) 혜륭(惠隆)·법주(法主) 효원(孝圓)·김상랑(金相郞)·대통(大統) 녹풍(鹿風)·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파진찬 김억(金嶷) 등이 염촉의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 이때가 원화 12년 정유(817) 8월 5일이니, 바로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永秀禪師)[이때 유가(瑜伽) 여러 스님을 모두 선사(禪師)라고 불렀다.]가 이 무덤에 예불할 향도를 모아 모임을 만들고 매월 5일마다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 단을 만들어 법회를 열었다. 또 향전(鄕傳)에서는 ‘시골 노인들이 제삿날 아침이면 법륜사에서 모임을 가졌다.’라고 했다. 이번 달 5일은 바로 사인이 목숨을 바쳐 불법을 따르던 날이다. 아아, 이러한 군왕이 없었다면 이러한 신하도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신하가 없었다면 이러한 공도 없었을 것이다.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감응하여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법흥대왕이 이미 폐지된 불법을 일으켜 절을 세웠는데, 절이 세워지자 면류관을 벗고 승려 옷을 입었으며, 궁궐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절의 종은 지금도 왕손이라고 불린다. 그 뒤 태종왕(太宗王) 시대에도 재상 김량도(金良圖)가 불법을 믿었는데, 두 딸이 있었으니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고 한다. 그는 두 딸을 절의 노비로 삼았다. 또 역적 신하 모척(毛尺)의 가족도 절의 종으로 삼았다. 두 집안의 자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불법의 교화를 널리 펼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진흥왕은 그 아버지인 법흥왕 덕을 이어 받고 왕위에 올라 위엄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호령을 갖추었다. 그래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법흥왕은 성이 김씨이고, 출가한 이름은 법운(法雲)이며 자는 법공(法空)이다.[『승전(僧傳)』과 여러 설을 보면 왕비도 출가해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했으니 진흥왕도 법운이고 진흥왕비도 법운이어서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많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왕은 성이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다. 처음 절을 짓기 시작하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영흥사(永興寺)를 창건했다. 사씨(史氏)의 유풍을 사모하여 왕과 같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은 묘법(妙法)으로 영흥사에 살았는데 몇 해 만에 죽었다.” 『국사(國史)』에는 이렇게 적었다. “건복(建福) 31년(614)에 영흥사 소상이 저절로 무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흥왕의 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 살펴보니, 진흥왕은 곧 법흥왕 조카다.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은 박씨로, 모량리(牟梁里) 영실(英失) 각간 딸인데,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한즉 진(眞)을 마땅히 법(法)으로 고쳐야 할 듯하다. 이는 ‘법흥왕 왕비 파도부인(巴刁夫人)이 비구니가 되어 죽었다.’는 일을 말한 것이다. 이 분이 바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두 왕이 모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사관이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527)에 양나라 황제가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창건하고 대통사(大通寺)라고 했다.[웅천은 곧 공주(公州)인데, 이 당시 신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미년은 아닌 것 같다. 중대통(中大通) 원년인 기유(529)에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흥륜사를 처음 세운 정미년에는 다른 지방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성인의 지혜는 예로부터 만세 앞을 계획하나니 / 구구한 의논들 털끝만큼도 못하다네 / 법륜(法輪, 불법)이 풀려 금륜(金輪, 제왕)을 쫓아 구르니 / 태평성대가 불교로 인해 이루어지려네. 이는 원종을 찬미한 것이다. 의(義)를 위해 목숨 버린 것도 놀라운데 / 꽃비 내리고 흰 젖 솟구치니 /더욱 마음이 가는구나 / 문득 한 칼에 몸은 이미 죽었지만 / 절마다 종소리가 서울을 뒤흔드는구나. 이는 염촉을 찬미한 것이다.
고운집 제1권 기(記)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 기문〔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 : 천우(天祐) 5년(908·효공왕 12) 무진년 겨울 10월에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 중알찬(重閼粲) 이재(異才)가 남령(南嶺)에 팔각등루(八角燈樓)를 세웠다. 그 목적은 국가의 경사를 기원하고 병란(兵亂)의 흔단(釁端)을 없애기 위함이었다…기개가 드높은 자는 지망(志望)이 유달리 고상하고, 마음이 올바른 자는 신교(神交)가 반드시 정대하게 마련인데, 용년(龍年) 양월(羊月) 경신일(庚申日) 밤에 알찬이 꿈을 꾸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또 며칠 밤이 지나 다시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성 동쪽 장산(獐山)에서 취의(毳衣)를 입고 있는 나한승(羅漢僧)을 보니, 검은 구름을 좌석으로 삼고 무릎을 안은 채 그 산 어귀가 되는 지점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하기를 “이처도(伊處道)(목숨을 바쳐 불법을 일으킨 열사다〔殉命興法之烈士也〕-원주)가 이 지점을 통과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가 되었다.”라고 했다…그해 초겨울에 등루를 세우고 나서 11월 4일에 이르러 공산(公山) 동사(桐寺)의 홍순 대덕(弘順大德)을 초빙해 좌주(座主)로 삼고 재(齋)를 베풀어 경찬(慶讚)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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